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미가 7:7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이처럼 주를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이 복되다. 본래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는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런데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를 마주하게 하심이 은혜이다. 곧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이를 상대적으로 은혜라 깨닫게 하는 것은,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5).” 사람에게 기우는 마음은 어쩔 수 없고 의지하려 드는 일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마음이겠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6).” 이는 공교롭게도 오늘 두 곳의 말씀이 동시에 진술하고 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란 좋을 때나 좋은 것이고, 다들 ‘자기 코가 석 자’인 게 인생이다. 그러니 이처럼 주 앞에 좌정하여 주를 볼 수 있는 것이 귀하다. 실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보면 죽는다. 하나님은 천사가 아니시다. 다만 우리가 서로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감히 헤아려 알 길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만질 수도 없으며, 우리의 지혜로도 알 길이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함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복되고 감사한 일이다. 말씀으로 주를 확신하고, 말씀으로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하심이 은혜이고 가장 귀한 은사였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존전 앞에 온전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 영광으로 인해 졸았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 9:32).” 그 영광의 빛은 우리로 눈 멀게 한다. 이는 바울도 다메섹에서 경험한 바이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3, 8).” 누구라도 주의 존전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와 같이 엎드린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이와 같은 말씀을 연상하는 것은 이처럼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것이 영광이다.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였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처럼 그의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함께 거하심을 읽고, 묵상하고,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나는 이 복된 말씀을 누구에게 ‘읽는 연습’을 하라 권하고, ‘쓰는 기회’를 가지라고 권한다. 그러나 열이면 열, 모두는 바쁘고 번잡스러운 일상에 밀려 그럴 겨를이 없다. 오롯이 말씀을 쓰고 또 쓰고 하는 이는 ‘아픈 아이’밖에 없다! 나나 저 자신이 무얼 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무얼 하시고 계심을 나는 믿는다. 어쩌다 아침 묵상글을 보내고 성경구절을 첨부하여 전달하는 친구가 여덟 명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묵상글을 같이 읽을 시간을 낼 수 없다. 그래도 같이 보내는 한두 구절의 말씀을 읽고, 누구는 ‘아멘’으로 답을 한다. 그만하면 됐지, 싶다. 누구는 이내 ‘아멘’도 못하고, 누구는 자꾸 내게 고마워하고, 누구는 결국 묵살한다. 그럼에도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충만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나는 전한다.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출 33:20). 종종 이단이나 헛된 망상가들에 의해 자신들은 하나님을 보았다, 들었다, 하는 신비적인 체험을 떠벌이고는 하는데. 이는 모두 거짓되고 헛되다. 왜? 이미 보이시고 곁에 계시고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곁에 두고 다른 데서 보았다 하고, 함께 있으면서 어디서 들었다고 하면 이런 소리만큼 미친소리가 또 있겠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미 함께 하심이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안 됐지만 진리는 이 방법으로만 우리 곁에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만(요 1:14) 다른 길은 없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저를 본다면 우리는 눈이 멀 것이다. 고개를 들고 주를 보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은혜의 방식은 오직 한 길뿐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가 우리에게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요즘은 누구와 이야기하다, 말씀은 없고 어디서 듣고 누가 뭐라더라 하는 소리로만 일관하는 데서 나는 위태로움을 느낀다. 저는 자기 스스로 성경을 펼치지 못하고 자기 눈으로 말씀을 읽지 못한다. 저들의 항변은 ‘내가 한가하게 그럴 시간이 어딨어?’ 한다.
말씀을 접하면서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를 마음에 새겨 우러러 주를 바라볼 수 없는 자는 허망할 따름이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내가 주의 영혼에 속하였다 하시는 말씀에서 감격한다. 주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나를 보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이라는 것에 나는 안도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나도 잘 알지만 내가 제일 큰 문제라. 누구를 뭐라 할 게 아니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데 신물이 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러한 말씀 앞에 나는 부끄럽다. 그러면서도 가슴 벅찬 기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을 나는 그리 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의 ‘빤한 소리’에 싫증을 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권한다. 말씀을 읽고, 쓰고, 묵상하자. 묵상은 말씀이 나를 이끄시는 것이고, 명상은 내가 나를 이끌려는 것이다. 내려놓으란다고 내려놓게 되나? 마음을 비우란다고 비워지는 마음이던가? 내가 아는 나는 그리 쉽지 않다. 내가 겪은 사람은 그 누구도 선하지 않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그 마음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나는 내어드릴 게 나의 고약한 심보뿐이다.
그럼에도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41:12).”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그리하지 않으시면 내가 아는 나는 가망이 없다. 그리하여 미가의 고백처럼,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리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리하여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셨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그런데 죽지 않으면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죄의 삯은 죽음뿐이다. 하나님이 죽기 위해서는 육신을 입으셔야 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 죽지 않으면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고, 그러면 죄를 용서하실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죽임을 당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다. 왜? 다시 얻기 위하여!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7:17).” 그러한 권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이 모든 것이 날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다. 나는 외상외과의 이국종의 글을 읽으면서도 전율하였다(<골드아워>, 흐름출판).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숱한 의료진들이 달겨들고, 온갖 장비들을 동원하여 사투를 벌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저들의 선택이 경이로웠다. 하물며 이 땅에서의 생명도 이처럼 연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데, 외상외과 대부분은 장애를 남기고 부작용을 안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살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분투한다. 저들이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벌이는 일상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그럼에도 다윗은 죽었고, 다윗의 후손 예수는 그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주 사소한 일에 얽매여, 마음은 들끓기 일쑤고, 수시로 넘어지기 잘하나 나의 이러한 사소함으로 나는 절박하고 절실하여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다른 바람도 없다. 그렇게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하는 기도를 되뇌며 나는 늘 주의 존전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왜?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1:4).”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가 아니시면 나는 살아도 살 수가 없고 죽어도 죽을 수가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 사는 게 늘 덧없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란 허무할 뿐이어서, 주의 은혜를 사모한다. 말씀으로 거하시는 주를 바라봄이다. 나는 나로 살 수도 없다. 나보다 지독하고 끔찍한 상대도 없다. 그러나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그럼에도 그러한 나를 말씀이 붙드시는 것이어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오늘도 이만큼, 또 다시 세우심을 받고 나아간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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