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스가랴 6:15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일련의 사태를 보다보면 하나님의 활동을 알겠다. 개인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사건들이나 온 인류가 맞이한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질은 다르다. 은혜는 갚음이 있고 심판은 땅 위를 맴돈다. 오늘 본문의 ‘네 병거’를 보면 그 심판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연상하게 한다. 기드론 골짜기의 그 두 산, 시온산과 감람산에서 나온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슥 6:1).” 구리는 심판의 상징이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9).” 결국은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슥 6:15).” 여기서 먼 데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서 언급된 것을 보면 이해가 좀 쉽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4).” 곧 궁극적인 성경의 목적은 주께 나올 자들로 나오도록 하신다는 것.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5).” 일상의 여러 사건사고들로 어려운 마음이 먼저 일지만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7).” 비로소 우리는 안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실은 마음이 참 어려운 하루였다. 누구는 부친의 폐암덩어리가 작아졌다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누구는 부친이 치매가 오시는가 했더니 폐암이 선고되고 어찌 해볼 방법이 없어 3개월을 두고 보자는 말을 전하더니, 저녁께 모친이 낙상을 하여 골반이 깨지고 응급실로 실려 갔으나 응급실이 없어 대기 중이라는 말로 안타까움을 더했다. 누구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달장애를 가졌으니 이를 제대로 말도 못하고 어찌 해야 할지, 어려워들만 한다. 나는 저들의 사연을 간략하게 적어서 옆에 붙이고 주의 이름을 되뇐다. 그리고 새벽에 이른 시간에 일어나 앉아, 어제와 내일이 교차하는 이 시간에 주의 말씀을 끌어당긴다.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하신 주의 말씀은 일상의 것들로도 연계가 된다. 일련의 모든 일상은 누구의 사연이 따로 없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여서 종당에는 하나님의 손짓이며 음성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소식을 접하는 나에게도, 그 일을 겪으며 경황이 없는 저들에게도 하나님은 각각의 병거를 보내시며 바람을 일으키신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슥 6:5).” 섣불리 나의 어떤 생각을 기록하기에는 성급하다. 가만히 주의 뜻을 살핀다.
누구에게도 그리 말하여 주었다. 가령 내가 어릴 적 당시에는 발달장애라는 용어가 정립이 되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지진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우고 철자법도 알지 못하고 또한 지체장애라, 어디 전학을 가면 학교마다 저들은 나를 받지 않으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교무실에 서서 특수학교로 보내라는 선생들의 종용을 자신이 받아냈고, 나는 죽어라하고 일반학교에 디밀었다. 당시 나는 조울이 심했던 것 같고, 불안장애도 있어 이는 괴팍한 성질로 나타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돌아보면 그야말로 ‘싹수가 노란’ 인생이었다. 그때 나의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무슨 각오로 주께 맡기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기에 전념하실 수 있었을까? 나는 동기 목사 내외의 소식에서 저에게 들려주던 나의 이야기에서 새삼 주의 놀라운 은총으로 전율하였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때, 인생의 막장에서 우리는 ‘싹’을 보고 살아간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12).” 결국은 우리의 구세주,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 싹은 구원자 예수를 의미하고, 오늘의 우리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신다. 더는 희망이 없다 싶을 때, 그 막장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죽기 살기로 탄을 캐며 먹고 사는 인생이다. 그러니 싹수가 노란가? 엎친 데 덮친다고 누구의 연달아 터지는 일들로 나는 안타까워 숨을 몰아쉬며 주를 바랐다.
그럼에도 성경의 일관된 얼굴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 지경에 놓인 이에게 이러한 소식을 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네 바람’의 역사, 더는 희망이 없는 지점에서 돋아나는 ‘싹’을 본다. 그리하여 오늘의 사태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염려와 근심이 우리 목을 조르지만 우리는 그 극한 상황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주의 빛 가운데 거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나는 저들의 소식을 들으며, 할 말을 내 입에 넣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저 같이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말의 도움으로는 그 심령을 붙들 수 없음을 안다. 우리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능력이 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3).”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더하신 능력을 상기하고 일깨운다. 이로써 피할 것을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하게 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
당장 자식에게 닥친 일 또는 부모에게 몰아치듯 일어나는 일들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다 해도,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덕을 더하고, 지식을 더하고, 절제를 더하며, 인내를 더하고, 경건을 더하여 형제우애를, 사랑을 더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표현은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 그저 안이하게 안 믿는 부모를 그러려니 하고, 삐뚤어진 형제를 그러려니 두고, 자신들의 애씀으로 할 거 다 한 것처럼 여기던 안이함에 쐐기를 박듯이 말씀하신다. ‘힘써라!’ 이는 믿음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저 거저 받은 믿음이다 보니 거저 생겨난 것처럼 거저 자라려니 하고 여겼던 데서 ‘싹’을 돋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더욱 힘써’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더하다’, ‘갖추다’, ‘보태다’ 하는 의미를 포갠다. 왜 그래야 하냐고?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자식의 문제로 시달리는 어미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와 같은 애끓는 모성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 된 도리로써 안됐고 고달프고 어렵지만 효를 다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우리로 더욱 힘쓰게 하시려고 이 모든 환경도 더하신다. 나의 아내는 요즘 우울하다. 코로나로 공부방도 못하고 친정어머니께 다니기도 여의치 않으니, 혼자 있는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다. 분주하게 집 청소하고, 집안 일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저 ‘가만히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권하며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권하였다. 몇 번 읽다 말다 하면서 늘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어제는 눈물을 글썽거리다 자신이 마치 책에 나오는 '크리스천의 아내' 같다며 가정예배 전에 고백하였다. 늦게까지 혼자 앉아 그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는 척하였다. 주의 역사하심은 참으로 기묘하다. 우린 그저 ‘가만있다’, ‘기다린다’는 것을 지나치게 수동적인 일로 여기는데 그렇지가 않다. 내가 자주 옴짝달싹 못하고 가만있어 봐서 아는데, ‘더욱 힘써’야 할 게 더 많다. 어찌 가만있으란다고 가만있을 수 있겠나? 곧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8-9).” 여기에서의 ‘이런 것’은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를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어찌 가만있겠나? 누구라도 생각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저를 위해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이라도 부르게 하시는 걸! 그리하여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옛 죄가 깨끗하여지게 하심이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간절히 주를 부를까? 주를 부르다 자신의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영적인 맹인으로 살 수 없다.
들춰보면 어느 집인들 평탄한 일들만 있겠나? 얽히고설킨 온갖 죄의 온상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광풍이 불어와 허울 좋은 우리의 겉모양을 들추었을 때이다. 나는 누구의 소식을 접하고 덩달아 우울한 마음에 주의 이름을 되뇔 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시는 말씀이 나를 가격하듯 마음을 울렸다. 성경의 일갈은 하나다. <참으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내가 어떻게 '나의 애굽'을 떠나왔는가? 이제는 보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으라! 이처럼 믿음으로 참은 자들을 열거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6-38).” 저들의 숨넘어갈 듯 한 인생을 연상하다 내가 지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그렇듯 ‘더욱 힘써’ 믿음을 지켰던 사람들의 역사를 성경은 소상히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는 길이다.
저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로 이 아침, 존 웨슬리가 했다는 고백처럼 ‘우리에게 죽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는 용기가 거저 생긴 것이겠나?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주어지는 날들이 '막장' 최전방에서 탄가루를 뒤집어쓰며 곡괭이질을 쉴 새 없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해도, 우리는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자를 나는 안다.> <내가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렇게 여기가 지옥인 줄 알았는데,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나에게 그와 같은 소식을 말해주고, 같이 기도하게 하시는 이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는 기어이 살 자이어서 죽을 것처럼 주 앞으로 나아간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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