[묵상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전봉석 2020. 11. 4. 05:50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 11:8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14:7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줄곧 ‘에브라임’이란 호칭으로 저들을 부르신다. 은혜를 갑절로 받은 것을 상기시키신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그대로 담겼다.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여기서 아드마와 스보임은 다섯 개국의 사해 동맹국 이방나라들이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그들과 같이 되었어도 그들과 같이 버려둘 수 없으셨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이를 시편의 말씀으로 이어서 읽으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하여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14:7).”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돌이키신다. 결코 저들이 오는 것을 쫓아내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럼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그렇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 그런다. 지옥을 아랑곳하지 않으니 구원하실 예수를 원치 않는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 73:27).” 그들은 거듭날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스스로 이를 원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로부터 떨어져 있다.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사 46:12).” 죄가 그들을 다스리니 성한 곳이 없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몸도 마음도 영혼도 병들었으나 저들은 알지 못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러니 저들의 실태는 실로 끔찍하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3-18).” 개그우먼 모녀가 자살을 했고 이를 애도하는 가운데, 누가 ‘나도 힘들다.’ 하니, 그럼 ‘너도 죽어버려.’ 하는 댓글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다. 죄의 다스림은 이처럼 악독하다. 저들은 마치 나병환자들 같이 진영 밖에 격리된 것과 같이 불결하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민 5:2).” 생명이 더러운 자들이다.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욥 36:14).” 미성년 여자를 꼬드겨 저의 나체를 유린하는 세상이다. 13세 미만의 아이가 어디 유듀브에 빠져 보름간 결제한 금액이 1억5천이 넘는다는 기사도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다. 악독이 가득하고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3).”

 

마귀의 올무에 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그저 사망 가운데 거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면서 나타나는 증상은 그야말로 참혹하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한술 더 떠서 이런 일 행함을 즐기고 잘한다고 격려하는 문화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이는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심인데, 저들은 이를 부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마귀가 그들 안에서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니 우리는 다른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도대체 저들은 어쩌면 좋을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저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을 철저하게도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 호세아서의 진술은 그것이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어둠 가운데 있어 어둠을 좋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도무지 해결 방법이 없는 듯하다. 오직 우리는 이를 보고 더욱 확실히 한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오늘 이처럼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비통해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불신은 ‘하얀 악마’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저들은 특징은 뚜렷하다. ‘자기변명이 늘 가득하다.’ 보면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러는 자신이 뭐 그리 나쁜가? 하고 항변한다.

 

또한 ‘거짓된 양심의 질책을 듣는다.’ 스스로도 옳다는 기준을 세우고 산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자신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이다. 특히 ‘감정에 붙들려 변덕스럽다.’ 저들의 특징은 일광성이 없다.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자신이 이로운 쪽을 찾아 쓸려 다닌다. 또한 ‘이 땅의 지혜를 선호한다.’ 성경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여러 사람의 견해와 설명을 덧붙이는데, 권위 있는 자의 말에 더욱 쏠린다. 그러니 다들 화려한 이력을 내세운다. 무엇보다 저들은 ‘영혼을 흔드는 속임수를 즐거워한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타로 점을 보고, 운수를 살피며, 할로윈 같이 귀신 놀이를 즐거워한다. 곳곳에 무당이 살고, 교회 안에 요가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저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거절한다.’ 혹은 이 또한 신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스스로 기도하고, 아는 지식으로 성경을 파악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기도와 사랑에 대해 회의한다.’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저 다만 ‘지금 당장, 확실한 근거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른다.’ 주의 은혜를 기다릴 능력이 저들에게는 없다.

 

한 마디로 불신이다.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시 106:24).” 다른 도움을 찾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기도 응답이 즉각적이지 않고 말씀의 뜻이 고루하며, 이루어지는 일이 지체되면 가차 없이 다른 대안을 찾는다. 마치 사무엘을 기다리다 스스로 제사를 지낸 사울 왕과 같다. 나름 다급하니까!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우리는 다르다.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심은 말씀을 바라고 주의 뜻을 의뢰하게 된다. 결국 저들 속에 두려움이 없으나 우리는 떨며 온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저들에게는 절망뿐이다. 불신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8-19).” 오늘 나는 새삼 느끼는 것이 말씀밖에 없다. 다른 대안은 없다. 세상이 악한 게 당연하다. 어둠뿐인 것도 분명하다. 스스로 마음을 더럽히는 사회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5-16).” 아,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두려워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