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전봉석 2020. 12. 20. 06:01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스가랴 8: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요즘처럼 일상이 그리울 때가 없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누구라도 만나며 어디서든 어울려 서로들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던 일이 막연하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약한 시절에서 주의 놀라운 인자하심을 본다. 오늘 스가랴서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6-17).”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누구보다 바라시는 이는 우리의 구주, 하나님이시다. 마치 자식의 고단한 현실을 보며 마음 편할 부모가 없는 것처럼 오늘의 이 비정상적인 일상을 그대로 두실 리 없다. 다만 이러한 때에 우리로 깨달아 돌아보고 돌이켜서 주께 돌아올 자들, 그 ‘남은 자들’을 찾고 계신다. 여전히 안이하고 자기 살 궁리로 여념이 없거나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아노라, 하는 무리에 대하여 보란 듯이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것이다.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12).” 그러므로 오늘의 이 현실 또한 주의 것이라. 주의 섭리 가운데 행하여지는 일로 그 원인도 결과도 우리들, 남은 자들을 위한 사랑이시다.

 

이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그러니 여전한 완고함과 자신들의 이치와 이해를 우선하는 이 시대에 누가 설득을 한다고 해서 듣겠나? 어제는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누구의 문자가 들어왔다. 어느 책을 읽다 믿음이 ‘자기 의지로 믿는 것’과 ‘주어지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하였다. 자신이 청소년 시절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그건 또 무엇인가? 하면서 말이다. 우선 세례 받을 때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의 근거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하시는 것을 바탕으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을 자신이 주장하고 확신하는 일에 대하여는 나는 다소 제동을 걸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도 확신할 수도 없다. 믿는다는 것과 신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종종 누구는 자신의 믿는 삶, 신앙생활을 근거로 어찌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가 의심하곤 하는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믿음은 이 땅에서의 행복을 약속한 적이 없다. 성경은 우리의 행복을 구하는 게 아니라 거룩을 요구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는 말씀처럼, 믿고 떠는 것은 귀신들도 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12:9).” 하긴 저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믿는 존재가 또 있을까? 자신들이 안다고 하는 그 앎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탁한 존재였으니 그 앎이 저들을 삼켰다. 나는 저가 읽었다는 누구의 책의 저자에 대해서도, 또한 한때 나도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누구의 강의에 매료되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보면 저들의 믿음은 가짜다. 단호히 말하건대 사탄도 가진 믿음과 다를 게 없다. 곧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6).” 왜냐하면 믿음으로 저들이 추구하는 삶은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일에 있으니, 문화를 선도하고 사람들의 갈급해하는 영혼을 자신들의 논리로 속단하고 스스로를 결정한다.

 

즉 저들의 열매는 이 땅의 것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나는 누구에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권했다. 그리고 저들의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믿음의 본질을 묵상하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두 사람의 경우로 국한하면 저들에게 믿음은 이 땅에서의 행복추구권에 국한된다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까 덧붙여 여러 말들이 오가는데, 우리의 일상은 그리하여 천국의 모형이 되기도 하다. 비록 이 현실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 이와 같은 삶을 꿈꾸고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놓지 못하고 바라는 세상, 성경은 그 나라를 정의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 왜? 그 안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비하신 ‘더 좋은 것’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의 환난, 이 어려운 일상에서 오히려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 하려 하신다고 정리한 바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일상에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삶이 온전하지 못할 때 얼마나 스스로들  괴로워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사는지. 떨어지는 주식과 폭등하는 부동산 시장에 몰입하는 것만큼 과연 주를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이 그만하기는 한지. 취업준비에 열을 올리고 노후대책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정도로 천국을 준비하고, 준비된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지. 그저 머리로는 팽배한데 삶은 여전히 이 땅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며 자신을 비통해할 줄 아는지. 이를 앎으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하시는 말씀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게 아니라, 주를 사랑하는 열망으로 삼는지.

 

그런 거보면 요즘은 사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내 주변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다! 한데 대부분의 믿음이 자기 이해와 논리로 정립되어, 누구는 납득이 되는 믿음을 좇고, 누구는 상식적인 믿음을 바라고, 누구는 믿음을 위로의 한 축으로 여기며 산다. 사는 데 따른 기호로들 여기기도 한다. 누구에게는 지적 허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친목의 장이기도 하다. 그냥, 거기까지다. 그런 우리에게 베드로 사도는 단호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과연 이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믿던 사람들이 후일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나,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금이 저려본 일이 있는지. 그럴 정도로 관심이 없이 사는 것은 아닌지. 또는 통달하였다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신하고 신뢰하는지…!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이를 바라는 근간으로 믿음을 붙들지는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현실에 안주할 때가 실은 더 무섭다. 좋을 때야 감사가 저절로 나오는데, 정작 보면 환난에서 인내할 믿음이 없다. 믿음으로 연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없다. 연단으로 연마되는 믿음이 없으니 그 속의 소망은 늘 이 땅의 것을 바란다.

 

다른 소리지마, 어제는 종일 어디가 좀 아팠다. 실은 아침 일찍 묵상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서다 깜깜한 방에서 보기 좋게 자빠졌다. 어찌 표현할 수 없게 무방비상태도 넘어진 터라, 나는 순간 몸이 움직일 수 있는지 가만히 엎드려서 어디가 아픈 줄도 몰랐다. 자다 놀라서 아내가 벌떡 일어나 나를 일으켰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준비하고 교회로 나왔다. 그러고부터 옆구리가 결리고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묵직하였다. 그 순간에는 감사뿐이었다. 그렇게? 넘어지고도 멀쩡하게 걸아서 나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대로 머리를 박았으면, 혹은 허리가 돌아갔으면, 아니 땅을 짚은 오른쪽 어깨가 찢어졌더라면… 충분히 끔찍할 수 있던 상황인데, 돌려보며 어떻게 그 상태에서 몸을 반응하게 하셔서 적당히 넘어지게도 하신 것인지 나는 다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에는 이제 그러려니 하였고, 아내는 혼자 호들갑을 떨며 응급실로 실려 갔나 했다면서 염려하였다.

 

나는 그러한 일상에서 주의 관여를 본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나의 체험은 굳이 믿음을 증명하기보다 그러고 산다! 곧 나에게 더는 믿느냐 안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 무엇이 믿음이냐? 하는 따위의 의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바울의 ‘달려간다’는 표현에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를 읽을 수 있다. 그게 왜 중요한가? 믿음이 어떤 것이고, 어느 게 믿는 것인지 알아야 믿음인가? 믿음은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그러니까 지나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현실에 그리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실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한결 같은 복음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개인의 선호나 취한 바 이룩한 뜻이 아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16).”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그러니 다른 길이 있으면 그리로 달려갈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그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리 하게 하시는 이가 그리 여겨서 나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그러니까 저절로 그리 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이제 감히 누구의 믿음을 운운하며 더 믿네, 덜 믿네, 잘 믿네, 못 믿네 하는 말로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다. 때론 의심이 들면 의심하면서도, 때론 회의에 빠지면 회의하면서도, 다만 달려나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그러므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14:20).” 오늘도 성경이 이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앉게 하시고,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하시는 말씀 앞에서, 다른 마음이 들어올 수가 없다. 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그리하여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슥 8:12).”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