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나훔 2:8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4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전쟁에 휘말렸다. 앗수르는 때때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회복이다. 나아가 이를 당하고 지켜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겸손과 회개의 자리로 이끄신다.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푸신다. 때가 이르면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바벨론이 저들 앗수르를 점령하였다. 니느웨는 힘없이 무너진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나 2:8).” 순식간에 못이 변하여 황폐하고 무력한 땅으로 빛을 잃는다. 결국 저들은 사자의 먹이가 되는 꼴이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11-12).”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을 뿐이다. 저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 의지하던 병거는 연기가 되고 굳건하였던 젊은 병사들은 칼에 멸절한다. 노략하여 풍성하였던 것이 더는 거둘 자가 없다. 실은 이 모든 일이 주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4).” 저들의 땅에서 저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으나 우리는 이제 안다. 그리고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어제는 종일 이 말씀을 음미하고 묵상하며,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강해 1장>을 읽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책상 위에는 이국종의 <골드아워>와 마틴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노래>란 책이 같이 놓여있다. 이 책을 읽다 저 책을 읽는 나의 고약한 독법은 분산되는 것 같으나 자유롭고 자유로워서 서로 연결이 되는 듯하다. 이국종의 글은 외상외과에서 촉각을 다투며 사람의 생명을 이승에 넘겨두려 사투를 벌이는 처절한 시간을 그렸다면,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는 고산에서 자라 밑둥의 줄기가 길게 뻗고 높다란 곳에서 가지를 뻗어 햇살을 받는 놀라운 생명의 이치를 알게 한다. 그러기 위해 나무는 스스로 볕을 받지 못하는 아래쪽의 그늘진 가지를 제 스스로 쳐내어 떨구고 위의 푸름으로 광합성을 더한다. 깊은 뿌리와 충분한 햇살을 공급받음으로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 유기화합물을 합성한다.
이 단순하고 명료한 생명의 이치는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요한을 위시하여 복음서의 저자들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위해 성경을 기록하였다. 안 믿는 자들은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보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안에서 영성의 작용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진리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다. 일상에서 모든 일에 깨어있다는 것은 그 일상이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는 요즘 삼십분에서 한 시간씩 걷다가 들어간다.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다. 전날에 잇몸치료를 한 탓인지, 잇몸은 붓고 입에 더한 통증은 온 몸으로 이어졌다. 엘보우에 고질적인 무릎 통증에, 며칠째 먹은 진통제로 속이 볶여 어제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아픈 걸음은 더뎠고 천천히 걷는 일상은 느리게 다가왔다. 나의 걸음이 햇살을 등지고 걸을 때면 저만치 길게 누운 기이한 그림자가 고단함을 더했다. 종종 아내는 나더러 고개를 들고 걸으라는데 나는 자꾸 고개를 숙이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누구를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날들을 돌아보다 주의 이름을 되뇌게 된다. 어떤 날은 무난하고 어떤 날은 힘겹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 날들마다 아뢸 수 있는 사연은 다르고, 다른 사연의 아룀은 내용과 상관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는 차등이 없다.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또 돌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저 흘러보내는 시간이 있고, 아주 특별한 시간이 있다고 믿었다. 특별한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하여 ‘깨어있는 시간’이라도 한다. 우리 믿는 자들의 일상은 성경에도 이르신 것과 같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하시는 말씀에 기틀을 둔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특징은 집요하게 말씀을 물고 늘어진다. 한 구절로 한 권의 책을 다 채우기도 하고, 일 년 동안의 설교를 이끌어갈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싫었다가도 그래서 점점 더 좋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그들이 ‘모른다’와 대비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즉 나는 이 대목에서,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다가 알겠더라. 똑같은 일상이라 해도 누구는 그 일상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알고, 누구는 간지 흘려보내는 시간 같은 일상을 살 뿐이겠다. 요즘 생활에 그럴 겨를들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일상애서 하나님의 손길과 입김을 느낀다.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우리는 이 소리를, 안다. 결국 이 앎은 일상의 전쟁에서 들려온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기어이 앗수르가 망했다. 저들의 아름다운 못이 황패해졌다. 그러기까지 저들은 기고만장했다. 저지대의 앑은 땅에서 몇 개월이면 다 자라는 나무들은 고지대에서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며 높이 높이 뻗어 오르는 가문비나무와는 견줄 수가 없다. 일상을 누리는 은혜의 정도가 다 다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나는 나의 죄의 깊이와 정도를 알면 알수록 나에게 더하신 죄사함의 은혜와 갚을 길 없는 은총을 더욱 느낀다. 겨우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면서도 숨이 차서 몇 번을 멈추어 쉬다 감사하였다.
나의 두려움은 언제나 '고통'이다. 고통을 견딘다, 하는 일은 앞서 두려운 것이다. 행여 나는 나의 고통으로 주를 원망하고, 나의 고약한 기질은 토해져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게 할까 두렵다. 그럴 때면 나를 붙들어 세우시는 말씀이 꼭 한 구절 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한참 신대원을 시작하고, 주의 강권하심이 어찌나 강하신지 나의 몸도 마음도 곤죽이 되어 죽지 못해 끌려갈 때였다. 나는 이상하게 그때도 저 말씀이 늘 일상의 소리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고약한 성미를 잘 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면 더욱 더 주가 다루실 것을 요구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나는 나의 설마, 하는 의심까지도 주께 돌린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께 맡긴다. 사실 다른 수가 없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고통은 아찔하게 투명하여, 내 속을 나도 감출 수가 없다. 아픈데 다른 말이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사람의 의지를 믿지 않는다. 최소한 나는 나를 안다. 내가 겪은 나는 좋을 때나 좋은 법이지, 힘들고 아플 때면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내가 의뢰할 것은 나도 아니다. 주시는 믿음뿐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믿는다고 하면서 뭐가 다른지, 나는 과연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갔던 아브라함과 같은지?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다보면 동네는 새롭다. 말을 나눈 적이 없지만 낯이 익은 몇몇 동네사람과 눈인사를 하기도 한다. 다들 참 죽어라 하고 산다. 길가의 슈퍼마켓에서 정육코너를 하는 젊은 남자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슬그머니 담배를 뒤로 돌리며 저만치 물러났다. 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적당한 인사는 생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저를 지나치며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어느 노인이 손에 버겁게 빈 박스를 주워 뒤뚱거리며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갈 때도, 주님, 하고 나도 모르게 저의 남은 생을 두고 아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이처럼 성령의 열매로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일이면서 구체적인 일이다. 가령 언제부턴가 가정예배 때면 아내는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과 알지도 못하는 저들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얼마 전에 ‘약사애’는 자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괴롭힘을 당했는데, 저녁에 자신도 모르게 그 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더라며 놀라워했다. 우리 안에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가 일상을 채우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5:3).” 전에는 말씀이 어렵고 무겁고 재미없던 것이 이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이 되었다.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새로운 설정으로 맞춰진 것을 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막연한 평화주의자에서 검을 가지고 그의 가지를 쳐내는 일꾼이 된다. 주일에 나는 감히 전하기를, 평화주의는 이단이다, 종교화합은 이단이다, 복음의 진리로 삶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이단이다, 십자가를 비롯한 어떤 표상이나 상징을 형상화하여 그 앞에 절하는 것은 이단이다, 하고 전하였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숱한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실제 분열의 아이콘이 되셨다. 헤롯과 동방박사들이 분열하였고, 유대인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반목의 대상이 되셨다. 진리는 사사로이 이 땅에서의 위로나 병 고침,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게 아니다. 그리 일삼는 모든 행태는 이단이다. 예수의 가르치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꼴이어서, 다들 무슨 부적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고 몸에 문신을 하고, 손에 손에 성경을 들고, 거실 한복판에 우상처럼 어떤 형상을 세우고 걸고 이를 숭배하듯 경외하는 모든 행위는 이단적이다. 그러니 살면서 사는데 위로를 얻으려고 종교 하나쯤 선호하는 일도 이단이다. 구원은 그렇게 사람의 필요에 의해 주어진 게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저를 절대적인 중심으로 모시지 못한 모든 나의 요구도 이단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내가 주 안에 거한다는 일상은 일상이 예배이고, 일상이 기도인 셈이다.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다. 자꾸 나의 요구가 우선으로 바쳐진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그러니 저들 왈,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생소할 따름이다(요 7:15). 이내,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나 2:8).”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 아뢴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 43:1).” 나는 내가 믿는 게 아닌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주체적인 나의 주도권을 내어드리기가 어렵다. 아니면 무엇으로 살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자 오늘 시편은 기도를 하게 한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아니다. 내가 찾아가는 길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찾아오심이었고, 나로 하여금 영접하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하심이 은총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 같은 이 죄인을 위해, 어찌 그 사랑 다 쏟으셨는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 오늘 아침도 주의 말씀 앞에 나는 엎드려 주께 소망을 둔다. 아니, 그럴 수 없어서 그럴 수 없는 나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부디 그럴 수 있게 해달라고 아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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