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가 3:11-12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편 37:1-2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동안은 죄와 같이 뒹군다. 다음은 그것을 구획하여 저를 정죄하고 비난하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옳다 여긴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현상과 다를 게 없다.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서로들 묻는다. 그러나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은,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미 3:11-12).” 이와 같은 말씀을 음미하면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든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누구와 통화하며 저를 권면하다 보면 내가 먼저 부끄러워지고, 내가 먼저 주의 품에 숨을 곳을 찾는 경우가 그래서이다.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모두 나에게 향하고 계신 것을 느낀다.
누구는 이 정권을 욕하고 누구는 저 정권을 두둔한다. 사회가 가름하는 진영논리에 같이들 부화뇌동하여 격분하고, 어느 한쪽은 화염병을 들고 어느 한쪽은 방패와 곤봉을 들고 서로를 공격하고 억압한다. 그런 중에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데, 오늘 시편은 그럴 때 우리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1-2).”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그 일을 행하심에 있어 우리로 두려워하게 하심이 당연하였다. 우리 안에는 두려움으로 기뻐하며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두셨다. 이에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욜 2:21).” 죄를 죄로 온전히 알 때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은 그릇 행하려 하는 방자함을 막아준다.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은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한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그게 또 이상하게 누구와 통화하다보면 어김없이 정치나 오늘날 사회현상으로 말이 이어진다. 저의 말끝에 언제나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묻고는 한다. 본래 사랑할 때와 전쟁할 때는 자기 생각만 옳다. 자신의 명분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불법이고, 불륜이라 해도 저는 옳다 여기며 자신의 명분을 붙든다.
그러면 악에 섞이지 않으려 나는 어느 쪽도 옳다 하지 않는다. 간혹 내 마음에도 이쪽에서 저쪽을 비난하고 저쪽에서 이쪽을 매도하려 든다. 그러나 엄연히 우리는 하나님 쪽이고,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중을 살필 따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자꾸 세상이 그런다고 비난하려 들면 같아진다. 우리는 편들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중심,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람으로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를 부명히 해주고 있다. 첫째, 우리는 주를 의뢰하고 신뢰할 뿐이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3-4).”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다만 주의 성실하심으로 먹을거리를 삼는다. 주로 기뻐한다. 그러할 때 내 속의 소원은 올곧게 주의 기쁨으로 향한다. 주가 이루어 가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길을 주께 맡기고 의지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어찌 해보려고 하면 골머리만 아프고, 성질만 사나워져 어느새 누구와 다를 게 없다. 대신 물고 뜯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 세상이다. 부풀이 할 상대를 찾는다. 그래서들 모이기만 하면 씹고 비난한다. 그러다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더하며 맹세도 한다. 이는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끌어다 붙이는 것이다.
셋째, 잠잠히 주를 기다린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7-8).” 기다림의 놀라운 결과는 분이 그치고 불평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어찌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는 찬송의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생활은 암울하고 염려와 근심은 요동치는데 내 맘은 어찌 편하다! 넷째, 여호와께 소망을 둔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9-10).” 저들이 아무리 득세하고 그 권력이 천년만년 갈 것 같으나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다. 기사를 읽다보면 오히려 얌생이들처럼 낄 때 안 낄 때 다 끼어드는 말쟁이들이 있다.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도대체 이 이가 뭔데 사사건건 훈수를 두고 말을 비틀어 비아냥거리는가? 의아할 때가 있다. 놀라운 것은 그게 또 돈이 되기 때문이다. 각자의 진영마다 저를 인사로 세워 강연을 듣고 저는 말 값을 받는다. 먹고 사는 일도 가지가지다 싶다. 하지만 성경은 저를 옳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우리의 온유는 여호와께 소망을 두면서이다.
이와 같이 말씀을 받아 묵상하는 일은 귀하다. 어제도 누구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얼마 전에 뭐라 야단치듯이 하고 내내 마음이 어렵더니, 나는 쭈뼛거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중개하신 듯 저가 먼저 전화를 하였다. 나는 토라져 다시는 연락도 하지 않으려 하는데 자꾸 속이 볶여 묵상글을 보내고, 말씀 구절을 보내게 하시더니 말이다. 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나의 나 됨도 결코 나은 게 없음으로, 우리는 말씀 붙들고 말씀에 귀 기울여 그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사는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서로가 옳다 하고 서로를 그르다 하는 사회에서, 안 그러면 우리도 다를 바 없이 부화뇌동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12).” 악은 우리를 노린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13).” 그럼에도 우리가 이처럼 온전히 주를 바람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결코 누구보다 심지가 굳고 올곧은 사람이라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들보다 나은 게 있어 저들을 비난하고 탓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를 탓할 때 그 속은 저들과 다를 게 없다. 비난함으로 옳다 여기는 주장이 악하다.
그 칼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시 37:15).”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는가? 내가 저들보다 좀 나은 게 있어 그런가? 오늘의 싸움은 우리가 저들을 상대함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세상을 주도하는 악한 영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과 논리는 어느 편에 서서 광화문으로 쫓아가고 길거리에서 구호를 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말씀으로 말씀밖에는 우리가 무장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편은 없다. 너는 내 편인가? 하고 묻는 일은 도리어 상처만 남기고 싸움만 생길 뿐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우리가 무장하는 것은 우리가 공수하여 입은 게 아니다.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고 골리앗 앞에 나갔다면 십중팔구 저는 승리하지 못했다. 저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오늘을 사는 데 있어, 나는 누구와 통화하다 ‘아픈 아이’를 예를 들며 저만도 못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이는 성경을 쓰고 있는데, 어느새 신약을 들어와 고린도전서를 쓴다. 하루에 많게는 열 장, 적게는 서너 장을 쓴다. 성경을 옆에 놓고 핸드폰으로 또는 노트북으로 말씀을 옮겨 적어 글방 카페에 올린다. 저가 뭘 알겠나싶겠지만, 나는 내 곁에 있는 자들 가운데 아이보다 나은 이를 보지 못했다. 아이는 순종할 따름이다. 성경공부도 같이 해보고, 암송도 시켜보았지만 진전이 없어서 ‘성경을 쓰자!’ 하고 시킨 것인데, 아이는 묵묵히 출근 전 혹은 퇴근하고 돌아와서 틈틈이 말씀을 옮겨 적는다. 아, 오늘 시편의 이 말씀을 여기에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 37:16-17).” 다들 저 아이보다 낫다고 여기는 한 누구도 묵묵히 성경을 필사하는 정도도 하지 않는다. 나름의 일과 수고와 애씀을 더 높이 여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닐 것이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18).” 나는 종종 아이를 나의 스승으로 내 곁에 두셨음을 알게 된다. 저마다의 판단을 가지고 사는 세상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오늘 말씀은 구구절절 나로 듣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 말씀 앞에 오늘 나의 자세를 다시금 바로 하며,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37).” 왜 내게 평안을 주시는지 나는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4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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