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전봉석 2020. 12. 21. 05:45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스가랴 9:16-17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6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12).” 하시는 오늘 스가랴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돌아오라.’ 하는 메시지는 성경의 기본형이다. 찰스 스펄전은 말하길, ‘완고하게 자신의 악한 길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용서가 주어진 예는 없다.’ 용서는 뉘우침에 따른 것이다. 비록 삶의 무게에 갇혀, 육신의 질병에 갇혔고 여러 말할 수 없는 질고에 갇혔다 해도 우리 안에는 소망이 있다. 주를 바라는 것으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오늘 시인의 고백이 돌아오고자 하는 자의 자세이겠다.

 

하드락 땅은 성경에 딱 한 번 거론되는 곳으로, 아르바와 하맛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에도 주의 말씀이 내린다.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슥 9:1).” 하맛은 다메섹과 같이 수리아의 대표적인 주요성읍이다. 거기가 어디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볼 때에,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16-1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시인의 고백은 저절로 그 마음이 주를 바라게도 하는 것 같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 그러므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4).”

 

실제 우리가 살면서 근심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겠으나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으로 인한 근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고로 이 근심의 목적은 우리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한다. 즉 세상으로 근심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게 할 뿐이다. 누구의 근심이 내내 마음을 어렵게 하였으나 먼저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아이를 통해 조모의 응급 수술은 소식은 들었고, 상황이 어떤지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뭐라 전화하여 위로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특징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우리로 간절하게 한다. 이에 간절함은 다른 방도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어서도 가만히 있게 되는 진정제 같다. 나의 조급함과 성급함을 누르며 제지하고 주의 도우심만을 기다리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그리하여 온전히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은혜와 자비와 인자하심만을 바라게 하는 간절함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우리로 변증하게 한다. 여태 죄의 논거에 대해 무감각하였음을 일깨우고 이에 응분의 지식으로 다시금 무장하여 더욱 더 하나님을 온전히 갈구하게 한다. 즉 죄를 죄로 여기기보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지냈던 나의 안이하였던 시절로부터 나를 끌어내어, 자신을 돌이켜 참 옳고 그름의 진의를 따지게 한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저들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과 지척에 있던 곳이다. 그렇게 늘 주의 곁에 있으면서도  정작 이를 귀한 줄 알지 못하고 주의 행하심에 무감각하였던 것들에 대해 화있을진저! 그렇게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눅 10:14-15).” 이와 같은 논거 앞에 우리로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으로다. 

 

주의 뜻으로 하게 되는 근심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근신이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이에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8:12).”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이와 같은 근신은 정녕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의 것으로 조신하고 자중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렇듯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32).” 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근심을 주신다. 이것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즉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차라리 죽여서라도 살리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하시는 근심의 의도는 우리로 분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분냄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더욱 의롭게 새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악을 보고 묵인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며 가벼이 하고 나태한 영혼으로 살아왔는지를 일깨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 다윗의 절규가 저만의 한정된 문제일까? 그러니 내가 얼마나 죄악 중에 있었는지, 얼마나 주를 우롱하며 데면데면 굴고 함부로 마뜩찮아 하였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아 나의 죄 됨에 대하여 분내게 하신다.

 

우리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근심은 우리로 더욱 사모함을 더한다. 비로소 열심을 다해 주를 바라게 한다. 늘 믿는 자로 산다면서 미지근하고 차지도 덥지도 않던 안이한 영혼을 향해,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던 우리에게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로 얼마나 주 안에서 덕을 세우며 주를 의지하고 살려 하였는지, 말씀 앞서 세우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주만 바라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앞서 늘 말씀이 곘셨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마 10:11).”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우리로 열심을 다하고, 우리로 우리 자신을 벌하게도 한다. 이는 괜한 염려로 인한 게 아니다. 어쩌다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하려 하심도 아니다. 우리는 엄연히 목적이 있는 삶의 사람들이다. 주의 자녀라. 이는 주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었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에게 더하시는 근심은 그러므로 그렇지 못했던 우리로 더욱 간절하게 또한 조심스럽게 주어진 한 날의 생을 다하며 말씀을 사모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몸에 가시, 곧 질병도 두신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이 비밀의 말씀은 매우 크고 소중하다. 이를 잃지 않게 하시려고, 나의 근심의 원인이 되는 약함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고 사모하게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물론 근심은 세상 논리로도 약한 자의 것이다. 한데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장소이다. 성경의 이 역설을 나는 사랑한다. 남은 생을 사는 소중한 나의 담보다. 보증이다. 확신이다. 나의 불안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하고, 그동안 내가 옳다고 여기던 것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죄를 상대로 변증하게 한다. 두려움을 알고 이에 선을 바란다. 악을 보며 분내고 주의 정의를 사모한다. 그래서 때로는 열심을 다해 나를 벌하게도 한다. 내 안의 죄성으로 다투게도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더 눕고 싶은 나와 일어나려는 나는 싸운다. 누구 때문에 마음이 어려울 때도 저를 외면하고자 하는 나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마음으로 마주하려는 나는 싸운다. 더욱 간절하게 또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더는 나를 옥죄는 것이 윤리나 도덕,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아니라 주를 사랑함으로이다.

 

물론 이 근심은 우리로 피곤하게 한다. 낙심하게도 한다. 좌절과 실망이 늘 먼저 와서 수선을 떨며 나를 위로하는 척 한다. 그러나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예수를 생각하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저가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 왜 그처럼 기약 없는 자 같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야 했는지, 오늘도 하늘 우편 보좌에 앉아 우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중보기도 하고 계시는지, 예수를 바라보자. 괴로워하며 근심과 걱정에 눌려 한탄만 할 게 아니라, 마음을 찢자. 하나님께로 돌아올지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간절하게 또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심을 알게 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이는 상대적으로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르다. 세상이 주는 근심,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끔찍하다. 어느 것 하나 이 시대에 아닌 것이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행여 우리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마음은 아닐지.

 

어느 때보다 지식이 팽창한 시대를 산다. 누적된 데이터로 자신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며 다스리려는 세상에서들 허우적거린다. 들춰보면 어느 누구 하나 온전히 성한 데가 없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사는 게 다들 지옥이라. 그럼에도 자신을 심상히 여긴다. 대수롭지 않은 듯 서로를 격려하기도 한다. 정말 우리의 영혼은 괜찮겠는가?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시 61:1).” 나는 주 앞에 엎드린다. 괜찮지 못한 나 자신을 주께 돌이킨다. 세상은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위로 해도 나는 주께 의뢰한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2).” 아,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3).” 그러므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4).”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