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전봉석 2020. 11. 13. 05:38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7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슬픔을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어디 병에 걸려 통증이 오면 빨리 낫고 통증만 없애려고 할 게 아니라, 그 원인을 찾고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야 한다. 슬픔이나 좌절, 낙심이나 여러 고통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다. 오늘 말씀을 그런 시각으로 다시 본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전날에 부친의 폐암 진행과 그 결과가 어떠한지, 친구는 통화하며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소세포폐암이라 항암치료도 어려운데, 본래 신장이 안 좋으셔서 투석을 하는 중이라… 그래봐야 1년 남짓. 다음 주부터 열흘간 방사선치료를 한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어차피 그 정도 시간 안에서의 것이라…. 듣는 동안 마음이 안 좋았고, 앞서 저의 동생을 위암으로 먼저 보낼 때 나와도 각별한 시간이 은혜로 주어졌던 터라, 마음이 어렵고 생각이 많은 대화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이와 같은 고백이 저만의 것일까? 나는 그저 안타까움에 쯧쯧 혀를 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제 또 이런 말을 할까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해야 할 말을 하였다.

 

죽음이나 고통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한사코 외면하고들 살지만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사느라 드는 비용처럼 낙심과 좌절과 염려도 다르지 않다. 그럴 때마다 우린 빨리 그 슬픔을 해치우려한다.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두지 않는다. 고통을 무조건 진정시키는 데만 애쓴다. 정작 그와 같은 고통을 통해, ‘언제 네게 주의 이름을 또 간절하게 부른 적이 있니?’ 나는 친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고통의 극점인 죽음을 앞에 두고 급기야 우리는 연마 된 은혜로 견디고 이를 오히려 찬송할 수 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오늘 시편은 특별한 누구만의 고백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들의 공통된 노래이고 찬송인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다시 오늘 아모스의 적절한 비유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오롯이 그 관심이 ‘나에게’ 있으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모두 다 그래, 인생 다 그렇지 뭐, 우리 나이 때 늙으신 부모들이 죽는 거야 자연의 이치인데… 하는 따위의 말이나 생각을 무색하게 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 자, 그러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닥친 이 고통과 슬픔을 모르실까? 어쩌다 임한, 다 그렇고 그런 인생이고 자연의 이치인가?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3).” 전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슬픔마저 허사이고 죽음마저 그 값을 못하면 어찌 되는가? 괜한 슬픔은 없다! 어쩌다 죽음은 결코 없다! 그저 인정이나 말로 끌려 위로하고 말 게 아니다. 다 그 슬픔에는 값이 있다. 이유가 있는 고통이다. 아니면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4).” 공연히 슬픔이나 좌절이 우리를 덮치는 게 아니다. 사자가 움킨 게 없는데 쓸데없이 포효하고 으르렁거릴 리 있나?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5).” 빈 덫이 저 혼자 허공을 움킬 리 없다. 그런데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6).”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다. 이를 아는 자를 하나님은 주목하심이고 각별한 이유와 목적으로 슬픔이나 고통, 죽음까지도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를 아는 자들이 은혜 입은 자이다. 슬퍼만 할 게 아니다. 고통스러워만 할 게 아니다.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의 뜻을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알리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7).” 오늘을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선지자요, 말씀을 받아 그 뜻을 헤아리는 은혜의 사람들이다.

 

곧 우리 주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오늘의 슬픔은 다 그 값이 있는 것이다. 공연히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고, 또는 인생 다 그렇고, 남들 다 겪는 그런 일로 치부할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족속을 주목하시는 게 아니라 “너희만 알았나니!” 그리하여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8).” 주어진 슬픔과 죽음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의인은 그 죽음까지도 선을 이루는 데 쓰신다. 누구의 죽음이 누구에게 주의 부르심의 음성이 된다. 남의 슬픔이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그저 슬픔이고 그저 고통인 것은 없다. 당면한 문제를 덮어버리고 너무 빨리 치우려고만 하면,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한 죄는 단지 간음이 아니라 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교사로 이어졌고, 이를 무마하려 은폐하는 거짓술수로 덧칠되었음을 우린 잘 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저의 절규는 오늘 날 우리들로 하여금 찬송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확신을 붙들고 장담하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돌아선 일도, 제자들이 모두 떠나 물고기 잡으러가는 것도, 슬픔과 고통 당면한 문제를 빨리 해치우듯 모면하려 들 때 생겨나는 증상이다. 너무 빨리 슬픔을 이겨내려 하기보다 충분히 그 슬픔이 슬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때 아니면 언제 또 그만큼 절실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던가?

 

훗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보자.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저는 이제 확신하는데 전에 자신이 장담하던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의 목소리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 근심과 슬픔은 어쨌든 잠깐이다. 저가 동생이 위암으로 먼저 죽을 때도, 다들 영영 슬픔에 젖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잘들 살았다. 이제 부친의 죽음도 단지 그저 슬퍼하다 말 일로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연마하신다. 단련하여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께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8-9).” 이와 같은 은혜의 단련이 없었다면 베드로의 설교도 없었다. 그저 물고기 잡으러 가서 옛 생활로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훌훌 털어버리듯 딛고 일어서기에 급급하였다면, 이러한 놀라운 진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10-11).”

 

우리에게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다. 분명한 이 사실을 앞에 두고 슬픔으로, 죽음으로 무마하고 말 성질의 은혜가 아니다. 이러한 인생행로의 유익은, 먼저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게 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다. 모든 고통은 죄의 산물이다. 예외는 없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우리 같이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고 괴로워하셨다. 또한 이러한 인생행로를 통해 우리의 영혼 구원이 왜 그처럼 귀하고 절실한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늙어서 병들어 죽거나 안타깝게 젊고 어린나이에 죽거나 이는 결국 육신의 한계이고, 다만 그러하여서도 영혼의 구원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값을 물 값어치가 없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8).” 그러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그저 살다 죽는 인생으로 치부하면 짐승과 다를 게 뭐 있겠나? 이와 같은 인생행로는 우리의 영혼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각별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려준다. 또한 이처럼 인생행로는 하나님이 우리 한 영혼을 얼마나 각별하게 귀히 여기시는가를 알려준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8:12).” 슬픔과 고통, 죽음까지도 동원하여서 영혼을 살리신다.

 

다음 또 인생행로는 우리가 아무리 죄로 물들고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해도 돌이켜 주께 나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를 알면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이를 알면 비로소 우리의 남은 생은 그 할 일을 찾는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또 있겠나? 핵심은 주의 사랑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2).” 우리를 결코 내쫓지 않으시고 모든 죄에서 사하여 주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저는 우리가 죽어서도 영영히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인생행로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게,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도 어린양도 구속사역도 창세전에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자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나는 오래된 친구의 믿음과 온전한 은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저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정에 매인 것이고, 그 가치는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에 비하면 사족이고 사사로운 것이다. 슬퍼만 할 게 아니다. 부친 본인도, 저의 죽음을 선고 받은 가족들도, 이와 같은 인생행로를 통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시금 찾고 그 은혜가 회복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