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아모스 7:7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인생은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누구는 모래 위에 짓고 누구는 반석 위에 짓는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서로의 결과는 뚜렷하여 하나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또 다른 하나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결국 “이는 주추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른 것이고, “반석 위에 놓은 까닭”으로 ‘모래 위에 놓은 까닭’과는 엄연히 다른 결과로 끝이 난다. 그 전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의 차이다(마 7:24-27). 성경은 그리스도다. 예수님의 이야기다. 저는 누구인가?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시험을 당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저는 사람으로 계시는 동안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사람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사람과 같이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그 하나님이 오늘 아모스에게 보이신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암 7:7).” 다림줄은 바로 세워졌는가, 하고 정확한 수직을 측정하기 위해 추를 달아 늘어뜨리는 줄이다. 이는 마치 우리를 억압하는 '시험'이라 보면 어떨까? 어렵게 하고 때론 슬프게, 괴롭게, 좌절하고 낙심하게도 하는 것이나 이를 통하여,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 믿음을 단련하신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어떤 의미에서 얼렁뚱땅 건물을 세우고 짓고 말면 좋겠는데, 그렇게 다림줄을 우리 곁에 두시고, 틀어지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시로 측정하신다. 이 시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도 당하셨다는 것인데, 저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기준 그 자체이심에도 말이다. 곧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와 같은 빛이 나를 비출 때 오늘 시편의 고백이 가능한 게 아닐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이는 그리 여겨지는 일이 아니라, 뽕나무를 기르며 양을 치던 아모스에게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한 것과 같다.
이를 보고, 곧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신 것을 보고 두려워할 줄 아는 기쁨이 은혜였다. 그러할 때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곧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고 살고 있는지 물으시는 주의 빛을 들어야 한다. 그럴 때,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암 7:1).” 이 보이심은 저들을 통한 우리의 올곧지 못한 자세이겠고, 바르지 못한 삶이었겠다. 곧 누구의 어려움과 고통을 보다, 오늘 우리에게 비치시는 참 빛을 보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오늘 시편의 고백은 거기서 나온다. 빛은 체험이 아니고 영접이다. 사는 날 동안 사는 일에 있어 다들 그러고 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는 추구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럴 거면 굳이 믿고말고가 뭐 있나? 남들처럼 살면 그만인데!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서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롬8:25). 노아의 120년 긴 기다림의 세월도 그러했을 테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던 롯의 애처로운 삶도 그러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마지막 날’에 알게 될 일이다. 이를 믿음으로 우리의 앞서서 본다. 보이는 이 '은혜의 연마'는 시험이 주는 다림줄이다. 시험은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이런저런 고통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다, 그러느라 말씀을 뒤적거리면서 나는 자주 내 영혼의 다림줄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저에게 뭐라 하는 소리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붙드시는 것을 말이다. 이는 내 능력이 아니었다. 내 안에 더하시는 이의 것이었다. 저가 더하시고 저가 높이신다.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시 89:19).” 다만 나는 속 끓이고 애타하는 시험을 통해 나의 은혜는 연마되었다. 당연하여서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눅 1:68, 70-71).” 저로 인하여 내 안에 애끓는 심정이 결코 괜한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이제는 확신한다. 굳이 뭐, 하고 외면해도 될 일이고, 나몰라라 그만인 것을 두고 나는 애타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의 감정이입을 꺾지 않으신다. 내가 속상해하다 주를 찾고 주의 이름으로 위로 받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이것이 복이었다! 그러나 빛을 어둠은 싫어하는데, 나의 본성이 그러했었고 우리의 공통된 마음이 또한 그러하지 않던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도대체 우리는 죄다 왜 그러는 것일까?
우선은 말씀을 듣지 않는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모르거나 왜곡해서이다. 그저 더 위로나 격려, 서로를 부추겨 같이 친목을 도모하고 잘 살아보자는 정도로나 말씀을 되새기는 시대이다. 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7).” 이 복음은 예수시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죄 없으신 저가 사람의 모양을 하신 까닭은 사람으로 사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는 엄청나고 끔찍하고 놀랍고 두렵기만 한 소식이다. 복음을 단지 사람으로 살면서 그 사는 날 동안의 위안과 위로 정도로 전락한다면 굳이 복음이 아니어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것까지야 없으셨지 않겠나? 누가 종종 늦은 출근길에 전화를 한다. 그 시간에는 늘 나 혼자 있는 것을 알고 그러는데, 어제는 이번 주일 자기네 교회에서 있었던 어느 영상을 두고 낄낄거렸다. 코로나 때문에 성가대가 서지 못해 이를 영상을 담아 예배 전에 틀어주는데, 누가 찬양과 율동을 기막히게(?) 편집하여 이를 영상으로 띄워 이를 보는 사람들의 호응이 아주 재미있었다는 소리다. 코로나 시대의 ‘웃픈 이야기’다. 뭐라 굳이 할 말은 없었지만, 온통 ‘코믹한 게 먹히는 세대’다! 슬픔도 웃자고 드니 '웃프다.' 슬픔을 슬퍼할 줄 모르는 시대다. 애도가 사라졌다. 애곡과 애통함이 비난을 당한다.
암울한 현실에서 본래 사람들은 이를 이겨내고자 풍자를 일삼고, 희극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마련이다. 그러느라 우린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다. 어둠을 온전히 어둠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체발광으로 빛을 대신하려 드는 것이다. 굳이 무거운 말씀을 듣기 원하지 않는다. 예수를 바로 알길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 말고, 오병이어나 병고치고 바다 위를 걷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충분히 어둡지 못하고, 빛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바로 그 곁을 같이 하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둘 도로 물고기 잡으러 옛생활로 돌아갔던 것도 그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야기다. 죽으심 없이 부활이 가능한가? 우리 안의 어둠은 세상에 묻힌 것이다. 다들 아니라고 하며 잘만 사는 것을 왜 꼭 굳이 우리가 빛을 구한다며 어둠을 싫어해야 할까?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사 60:2).” 그러니 믿으면서도 믿음이 썩 좋지만은 않다. 애매하게 당혹스럽다. 예전의 나는 그러했고, 행여 지금도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두렵다! 조세희의 소설 <난쏘공>에 첫 대목이 굴뚝 청소를 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하나는 유난히 그 얼굴에 검댕이가 묻었고, 하나는 웬일인지 깨끗하고 멀쩡하다. 누가 과연 얼굴을 씻으러 갈까? 어둠이 어둠을 보지 못하듯 빛이 있어 어둠이 비로소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알 수 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밤처럼 어두워도 우리는 어둠에 속하지 않는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특히 요즘처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시 또 코로나19 전염병이 ‘조용한 전파’를 타고 실제 곳곳에서 발명하고 있는 이때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돌이켜야 한다. 오늘 아모스에게 보이시는 다림줄은 그리 경고한다. 나는 그리 읽는다. 누구의 죽음이 곧 나의 것이다. 예외는 없다. 그래서 오늘 아침도 시편의 기도로 읊조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다른 대책은 없다. 무던히 또한 묵묵히 말씀 앞에 앉을 뿐이다. 그리고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주어진 사명에 충일할 수 있도록, 내 안에 가득차서 넘치는 빛의 충만함으로. 그리하여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7).” 결코 우리는 누구도 몰랐다고 핑계댈 수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 27:5).” 그래서 나는 말씀 앞에 아멘, 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곧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7-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0) | 2020.11.19 |
---|---|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0) | 2020.11.18 |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0) | 2020.11.16 |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0) | 2020.11.15 |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0) | 2020.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