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전봉석 2021. 4. 14. 06:07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행전 16:2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1-2

 

 

아무리 기도하고 바라도 감감무소식인 것 같다. 소원을 아뢰고 주의 선하심을 구하지만 어려움은 여전하다. 아, 시인은 절규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그러니 그만 둘 법도 하고, 더 빠르고 즉각적인 방법을 찾을 것도 같다. 그러나 저는 기다렸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40:1).”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신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우리가 주의 응답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딱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고 계신 거였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애타는 기다림이 찬송이 되고 우리의 기도가 누구에게 들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옥중에 갇혀서도 찬송과 기도라니!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우리로 정금같이 나오게 하신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러는 동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주의 돕는 손길을 경험한다. 그저 그러려니 여기며 허투루 지나쳤던 것에서 주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목격한다. 귓등으로나 듣고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실상은 늘 나와 함께 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단지 구호가 아니었다.

 

우리 기도의 기다림에는 속성이 있고 숙성이 있다. 사울이 바울 되는 데 사흘이 걸렸다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어느 소망은 생전에 이루어주시지 않는 것도 있다. 증거 곧 말씀은 받았으나 그 약속을 받지는 못한 것이다. 믿음 장에 나오는 성경의 여러 위인들이 그러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어째서 그러신 것일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더 좋은 것, 기껏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이를 위하여 우리로 기다리고 또 참으신다.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의 모든 계획보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교하시다. 나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응답은 후하시다.

 

이를 아는 데 있어 우리는 매번 막다른 길에서다. 우리의 고집이 얼마나 완고하였나를 반증한다. 어려움을 겪다보면 그만큼 나의 고약함은 실체를 드러낸다. 비로소 주 앞에 겸손하여진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6).”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을 본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28).” 이를 좀 더 알려하여 저의 고백을 따라가 보았다. 저는 아침마다 기도하며 기다림을 연마하였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5:3).” 그가 기다리게 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주의 선하신 역사였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27:14).” 이는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확신이 되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주의 도우심은 방패와 같이 어김이 없으시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33:20).”

 

그리하여 잠잠히 참고 기다릴 줄 알게 된다. 더 이상 스스로 꾀를 내지 않으니 불평도 사라진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우리의 기다림은 더해지는 시간으로 이미 영혼의 거름이 되어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130:6).” 이것이 어떻게 다윗만의 것이겠나?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주를 바라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죄수들이 듣는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보여지고 들려지는 귀한 증거이다. 저의 기도는 솔직하고 담백하였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40:17).”

 

이를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보면, “나는 불쌍하고 가난하지만, 주님,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요, 나를 건져 주는 분이시니, 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말아 주십시오.” 즉 ‘나는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불쌍할 따름입니다. 주님, 나의 부족함을 생각하셔서 나를 도우소서. 나를 이 지경에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주옵소서.’ 하는 내용이 아닐까? 늘 내 입에 붙은 기도 가운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주세요.’ 하는 소리와 같다. 내 곁에 있는 누구누구의 아픔과 서러움과 그 마음의 원통함을 아뢰며, 주가 나를 붙드신 것처럼 저도 붙들어주시기를 구한다.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오늘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그로 인하여 주를 찬송하고 기도하게 하시는 놀라운 주의 역사라니! 이를 보고 한 가정이 구원을 받는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가 황급히 달려갔다. 저들이 옥문이 열려 도망간 줄 알았다. 그런데 저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 16:30).” 저의 고백이 놀랍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구원의 절실함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 이와 같은 주의 섭리를 우리가 무슨 수로 짐작이나 하였겠나? 인간적으로 기다림은 잔인하다. 당장에 문제로 우리는 급급하여 주의 뜻을 살필 경황이 없다.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온통 당장의 요구들이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위로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 내용은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더디다 해도 기다림으로 교만하지 말고 정직하여 믿음으로 견딘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3-4).” 공교롭게도 어려움에 천한 상황이 내 곁에 여럿이 있다. 모든 가정이 들여다보면 안 그런 곳이 있기야 하겠나만 누구는 그래서 더 주를 바라는 자리로 나오는데 누구는 점점 멀어져간다. 누구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께 의탁하는데 누구는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더욱 멀리한다. 언제까지일까? 나는 저이를 생각하며 안타까웠다. 그런 적이 있다. 기어이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다시스로 방향을 틀고 비댔다. 어깃장을 부리듯 내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할 만큼 했고 더는 지겹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울과 극단의 경계는 한끝차이다.

 

누구는 성경 66권을 보란 듯 통독을 한다. 1189장의 성경을 들숨 날숨 몇 번으로 읽어재껴 31102절의 구절을 물 말아먹듯이 단숨에 읽었다. 그러니 뭐하나 정작 한 단어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기껏 읽고 또 읽으며 성경에 능한 자가 되었으나,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행 7:34).” 아 한 구절에 담긴 주의 사랑을 읽지를 못한다. 왜 나 같은 것의 괴로움을 돌아보시고 그 탄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셔야 하나? 이런 나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셨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이집트 왕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중노동으로 인해 신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습니다.” (우리말성경).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오늘 다윗의 절규가 저를 성군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삼음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28).”

 

곧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29).” 주는 홀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