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전봉석 2021. 3. 22. 06: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편 149:4

 

 

믿음보다 불가사의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어찌 믿을까, 하여 곰곰이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란다. 나는 늘 오늘 말씀을 묵상할 때면 내가 나 된 것에 놀란다. 이렇게 저렇게 나에 대해 잘 아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갑자기 급 우울감에 시달리다 급기야 몹쓸 생각에까지 이끌렸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었다. 특히 내 인생에 가장 인상적이라 할 장면은, 그렇게 울면서 다닌 일이다. 마치 뭐에 홀린 듯 새벽예배를 나갈 때도, 새벽예배를 마치고 그 빈 예배당 안에서도, 신대원에 들어갔을 때는 더욱이 아침마다 등교할 때면 그렇게도 울었다. 가끔은 그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 울음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못 하겠다고 하면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감사해서도 울고, 다시 또 못하겠다고 울고… 정말이지 어떤 날은 너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여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꺼이꺼이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울었다. 그때마다 나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말씀이 있었다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시는 오늘 이 말씀이다.

 

이제 곧 제자들만 남겨 두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이 입을 여셨다.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또 믿어라.” 그러니 그 믿음이 내 의지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나는 울면서 하염없는 눈물로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나름의 나의 애씀과 수고함에서 놓여나는 순간이었다. 얼결인 것 같으나 그때를 위해 주님은 참고 또 참으며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 것이다. 속된 말로 얼마나 사람에게 껄떡대고 살았는지, 그러는 내가 늘 한심하고 변태 같을 때도 있었다. 모멸감은 금세 다시 무장하는 자존심이 되어 늘 보면 내가 먼저 나를 속이고는 하였다. 그럴 때면 항상 두려움도 같이 오고는 하였는데, 때론 앞뒤가 맞지 않는 나의 행태에 내 스스로가 환멸을 느끼고 혐오스러울 때도, 염치없게도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해져서 두려움은 가중되곤 하였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내 안에 드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뭘?’ 하는 마음도 강해서, 지금 와서 생각하면 두 가지 두려움이 내 안에는 늘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부끄러워 주의 낯을 피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그러면 그럴수록 완고하게 더 굳어지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두려움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두려움의 출처를 안다. 눈물의 원인과 같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 영혼이 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종의 영에 붙들려 산다. 사람마다 그 기간이 다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몇 시간 만에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주 앞에 굴복하였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사도 바울은 사흘 동안을 어둠에 붙들려 있었다. 어떤 이는 평생을 끌려다니 듯 살다 죽을 때에나 주의 평안을 본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렇게 우리가 종의 영을 버리고 아들의 영을 가지면 다시는 종의 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종의 영도 아들의 영도 엄연히 주의 자녀들에게만 일어나는 역사다.

 

주의 자녀이면서도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종의 영의 때는 두려움의 질이 다르다. 사느라 급급한 안 믿는 자들과 다를 게 없는 근심으로 시달린다. 먹고 사느라 여념이 없고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정신이 없다. 밭에 두고 온 겉옷을 찾으러 가고, 언제나 바람은 이 땅에서의 결정으로 미룬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그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했고 그러는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오늘도 여전히 주의 자녀이면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전전긍긍 사느라 정신이 없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막 13:16).” 어쨌든 우리의 이 모든 기간은 ‘성령의 기간’이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애 3:27-28).” 예수님도 이에 본을 보이시려 성령에 이끌려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러 사막으로 끌려 다니셨다. 저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되심을 알면서도 시험하였다. 어쩌면 우리를 다루시는 ‘성령의 공식’은 하나다.

 

늘 우리 안에 죄의식을 갖게 놓아두신다. 찔림이 있다. 부끄러움도 있다. 한데 이는 안 믿는 자들의 양심에도 있어서 성령이 주시는 것과 사람이 본래에 가진 것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한데 그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고, 나 자신까지도 나에게 속는데 이상하게 알 수 없는 내 안의 부끄러움과 죄악 됨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다 보니 다음 단계는 그러한 나를 보는 남들의 시선도 그렇지만 내 자신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죄의식이 나를 정죄한다. 때론 그러는 내가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8-19).” 이 일은 반복적이어서 돌아서기 무섭게 언제 또 그랬냐는 듯 서슴지 않고 다시 그 일을 저리르기도하다, 이내 치욕감을 느끼는데 남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는 욕됨이다.

 

그러한 부끄러움은 자신만이 알아서 그것으로 우울감에 떨어지거나 불안이나 공황이 엄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다음 반응은 ‘내 입을 티끌에 대고 문지르고 싶다.’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애 3:29).” 그 치욕이 격해지면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0).” 자학으로 이어져서 무기력증에 젖어들기도 한다. 안 믿는 자들은 그러하고 믿는 자들은 주의 이름을 바란다. 겸손히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의 용서를 구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저도 저 자신을 어쩔 수 없어하며 절규하는 것이다.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기모멸감으로 견딜 수가 없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눈을 들지도 못하고 제 가슴만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다. 정말이지 이와 같은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언제부턴가 나는 입에 밴 기도의 첫 문장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것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불쌍히 여김을 당할까봐, 자존심 하나로 호기를 부리며 살던 사람인데… 이를 위해서면 양심도 팔고 부끄러움도 무르고 객기를 부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껄떡거리기 일쑤였는데. 이제야 사람은 의지할 게 못 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못 살게 굴던 이가 원수 아닌 원수일진대, 저가 내 친구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토록 마음의 노예로 살았던 것은 결국 그릇되게 나를 사랑하였던 까닭이었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그렇듯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아서지 않게 하신 이가 계시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24).” 이제는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린다. 내 것으로 여겨진다. 나로 맞춤한 말씀이 된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하는 말씀 앞에서 송구하고 민망하나 감사하고 소중하다.

 

이 일이 어찌 이루어지고 가능하였는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믿음이란 참으로 희한한 것이어서 나도 나의 믿음을 증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왜 내게 은혜를 주시는지, 나 알 수 없도다.’ 그러므로 <종의 영>을 가졌다 하는 일도 우리도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입증한다. 다만 그것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양자의 영>을 주시는데 그러는 동안의 미적거림과 그릇되게 먼 길을 도는 시간의 문제다. 그러느라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내 곁의 사람들도 덩달아서 고생이다. 어느 훗날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것이 내 것이 된 뒤로 우리는 다시 종의 영으로 물러가지 못한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릇된 길로 빠져들지도 않는다. 더는 그럴 수 없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길은 한 번 들어서면 다시는 잃지 않는 길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그처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거함을 이제는 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육을 입고 계시면서 육의 한계로 스스로 제약을 두셨던 이가 보혜사를 보내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6-17).” ‘도움을 베풀기 위해 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성경은 저를 위로자, 중보자, 성령으로 지칭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 그가 내 안에 더하시는 증언이 믿음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내가 뭘 안다고 이처럼 증언을 할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 나를 위해 친히 내 안에서 간구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를 나는 아침마다 체험한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 오늘은 뭘 쓰지? 어떤 말씀을 주실까? 이를 어찌 이해하지?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만 주 앞에 앉는다. 이제는 아는 것이다. 저가 열어 보이실 것을 말이다. 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게 하시듯 해야 할 말을 더하신다. 이와 같은 진술은 요한도 같았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때론 참 겁 없이 또는 뻔뻔하게도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씀 앞에 앉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이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는다.’ 이 믿음의 근거를 오늘 주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확신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결코 나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4).”

 

그러므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내 안에 두시는 평안으로 나는 마음의 근심으로 예전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껄떡거리며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31).” 이에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이는 곧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