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1:1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아모스는 제사장이 아니고 목자 중 한 사람으로 남유다에서 태어나 북이스라엘의 경계에서 자랐다. 일반인인 저를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에게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 당시 아람이 앗수르에 눌려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자, 잠시 이스라엘은 번영기를 누렸고 그로 인해 지도자들은 부패하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어기었다. 죄는 늘 반복적이며 우후죽순처럼 삽시간에 번져 모두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아모스는 드고아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느슨한 마음이 우리로 죄를 따르게 한다. 안이함은 간절함을 소멸시키고 나태함을 불러온다. 어제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예수 재림신앙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며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일은 지혜의 하나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는 언제고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모처럼 점심 때 산책을 하다 친구와 통화를 했다. 어디가 아프고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제 우리 나이에 흔한 일이라, 이것으로도 자신이 해이하지 못하게 하는 지혜가 된다. 결국 지혜자의 말처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우리 인생의 봄날은 가고 노년에 이르러 주를 우러를 수 있는 것이라도 고맙다. 저의 형님은 의사라는 좋은 직업과 재능을 가지고도 술주정뱅이가 되어 그 즐거움으로 산다고 하니. 또한 다들 눈만 뜨면 주식부터 확인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장을 보며 울고 웃고 마음이 끌려 다닌다. 애당초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게 하심이 오히려 감사하다. 친구는 여전히 몇 천을 손해를 봤다면서 그걸 만회하려 더, 더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의 미련함이란 참으로 못 말리는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교회를 다시 나가고, 두 번만 더 성경공부를 하면 자신이 또한 평신도로서 누구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며 주저하기에 꼭 하라고 일렀다. 잘하고 못하고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느라 들이는 마음과 시간이 귀하였다. 우리가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란 일반인이냐 제사장이냐 하는 따위의 직함이 아니다. 목사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라지만 그래서 더욱 그럴 수 있는 자리와 위치가 감사한 일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러니 오늘 우리의 신분이 아니라 그 역할과 삶의 기회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그리하여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역약함을 굴복시키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같은 동시대를 살며 친구로 곁을 같이 하던 사이가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어쩐지 통화를 하고 싶다 싶더니 모처럼 반가운 소리에 한껏 응원을 해주었다. 이런저런 ‘어렸을 때’의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으나 이것 또한 곧 ‘장성한 사람’으로 버리게 될 것임을 안다.
때로는 긴가민가 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반드시 그 날이 온다. 어느새 훌쩍 우리 나이가 장년을 지나고 있었으니 한참 때는 예순 살이 까마득하였는데, 곧 저도 퇴직이라는 소리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처럼 순간이었다. 여전한 우리의 연약함을 두고 우리의 구원자 예수께서는 오늘도 중보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우리와 같이 육체로 거하셨던 하나님이시다. 우리도 그 안에서 거함으로 충만하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오늘 나의 충만함, 우리 믿는 자의 충만함은 마치 단단하게 박힌 못과 같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사 22:23).”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붙들고 살 것인가? 아침에 눈 뜨면 주식의 장폭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를 바라보자. 재림신앙은 우리로 늘 그 긴박함을 알게 한다. 조금 우스운 대입이지만 나는 가끔, 다시 이 자리에 못 올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가령 내일 아침에는 이처럼 온전히 앉아 말씀 묵상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오늘도 교회로 나갈 수 있는 게 귀한 것은 내일은 그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지금은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나 더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종종 이러한 생각은 극단적인 것 같으나 상대적으로 그래서 더 지금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게 된다. 아주 더 웃기는 소리지만 언제 응급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종종 속옷을 입을 때도 깨끗하고 반듯한 것을 입고 옷차림에도 신경을 쓴다. 이를 두고 강박증이라 하면 할 말은 없다. 우리의 재림신앙은 이처럼 다소 강박적인 요소를 띈다. 늘 주의 재림이 언제일지 알 수 없음으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을 더 소중히 여기며 긴장하게 된다. 인생사 다홍치마라. 나는 미국 대선을 지켜보며 트럼프의 자기주장과 자가당착이 함축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의 단면을 생각한다. 그러니 아무리 기를 쓰고 억지를 부린들? 친구와 나는 어느새 내일모레면 퇴직을 운운하며 노년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절이 되었다.
아,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럼에도 ‘우리를 위하여’다(히 9:24). 이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나는 이제 어떤 책을 고를 때, 누구와 대화를 할 때 상시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을 근거하여 인용하고 묵상하고 되새기며 나의 어리석음을 인정한다. 내 생각, 나의 주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반인, 평신도 아모스의 사명을 친구에게 들려주어야겠다. 그래도 꾸역꾸역 성경공부를 마쳤고, 이제 그럼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 되는데 이를 주저하는 일이어서, 할 수 있으면 해라. 못하겠더라도 해라. 나는 저에게 단호하게 권면하였다.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날 위해서 소중하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을 하는 까닭도 실은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심지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것을 꼭 누구 때문에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나의 소박함이 너무 단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로 인하여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여 준다. 말씀은 말씀으로 귀결된다. 나는 이 진리에 남은 목숨을 걸었다. 말씀이 아니면 아무 것도 소중히 여길 가치가 없고 인생의 지렛대가 되어 줄 수 없다. 비록 너무 많은 세월을 탕진하듯 허비하였으나 남은 생애만큼은 말씀으로만 살고 싶은 이유다. 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기껏 공들여 모아 올린 주식이 무슨 소용이고, 부동산이 어쩌고, 그 학식으로 술에 취해 사는 인생은 또 어떤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2).” 나는 바울의 저 마음이 내 것이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요엘이 가고 아모스가 온들, 더할 사람은 더하고 돌이킬 사람은 돌이킬 것이다. 곧 우리가 바라는 영생은 상상에 의한 막연한 어떤 게 아니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리하여 나는 말씀으로만 나의 남은 생이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더 이상은 굳이 좋은 사람, 좋은 관계를 운운하며 ‘사람 사는 맛’을 꿈꾸지 않는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저와 나도 상관이 없다. 저가 말씀과 관계하지 않는다면 굳이 친구고 선생이고 더는 바라지 않는다. 오직 나는 이제 말씀의 권위 아래에 나를 복종시키기를 바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오늘 시편의 말씀도 그리 음미하며 묵상하였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우리에게 두신 권세나 영광이 다 주의 힘으로 말미암음이다. 그렇게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2).” 이것은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3).” 그러므로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5).” 이에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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