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사람은 위대한 것 같다. 수억 개의 정보를 손톱만한 칩에 담아두지를 않나 전염병의 창궐과 동시에 백신이 개발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 싶은 사람인데, 또한 모든 생명 중에 나약하기는 사람만한 게 없다. 성경은 일러 버러지 같다고 하신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곧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다. 그 잘난 줄 알았던 사람이 한낱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숨을 쉴 수 없을 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늘을 살다 불현듯 세상을 하직하곤 할 때, 버러지 같다 하시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말씀의 위로를 얻기 위함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10).” 하시는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소리로 귀에 들린다.
앞으로 100년 후에 있을 일을 두고 이사야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한다. 저들에게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붙들려서 산다. 이어서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이 망하고 고레스 왕이 저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44:28).” 이는 주전 538년의 일이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그 시대에 살았던 선지자들이다. 성경은 각기 그 시대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록하였다. 이를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읽을 때도 성령의 감동은 동일하게 역사하여, ‘내 이야기’로 들리게 하신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럴 수 없게 하신 사람들도 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40).”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하심이 끔찍하다.
나는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을 되뇌며 새로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는다. 저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우리는 언제 또 변할지, 나도 나를 믿기 어렵다. 그러나 저는 미쁘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이를 나에게 두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살면서 이런저런 체험 가운데 이 고백이 나의 것이었음을 감사한다. 그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외면하고 살다 영원히 죽음에 버려졌어도 할 말이 없는 위인인데, 돌이켜 이처럼 말씀 가운데서 말씀으로 위로를 더하시니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이다. 이제는 곁에서 누가 잘 믿다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볼 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말씀을 희석하여 여느 좋은 책 수준으로 놓고 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템블턴이라고 빌리 그레엄 목사와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말씀을 전하고 사역하던 목사가 있다. 저는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하나님을 저버린 인물이다. 북아프리카에 가뭄이 심한 가운데 한 여인이 죽은 아이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어린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순간 저의 마음에 ‘과연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 이러실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고, 끝내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크럼지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인생에 주어지는 고통은 차마 옮겨 담기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끔찍하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로 결혼하였다. 한데 첫 아이는 네 살 때 백혈병으로 잃었다. 둘째와 셋째는 각각 열여섯, 열네 살 때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이내 저의 남편 목사는 서른셋의 나이에 호지킨병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그야말로 기구한 삶이었으나 크럼지 여사는 말씀 붙들고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57세 나이에 대만에서 부랑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그런 그이가 훗날에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는 책에 이와 같은 사실을 차분히 정리하면서, 자신의 삶은 말씀의 위로를 받는 삶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저마다 주어지는 고통은 다양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동일하다. 어제는 아침 일찍부터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오후께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보았다. 기압골의 영향으로 허리가 아파서 앉아 있기 힘들었다. 서서 책을 보다보면 다리가 아프고, 누워 있으면 목과 어깨가 아팠다. 짜증스럽기도 하여, 외투를 걸치고 산책을 나갔다. 거리에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고 갔다.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이 줄담배를 펴댔다. 나는 저만치 떨어져서 양지바른 곳을 서성거렸다. 그때 되뇐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어떻게 크럼지 여사는 그런 인생을 견디며 살 수 있었을까? 그 와중에도 말씀의 위로를 체험하는 삶이었다니, 그와 같은 고백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몸은 어렵고 마음은 불안하여, 심한 공포가 엄습할 때 안정제를 연거푸 먹으면서 나의 기도는 간절해진다. 좋을 때, 괜찮을 때는 흥얼거리는 노래도 다르다. 며칠 전부터 050B의 <이젠 안녕>이란 노래가 꽂혀 리플레이 해서 들었다. 저 노래를 들을 때면 옛날 생각이 나고 괜히 자꾸 눈물이 핑, 돈다. 그리움은 마치 조바심과 같아서 순간 사람의 감정을 쥐고 흔든다. 그러다 어제는 소진영의 <오직 예수뿐이네>를 연거푸 들었다.
그런 날이 있고 저런 날이 있는데, 좋을 땐 모른다. 몸도 마음도 적당한 날은 은혜를 구하기보다 나름의 감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까 어제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으로 ‘버러지 같은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느꼈다. 참으로 별 거 아닌 존재다. 마치 크럼지 여사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강건할 수 있을 것 같다가고 텀블턴 목사와 같이 고작 감상에 젖어 언제든지 불가지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나를 나는 주체할 수 없어 말씀 앞에 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내가 나는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 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한다. 그런 거 보면 나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주의 곁에 있게 한다. 불안이 나로 기도하게 하고, 몸의 어려움이 나로 주를 바라게 한다. 하긴 야곱의 아들 요셉을 생각하면, 저의 좋은 시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라.’ 하는 기록이 없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살 때는 말이다. 그런데 저가 형들의 눈 밖에 나서 노예로 팔려갈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1).” 그때마다 저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라.’ 하는 증거로 되풀이 된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어려움이 우리의 비밀병기 같다. 힘들고 지칠 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말씀이 늘 귓가에 머문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좋을 때, 괜찮을 땐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는데, 마음이 어렵거나 고난이 닥쳤을 땐 ‘오직 예수뿐이네’ 하는 찬양으로 귓가를 채운다. 그렇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책을 읽어도, 누구의 설교동영상을 볼 때도 그때마다 말씀이 나를 위로하심을 더한다. 나는 크럼지 여사의 고백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님을 안다. 돌아보면 나의 날들이 그러했고, 말씀으로 증거가 되었다. 오늘 아침도 말씀으로 그 의미가 새롭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내가 죽을 때 내가 산다. 살아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증거 된다. 그리하여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알겠다. 곧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셨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이렇듯 말씀의 빛이 비출 때, 내가 누구인가를 새삼 고백하게 된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6).” 주님은 밝히 말씀하시길,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더는 세상을 기웃거리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2).” 이와 같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148:13).” 반드시 주는 나의 찬양거리가 되실 것이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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