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스가랴 14:9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편 66:8-9
어제는 성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말씀으로 예배를 드렸다. 오늘 스가랴서에서는 다시금 이를 상기시킨다. 저는 겸손하게 ‘아기 예수’로 오셨지만 ‘천하의 왕’으로 귀환하셨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우리 죄를 대신하려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겨우 은 삼십 개에 팔리셨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11:13).”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하실 때는 나귀 새끼를 타고 가지만,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역전하셨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2:10).”
오늘에도 다를 게 없다. 고통당하는 것은 여전하다. 성읍들-가정이 붕괴하고 함락되며, 가옥-일의 터전이 약탈되고, 부녀-힘없는 이들이 능욕을 당하고, 사로잡혀가는-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져버리는 큰 재앙이 임하였다(14:1-5). 그러나 우리는 안다. 여호와 우리 주께서 우리로 인하여 싸우신다는 것.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3).” 친히 우리를 위해 전쟁하신다는 것.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신 33:22).”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심으로 내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눈물을 벗기시고, 넘어지는 우리를 일으키신다 것.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 116:8).” 오늘 스가랴의 기록과 같이 우리는 기필코 거룩한 자들로 주와 함께 할 것이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슥 14:5).” 곧 주께서 그의 영광에 우리를 두실 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스가랴서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은 새로운 창조의 반전이 기록되었다(6-8). 먼저는 빛을 잃는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슥 14:6).” 이는 그 안에 담긴 새벽을 보게 한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욜 2:2).” 곧이어 ‘빛이 있으리라.’ 하시는 전능자, 우리 구주,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 이 빛은 다시 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 이는 우리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주의 영광의 날이 올 것이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19).” 이와 같은 새로운 창조는 말씀의 빛이다. 곧 우리에게 오신 어린 양은 말씀이시고 우리 가는 길의 등불이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또한 저는 우리의 생수이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예수님도 이를 면밀히 증거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우리 속에 가득한 더러운 것들이 생수의 강이 되어 흐를 것이다. 곧 우리의 존재 이유는 그와 같은 사명을 지닌다. 이는 주의 물결-말씀이 나를 휩쓰시는 것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 42:7).” 비로소 아기 예수로 오신 이가 전능하신 천하의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신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온 땅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사 54:5).” 그리하여 교회는 반드시 존귀함을 받고 평안히 설 것이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슥 2:4).”
그때는 구원의 날이다. 저는 우리가 박해한 예수시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 22:8).” 저는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간절해지는 마음이 하나 생긴다. 곧 말씀을 풀어 알게 하시는 지혜의 영이 내게 부어지기를. 말씀을 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주의 뜻을 열어주시고 그 세계를 살게 하시기를.
지혜로 가는 길은 첫째, 말씀뿐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이를 알 때,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 하는 삶이 드려진다. 어찌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럴 때 이어지는 것이 둘째, 죄를 고백하게 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찰하시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다시는 숨길 수가 없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셋째, 이를 알면 알수록 주를 의뢰하게 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4-6).” 이는 필연적인 것으로 맡김으로 저가 이루신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이를 알면 알수록 말씀의 약속을 더욱 바로 알고 싶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나님이 더하시는 지혜가 없으면 이를 알 수도 느낄 수도 살 수도 없다. 지혜가 머물지 못하는 자리는 또렷하다. 첫째는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긴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2:6).” 둘째, 이는 곧 교만의 자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그리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단 5:20).” 그 결과는 세 번째, 강퍅함만 남는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잠 16:27).” 이는 꼭 자신을 어둠에 가둬버리는 꼴이 된다.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시 81:11).” 거기에는 우환뿐이다.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12).”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내버려두심으로 저로 알 때까지 알게 두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죄의 형질이 그런 것처럼 우리 스스로 벗어나올 길이 없다. 지혜에 머물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복이다. 그 자리는 첫째, 하나님과의 자리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둘째, 타인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16:7).” 셋째, 물질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곧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전 7:12).” 이 관계가 바로 서지 못하는, 악인의 소득은 재앙뿐이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시 11:6).” 그러므로 물질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 끝은 허무할 따름이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넷째,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달라진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자신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것이 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다섯째, 사회에서도 지혜을 우선하게 된다.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잠 16:11).” 그런데 공평하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가?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 15:2).” 그럴 수 있는 것이 주의 장막에 거할 때이고, 하나님과의 자리에 거할 때이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그러할 때 저에게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여섯째, 지혜는 죄를 다루는 관계도 다르게 성립한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이는 말을 조심함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 34:13-14).”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또는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의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할 수 있다. 온갖 말들이 난무한 세상이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우리에게 끼치는 고난과의 관계에서도 지혜의 자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자리로 이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즉 겸손함으로 교만한 자와 무엇도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 37:16).” 그런데 만일 지혜가 없다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읽을 때마다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결과다.
오늘 아침, 스가랴서를 통해 ‘왕의 귀환’을 묵상한다. 새 창조에 대한 벅찬 감격을 느낀다. 그러자면 나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복되었다. 지혜는 주를 경외함에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를 사모함으로 이 아침도 나를 깨우시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니 나로서는 감사뿐이다. 지혜란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이런저런 상황이나 일련의 사태를 접하다 보면 다들 참 겁이 없다.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설마, 하는 안이함과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객기만이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3-4).”
내 안에 두시는 지혜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신다. 고로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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