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 3:4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편 33:17
요나가 한 일은 저것이 전부이다. 그가 그들과 생활하며 선을 행하고, 의를 쌓으며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 복음을 전한 게 아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4).” 너무 싱거울 정도로 복음은 단순하다. 죄를 뉘우쳐 회개하지 않으면 ‘무너지리라.’ 본을 살펴도 저가 전한 것은 그게 전부이다! 시편의 언급처럼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시 33:17).” 새삼 놀라운 것은 그가 전한 말씀, 외침 하나가 저절로 다 하셨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어쩌면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1-2).” ‘말씀대로 일어나, 가서’ 외쳤다(3). 눈길이 가는 부분은 사흘 길을 걸을 만큼 큰 성 니느웨를 그것도 겨우 하루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그러니 저가 한 일은 뭔가 대단한 게 아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한 것뿐이다. 마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심지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어야 그것이 마치 대단히 희생이고 복음사역인 것처럼 우쭐대며 한 것 같이 여긴다(고전 13:1-3).
그런 자들이 훗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얼마나 우리 안에는 자기 의로 뭐를 해야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곤 하는지 모른다(마 7:22). 그러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전에 어느 목사의 인터뷰를 보다 오금이 저린 적이 있다. 저는 특히 한국교회에서 청년들을 세우고 부흥하게 하는 목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다 성추행이 붉어졌고 세간에 이목을 끌다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러면서 교회로부터 전별금으로 19억을 받았다. 이를 두고 인터뷰하는 기자가 너무 과한 금액이 아니겠나? 하고 묻자, 자신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모든 것을 희생한 것에 비하면 이 금액도 모자란다고 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고 이를 누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알 것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 덜 받은 것 같다고도 주장하였다. 너무 단적인 예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안에는 저마다의 억울함? 나름의 수고와 헌신에 따른 희생? 그것을 하나님도 알아서 보상해야 한다는 어떤 막연한 심리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종종 교회에 물의를 일으켜 언론에 오르내리는 목사의 변을 듣다보면 나는 오금이 저리고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해, 평생을, 얼마나, 어떻게 희생했는지’를 저들은 마치 셈을 하고 살아온 사람들 같다.
오늘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은, 요나가 한 게 없다. 삼일은 돌아야 하는 큰 성에서 그것도 겨우 하루를 돌며 외친 게 전부다. 어쩌면 그 한 마디?! 그러자 시편의 언급처럼 복음이 저절로 일하시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욘 3:5).” 심지어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6).” 회개는 들불처럼 번져 삽시간에 니느웨성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였다(7-8).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나는 순간, 새삼스럽게도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얼음’이 된다. 뭔가 더, 자꾸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에 시달릴 때가 있다. 누구를 위해서도, 무슨 일에 있어서도, 나의 수고와 의는 더해져야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줘야 할 것 같다.’ 나름 그런 선한 의지가 우리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꼭 뒤따르는 것은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아니꼬움’이다. 누구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내가 널 위해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기 의가 나를 주도하는 것을 종종 본다. 서운함이 앞서고 괘씸한 마음이 들면 삽시간에 그간의 사랑이니 희생이니 하는 따위는 물거품이 되고, 은근한 저주가 마음에 찬다. ‘어디 잘되나, 한 번 두고 보자.’ 하는.
우리 안에 주의 영이 계신다 함은 이러한 것에서조차 자유해야 옳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지금은 때로 선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 영광을 뚜렷하게 볼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긴가민가할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애매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이 길이 맞나? 싶은.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섣불리 예단하고 판단할 게 아니다.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한 마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선포, 그 복음의 씨앗 하나가 된다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이고,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조건으로 죄 사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회개도 할 수 있는 은혜로 인한 것이지, 회개를 했다는 조건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서 정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앤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지 우리의 그 어떤 공로,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해서 이뤄진 결과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고약한 죄는, 자기 의다. 내가 그래도 이만큼은 믿는다고 믿는 믿음이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 우상의 특징은 동시에 억울함을 더한다. 선하게 살았다고 여기는 한 자기 공로를 버릴 수 없다. 나름 한다고 했다는 자기 희생이 있는 한 은혜는 은혜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소위 말해 하나님과 나의 합동 작품? 동역? 그런 주장이 버젓이 복음주의 안에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이와 같은 작은 오해가 엄청난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누구를 위로하다, 저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은혜를 달라고 하면서 내미는 그릇이 간장종지만한 것이어서 만날 부어주시데도 은혜가 너무 야박한 것만 같다. 정작 자신이 받지 못함이 그 작은 그릇 때문인 것을 모르고 말이다. 자신은 매일 기도하고, 하루에 성경도 몇 시간씩 보고, 교회를 위해 어런 헌신, 저런 봉사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왜 이렇게 인색하고, 그것도 더디기만 하시는가? 마치 체납된 월급을 요구하듯 억울해한다. 요나는 그리하여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은 하나님한테 더 억울한테 마음이 들었다. 이러려고 자신을 그 풍랑을 만나게 하고 물고기 뱃속에 던지셨나, 싶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나님 앞에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3).” 우리의 고질적인 병은, 자기 의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그저 무력하게 은혜를 구하네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은혜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었고, 오늘 날에는 나름 경건으로 산다고 사는 사람들이다. 엄연히 우리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이 놀라운 차이를 안다면 내가 뭘 좀 했네, 하는 마음이 얼마나 나의 영혼을 힘들게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친구 가운데 하나는 늘 자신은 하나님을 한 번도 멀리 여겨본 적이 없다고 한다. 비록 교회를 안 갈 때도 많고, 사업하느라 이런저런 몹쓸 짓(?)도 많이 했지만 자신은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친구다. 그럴 때보면 나는 사업가들의 논리에 뭐라 할 말을 잃는다. 하나님이 틀리면 틀렸지, 자신은 틀린 적이 없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러면서 늘 말끝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냐?’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정말 저만 그런 것일까? 혹시 내 안에도 있지 않나? ‘어쩌라고요?’ 하며 떼쓰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경홀히 여김이 분명하다. 오늘 시편은 이를 분명히 한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곧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 그럼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까지도 저의 섭리 가운데 목적이 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결론은 언제나 하나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8).” 세상이 전부 다 어떻게 된 것 같아도,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11).” 누구와 대화하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살고 평안하기를 원하면 사탄을 숭배하면 된다고 단호히 일러주었다. 모 아이돌이 의도적으로 악마숭배를 뮤직비디오에 넣고, 어느 세계적인 커피 브렌드는 공공연하게 여신을 로고로 사용한다. 저마다 무슨 일에 앞서 고사를 지내고, 귀신들을 추앙한다. 그런 자들은 ‘운 좋게’ 로또도 되고, 사업도 번창하고, 심지어 무병장수도 한다. 로또보다 어렵다는 서울 아파트도 척척 당첨되고, 그렇게 잘사는 게 목적이라면 이 땅에 권세 잡은 이를 숭배하면 된다. 다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하는 말씀은 우리들만의 것이다. 비록 사는 게 '그지' 같고, 되는 일도 없고, 비루하고, 한심한 모양으로 천하게 사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으니. 어느 약사는 기업형으로 약국을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상가를 몇 채 사서 세도 놓고, 그때마다 온갖 잡신을 다 섬긴다. 물론 저는 형식적일 뿐이라 하지만 고사도 지내고, 어디 용한 점쟁이도 찾고, 풍수도 보고, 기운도 따진다. 요즘은 교회도 다닌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13-14).” 결코 이런 말씀에 저들은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16-17).” 하시는 말씀에는 반감도 갖는다. 돈이 우선이고, 돈이면 권력도 사고 권세도 누릴 수 있다. 저의 항변은 세상에서 통한다. 혹시 모를 내세를 생각해서 기왕이면 정중하고 깨끗한(?) 기독교도 저의 종교로 선택해서 교회에도 나가면서 사교적인 삶을 산다. 그러니 오직 우리는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하는 고백이 저에게는 청승이고 처량하고 한심할밖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4-7).” 이와 같은 말씀을 은혜로 받을 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도 점점 줄어간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확증하고 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18-19).”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20).”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우리의 도움과 방패’는 것에 더욱 더 말씀으로 확신할 뿐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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