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 1:3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1, 28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다. 세상은 너무 단단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완고하다. 그런 자들이 믿는 자를 공격한다. 믿음을 지키며 사는 일이란 마치 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 같다. 오늘 시인은 그런 저들의 특징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으로 모해하고 누명을 씌운다.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시 35:20).”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고발하고, 위증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21).” 그들은 의인의 불행을 기뻐한다. “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26).” 이러한 탄원을 하는 까닭은 주께서 공판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 저들의 공격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한다.
누가 아이들 방과 후에 놀이터에서 같이 놀게 하였는데, 어떤 아이가 자기 아이들을 놀리고 괴롭히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쫓아갔더니 놀리던 아이는 달아나고 자기 아이들은 억울함을 엄마에게 호소하며 울었다. 전에 같으면 쫓아가 붙들고 혼쭐을 냈을 텐데, 아이들을 달래고 돌아온 다음 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아이를 괴롭히던 그 아이들을 두고 기도하게 되었다며, 마치 놀라운 경험인 듯 말해주던 것이 기억난다. 세상은 우릴 공격하나 우리는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우리는 얼마든지 호소하고 탄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다가도,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시 35:27).” 나의 의,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된 의를 즐거워할 줄 아는 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은혜는 확장하고 주는 위대하시다 노래하게 한다. 그렇게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누구와 무슨 일을 두고 이야기하다가도 저의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 관계, 그런 게 참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좋을 때나 좋은 사람이지 다들 자기 사느라 바쁜 사람들이다. 누가 결혼을 앞두고 오네 마네, 여전히 시간을 정하지 못하고 다시 또 조율을 하듯 문자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글방 선생’으로 인사를 오려는 것이면 그 마음으로 이미 충분하고 고맙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회 목사’로 찾아오길 원하는 것이면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하고 축복하기를 원한다고 답을 하였다. 아이는 그저 좋은 말로 감사하게 받더니, 그럼에도 주일에 오는 것을 꺼려하듯 피하였다. 나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이 답을 미루고 있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19).”
굳이 불편할 게 없는데 언제부턴가 목사로서 교회와 예배로 오기는 어렵고, 어릴 적 친분으로 좋았던 사람인 글방 선생으로나 찾아오려는 것인데, 그것도 이래저래 여의치가 않은 것은 할 거 다 하고 제 시간 다 빼고, 그래도 결혼 전에 찾아 봬야 하는데 싶은 마음이겠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할밖에. 보면 부당하게 원수 아닌 원수가 된 자들이 있다. 전에는 편하더니 이제는 내가 꺼려지는 사람이 되었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하다 교회는 다니는데 은혜를 받은 게 없다는 저의 말에 그러니 그 신앙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팍팍하겠나, 안타까움이 들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모난 성격은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한사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저 우연이었고, 운이 좋았고, 다들 그런 거지 뭐! 하는 식으로 치부하고 마니까, 저에게 주의 은혜는 그 값어치가 제 값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귀한 것인들 이를 알지 못하면, 다이아몬드나 구르는 돌이나 저에게는 그 구분이 없으니 교회는 그저 또 하나의 사회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살아가면서 종교 하나 정도는 갖고 사는 정도지 뭐.’ 어째서 저들에게는 나에게 보이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내가 듣는 것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오랜 시절 곁에서 지켜보며 저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하였는가? 하나하나 짚어보라면 나는 수없이 많은 것을 나열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걸 그리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인사를 오겠다는 아이도 일개 글방 선생에게는 어떤 고마움을 느껴서 결혼 전에 찾아뵈려 하는 마음이야 가상한데, 어찌 함께 믿음 생활을 하고 말씀으로 세례까지 받은 신앙을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것일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이와 같은 보배로움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공기업에 입사를 한 것도 자신의 노력으로 삼는다. 누구보다 명석하고 총명한 것도 자신의 공로로 치부하고 만다. 아, 그러니 우리가 온전히 예수를 생각하지 못할 때 세상에 물드는 일이란 참으로 삽시간에 그러하여서 지독하게 단단하고 완고하여 저에게 주의 은혜를 알려주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되었다.
도리어 그런 나는 원수 취급을 당하듯 꺼려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인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저는 나를 지으신 자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 집이 아무리 좋고, 잘났다 해도 집을 지은 이만 못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런 자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세상은 금세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든다. ‘너무 적당해서 그래. 네가 아직 살만한 게야. 죽겠다 죽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정도는 아닌 것이지. 그러니 살려주세요, 하는 곡소리가 나오기까지 너의 눈은 청맹과니처럼 뜬 채 감긴 것이고.’ 나는 친구라. 내친김에 말의 강도를 높였다. 교회를 소일거리삼아 다니고, 굳이 은혜를 바라기보다 ‘운빨’을 기대하며 사는, 스스로를 소시민이라 하지만 다들 그 완고한 마음은 여느 난공불락의 성곽 같이 단단하기만 하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 히브리서의 말씀이 새삼 이 아침에 누구누구를 생각하게 하시고 저를 마음에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소유라. 내가 내 것을 사는 게 아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하였고 나름 체계적으로 성경을 안다. 그런데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 진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주객이 전도된 신자(?)를 보면 오히려 안 믿는 이보다 더욱 안타깝도 답답할 따름이다. 나름은 믿는다고 하고 잘 안다고 여기는데, 도무지 저가 아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고 내가 아는 것을 저는 알지 못하는 것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오늘 새로 읽는 미가서의 한 구절이 목에 걸린 듯 삼키기가 두렵다.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미 1:3).”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저의 기쁨 앞에서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저가 기쁘다고 하는 즐거움으로 내가 슬퍼하는 것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문득 전에는 그러는 자신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자기 아이들을 공격하고 괴롭히고 도망가는 아이들 두고 기도하게 되더라는 고백이 내내 나의 마음을 울리는 하루였다. 그의 그 기도가 내 품으로 온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 오늘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이 단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로 세상을 보며 한탄하고 서러워하는 일이 단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품으라는 게 아니었다. 저들을 대신하여 굵은 베 옷을 입고 금식해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10).” 이를 앎으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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