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스가랴 12:8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10
애통하며 애곡하는 때에 대한 예언이다. 스가랴의 예언은 40년 후에 유다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먼 미래에 이르러 오늘에도 유효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슥 12:8).” 이를 통해서도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로 사는 일은 참복되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손길로 이뤄지는 일이다. 나는 요즘 그것에 안도한다. 나의 나 됨으로 수고와 헌신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하는 오늘 시편의 찬송이 마음에 울린다. 이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주변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일찍부터 나를 보호하시고 함께 하셨던 주의 은총을 묵상하게 된다. 세상에 견주어 남들이 볼 때는 오히려 내가 불쌍하고 안 됐겠으나 오히려 그러한 일들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이는 내가 주의 성전이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함부로 굴며 형편없이 살 때에도 하나님은 이상하게 내 편이셨다. 내 안에 함께 하셨던 그 순간순간을 떠올리다보면 내가 이처럼 얼굴을 들고 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송구하기 짝이 없다. 이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17-18).” 왜 이제는 따로 있어 부정한 것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겠다. 구별된 삶이란 하나님이 그리 나누신 생활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38-41).”
코로나19 전염병의 확산세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면서 우리의 일상을 조용하게 위협하고 있다. 아내는 다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요즘 공부방을 못하는 관계로 친정어머니를 자주 돌보려고 올라다니는데, 큰 조카 아이와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직원 중에 확진자가 나왔고, 그와 접촉한 조카는 소식을 듣고 선별진료소를 달려갔다고 했다. 오늘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손위 처남은 걱정이 크다. 아내도 하필 어제 그 아이와 마주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왔다. 형님은 당장 어머니를 모시고 검진을 받으러 가고, 자발적인 자가격리에 들어가겠다며 전화를 하였다. 아내는 어찌 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나나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모두 검진을 받아야 하나? 우려와 염려가 삽시간에 우리를 압도하였다. 나는 불안해하여 안정제를 삼켰고, 뭐라 떠들 때가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고 아내를 진정시켰다.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였더니 우선 확진자와 접촉한 아이의 결과를 기다려보고, 음성이 나올 경우는 굳이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인근 선별진료소를 확인하고 나는 저들의 후기를 읽으며 불안해하다, 이처럼 우리를 들들 볶는 세상살이에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 나를 선별적으로 강하게 붙드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의 백성이다. 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나에게 주신 한 마음과 한 길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 하나님은 나를 떠나시지 않는다. 이 영원한 언약을 신뢰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는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셨다. 주의 기쁨으로 우리를 복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시는 말씀에서 오래 머문다(렘 32:38-41). 손위처남은 두려움과 염려로 몇 번을 더 전화하여 우리 가족들도 당장 검사를 받아보라며 성화였고, 아내는 저를 위로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다만 주를 바라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이런저런 염려나 걱정이 왜 없겠나? 그러나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의 주인이시다. 이를 주관하신다. 먼저 우리 안의 우상을 배제하신다. 스스로 의지하려는 마음, 우리 자신이 주의 성전인 것을 회피하려 드는 숭배, 이를 없이 하게 하시려고 왜 따로 있어 우리로 구별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서 벗어나게 하시는지 알겠다. 그럼에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가 주님이시다. 그런 나를 나보다 더 먼저 위하시고 챙기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며 이런저런 일을 겪어야 하고, 싫든 좋든 그런 일에 연류 되어 살 수밖에 없으나, 그때마다 나를 보호하시고 먼저 구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이와 같은 사실로도 말씀을 붙들고 무장하고 서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는 엄연한 특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다. 나의 인생을 이어오게 하신 은총이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들인데, 당장의 두려움과 염려가 나를 휩싸고 분간하기 어렵게 한다 해도, 이 모든 게 주의 은총이다. 나의 연로하신 부모님의 삶과 주의 일에 매진하는 나의 형제들의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나의 척박한 이해는 가히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엄연한 구별됨이 있다.
성경의 직접적인 고백도 한결같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그러니 일련의 사태로 나의 고질적인 불안은 나를 붙들어 세우고 쥐고 흔들려하나 오히려 그것으로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다른 대안이 없다. 단지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게 대수가 아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러니 이 일을 통해 나는 얼마나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가? 주를 의지하는가? 하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느 것도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이 아니었던 게 없다. 그때마다 나를 주도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10).” 하는 저의 고백이 이제는 나의 남은 생의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온전히 주만 바랄 수 있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 수만 있기를.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만은 온전히 견고하게 설 것이다. 이를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이다. 저마다의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보면,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향하고 누구를 붙들 것인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3:1).” 때로는 나의 약함이 병적으로 세상을 짊어지고 고통당하나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4:4).” 어제도 설교원고를 정리하며 내 안의 주의 영이 주도하시는 삶이라는 데 안심하였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가지고 정리하면서 나는 어느 것 하나 변변하게 열매를 맺을 수 없을 텐데, 하고 부끄러워하다가도 그 일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이루시는 일이라는 데서 다행이었다. 감사는 그런 것이다. 당면한 어려움을 모면하고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는 게 급선무라고 여겨지지만, 누구는 그래서 기도도 안 나오고 성경도 읽히지가 않아! 하는 심정을 토로하는데, 이해는 하겠으나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안의 성령께서 하실 것이다!’ 하고 저에게 위로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행하신다. 저는 세상 그 무엇보다 크시고 강하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5:4).” 사도들의 증언은 이처럼 한결같다.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 온 세상은 어떠하든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지각을 주시는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라는 것. 우리로 그 안에 있게 하심으로 저는 우리의 참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영생이라는 사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19-20).”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슥 12:8).” 하시는 오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며, 결국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1).” 주께 아뢰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그리하여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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