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전봉석 2020. 11. 19. 05:54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아모스 9:10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편 29:2

 

 

 

우리는 언제부턴가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로, 서로의 견해와 생각을 존중하는 데 높은 의식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사람 중심의 사회에서는 그러한데,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다. 틀린 건 틀린 것이다. 틀린 게 다른 게 되고, 죄가 질환이나 우발적인 사고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오늘 말씀은 무서운 경고로 들린다.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 9:10).” 율법 없이 죄를 지으면 율법 없이 벌을 받고 율법을 알고도 죄를 지으면 율법에 따라 벌을 받는다고 하셨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요 며칠 나는 아주 희한한 기사 하나에 놀라워하고 있다. 일본인 ‘사유리’는 우리나라에서 방송활동을 하여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저가 ‘비혼임신’을 화두로 던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으로 금지 되어 미국인의 정자를 받자 일본에서 아이를 출산한 모양이었다. 이에 앞서 7년여 전에 ‘허수경’이란 방송인이 ‘비혼임신’을 한 경우가 있다. 그때에는 법이 따로 없어 저를 제지하지 않았고, 아무도 선뜻 그러지 못하는 데 저의 용기(?)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번 사유리 사건을 두고 정치권에서부터 지지와 응원의 메시지가 나와서 어이가 없다. 어느 논객은 사유리를 두고 ‘물건’이라 비유하며 경탄해마지 않았다. 기가 막힌 노릇은 미국인가 어디에서는 또 여성이 커밍아웃을 하여 남성으로 살다가 누구의 정자를 받아 ‘비혼임신’을 하였고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저가 아이의 아빠인가? 엄마인가? 하는 논란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까칠하게 수염을 기른 엄마가 남자로 살면서 아빠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이다. 언제부턴가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우호적인 것은 물론 이를 반대하거나 부정하면 미개인, 또는 광신자로 전락하는 문화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바벨탑을 연상하게 되는 것일까? 전에는 나 또한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로 여겨야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 중심의 사회', ‘사람이 먼저다’에 동의했었다. 하지만 이보다 악한 구호는 없다. 평화주의는 이단이다. 종교화합이나 서로의 융합도 이단이다. 율법이 왜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한지 알겠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 시대에 산다 해도 율법을 잃어버리면 은혜도 없다. 사람은 악하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의와 주장으로 살기를 원한다.

 

속담 가운데 ‘사랑할 때와 전쟁할 때는 모든 게 정당하다’는 말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것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무슨 공리주의도 아니고, 서로의 유익이 선의 기준이 되었다. 절대 기준은 사라져서 사람들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를 우선하는 편의주의가 팽배하다. 서로는 다만 행복하기 위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법으로 보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된 여자의 몸에서 그 자궁에 정자를 받아 임신을 할 수 있다. 아이에게는 아빠인지, 엄마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권리는 무신된 채 강요되는 행복이다. 남자는 싫고, 결혼은 거부하면서 자기의 행복 추구권을 내세워 자기결정에 따라 용감하게도 비혼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두고 서로들 지지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선과 도덕의 기준도 달라졌다고들 말한다. 결혼 전에 서로가 좋으면 합의하에 동거를 하는 건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우리는 모여서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서로들 꾀를 낸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태초의 사람이나 오늘의 사람이나 사탄의 꾐에 넘어가는 것은 다를 게 없다.

 

우리 안에 사탄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우회적으로 물었다. ‘모든 나무’가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한 그루만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일반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에 물타기를 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은 순간 현혹되어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게 대답을 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사탄의 질문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사람은 분명하게 들은 명령을 애매하게 대답함으로, 사탄은 가차 없이 이를 파고들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그러니 순간 먹음직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을 테고! 가만 보면 모든 게 다 그런 식이다. ‘하지 말라.’ 하신 일에 사람이 지혜를 낸다. 그러면 서로는 창의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죄를 부추겨 서로를 응원한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을 양육할 때도 가장 나쁜 교육이 ‘안 돼!’,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단정 짓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져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나아가 수동적인 인물로 성장한다나? 하면서 야단치고 매를 때리는 것에 극구 반대하고, 이를 마치 야만적인 처벌인 것처럼 이해한다.

 

선진화된 나라의 교육은 일찍이 이처럼 아이들의 존엄을 존중하여 성교육을 시키고, 콘돔 사용이나 피임에 따른 방식도 가르치게 되면서, 오늘 날 그 형편은 어떤가? 미성년자의 임신율이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고, 미혼모가 늘었고, 무분별한 성관계로 인한 성병이 급증하였으며, 서로가 좋으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는 게 문화가 되었고, 미성년자가 지나면 누구라도 자기 권리에 따라 동거할 수 있다. 이를 서로가 부추겨 선진화, 문명화된 사회로 정의한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낙태를 합법화하고, 간통죄는 폐지되었으며, 누구라도 커밍아웃을 할 수 있고, 이를 또한 성소수자라 하여 보호하고 비난하면 미개인이 된다. 동조하며 응원해야 의식 있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더는 도덕적 모범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극점에 달했는데도 사회는 이를 부정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사람의 마음이 악한 것을 사람만 모른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0-11).” 그 결정에 따른 결과는 또한 고스란히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나는 요즘 사유리나 허수경이 외에 저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문화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람들은 자녀교육을 아이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데 급급하여, 최종적인 결과를 분간하려 하지 않는다. 

 

저들이야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며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어 비혼을 선택하고 종교적인 자유를 주장한다지만 그럼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또 뭔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취향에 따라 성별을 고르고, 거세하고, 짖지 목하게 성대수술을 하여 기르다 마음에 안 들면 내다버리는. 마치 스스로들 뭐나 되는 듯 우월주의에 빠진 꼴이다. 하긴 역사적으로도 근대에 들어 1차대전이 있은 후 모두들 곧 나아질 것이라는 이상주의에 빠졌다가, 뒤이어 2차대전을 겪으면서 허무주의가 팽배해졌다. 그러다 오늘에 이르러 ‘하지 말라!’ 보다 ‘이러면 좋지 않나?’ 하는 타협점을 찾게 되었고, 이를 마치 문명화된 현대인의 특징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사탄은 본래 그렇게 사람을 꾀었었다. 다시 한 번 동의하지만 ‘평화주의는 엄연한 이단이다.’ 정죄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짐승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본능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을 꾀어놓고 사탄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사람을 정죄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2-3).” 어느 훗날 우리는 싫든 좋든 주의 심판 앞에 설 것이다. 그러든 말든 짐승들은 알 리 없고, 자기들 주장에 함몰된 사람들은 그 심각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럴 리 없고 설령 그렇다 해도 자신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자신의 선택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짐승과 같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땅의 권세 앞에서는 굽실거리느라 직장상사한테도 감히 복종하면서도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순리와 이치를 역행하는 것이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 이처럼 서로를 들어 치시는 까닭은 그래도 아직 은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89:7).”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복이었다. 자유를 운운하나 방종이 되었고, 존중의 가치를 운운하지만 가치기준은 오히려 더 낮아졌다. 스스로의 몸을 개 돼지처럼 굴린다. 자신을 숭배하는 교육은 ‘아닌 건 아닌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 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 인권을 운운하지만 잘난 줄 알있던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동물적이고 미련한지, 열심히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꼴이 되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요즘은 다를 자기 잘난 줄 알고, 그 잘난 맛에 사는 시대라고 하지만, 뭐라 한들. 아, 그러니 나 하나 올바로 말씀 앞에 서는 것이 문제다. 그럴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하시는 오늘 말씀을 붙든다. 어쨌든 그 날이 온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오늘의 말씀이 소망을 주시면서도 두려움을 더한다.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5).” 우리가 살면서 자긍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교만이고 죄악인지! 도대체 ‘사유리’를 두고 '열린 여성'을 운운하는 여야 정치인들은 뭐하는 작자들일까? 법을 만들어야 하는 입법부가 그 모양이니, 조만간 사람의 몸에서 각자의 기호에 따라 애완용 동물을 잉태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아,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10).”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율법이 없이 은혜의 깊이를 알 수 없겠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 모순된 죄악을 섬기며 살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얼마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인가를 알려준다.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나의 더러운 옷을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4-5).” 사탄의 정죄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혜를 두려움으로 사모하는 것이 옳을 거였다. 나의 이 끔찍한 죄를 죄로 알게 하시는 율법을 사랑함으로 비로소 은혜를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씀으로 꿇게 하심은 자복하게 하심으로 은혜였다. 은혜의 연마는 말씀으로, 율법으로 ‘아니면, 아니라’ 할 줄 아는 것이었다. ‘틀리면 틀리다’ 말해야 한다.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희석하는 문화는 베벨의 문화다. 서로를 추켜세워 존중하는 문화는 개도 부러워하지 않을 저주 받은 문화이다. 죄를 더욱 죄로 물들이는 것이 사람 중심의 사회이다.

 

오늘 시편의 기도가 절실하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그럴 수 있는 힘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기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