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전봉석 2021. 4. 12. 05:5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14:22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20:4

 

 

어려운 역경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나름 한다고 하고 애쓰는데도 일은 번번이 어그러져 우리로 미끄러지고 자빠지게 한다. 이러함에도 우리의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는 일이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을 오래 음미하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아니면 그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를 어찌 이겨낼까? ‘믿음에 머물러라.’ 어떠하든지 주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려면 많은 어려움도 겪어야 한다.’ 오늘의 어려움을 악이 아니라 약으로 받는다. 앞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했다. 그럴 수 있던 비결은 오직 하나, 주께 아뢰고 고하는 것. 기도뿐이어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성경은 끝까지 우리를 지지한다.

 

곧 닥쳐온 자신의 죽음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 사랑을 의지하는 길은 가만히 주만 바라는 일이다. 저마다 이런저런 일로 사는 게 고달프기만 하다. 기도로 바라나 그 소원은 묘연하고 하나님은 내버려두사 나를 방임하시는 것만 같다. 악순환처럼 같은 데 마음은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날들이 우리를 위협적으로 몰아세우는 듯하다. 이래도 주를 바랄래? 하고 묻는 것 같다.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낙심만 찾아든다. 그럴 때 우리의 경건이란 우리의 속성, 속단하고 같이 성질부리고 원망하고 한탄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로 내 자리를 대신하시게 하는 일이다. 마음은 점점 더 가난해져서 주가 아니시면 안 되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리하여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하신다. 우리의 중생은 회개를 통해서이고 회개는 엄연히 내적인 치욕을 주께 아뢰며 주께만 의지하는 일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어제는 주일 예배 직전에 누구의 어려움이 문자로 알려졌다. 그러니 그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면 목이 멘다. 우리는 엄연히 존귀한 존재이나 장구하지 못함은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이는 죄의 결과다. 육신을 덧입을 때 우리의 죽음은 짐승과 다를 것 없이 정해진 이치다. 정작 더욱 끔찍한 일은 이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깨달음으로 주께 아뢰고 회개한다. 받아들임이며 믿음으로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매우 제한적이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미리 정하신 바,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2).” 듣는 것은 이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이었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3).”

 

죄와 죄악은 다른 것이어서 죄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죄악은 우리가 믿음의 의지로 굳건히 이겨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도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이는 매우 의지적인 일로 그리 행함이지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 우리로 이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오후께 누구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 가만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낙심과 넋두리로는 감당이 안 된다. 이상할 거 없다. 우리를 엄습하는 모든 어려움은 당연하였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사람은 본래가 사람이어서 이 모든 일을 자초하고 산다.

 

아무리 오늘이 어떠하다 해도, 우리 현실이 비참하게 우리를 억누른다 해도,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3-24).” 주께서 처리하신다. 나는 다만 주를 의뢰함으로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25-26).” 주는 나의 아버지시다.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를 구원하실 바위시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시 119:89-91).

 

 

이처럼 주가 이루시는 세계라. 나는 마음이 심란하였고 여러 걱정과 염려가 들락거렸으나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 옳다. 싫든 좋든 우리로 주께 의탁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18-21).” 그러니 우리의 영양분은 기도와 말씀뿐이다. 성령이 이를 계시하신다. 열어보이심으로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5).”

 

내 안의 원망과 서러움은 실제 자신을 옳다 여기는 교만으로부터 생성된다. 할 만큼 했다는 식의 자기 판단이 남을 비난하게 한다. 처한 상황으로 낙담하게 한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우리는 가진 게 없다. 누구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고 해결이 되겠나? 해탈하면 좀 자유로워지겠나? 이는 오롯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래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데 순응하는 일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이를 알게 하심이 성령이었다. 이를 알고자 하여 주께 구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결국은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5).” 당장은 난공불락 같은 현실이라 어찌 이겨낼 수 없다 해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맡겨드려야 한다. 나는 주의 행하심에 가만히 의뢰할 따름이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그렇게 저마다 애쓰는 세상에서 우리는 오로지 주의 이름을 자랑할 뿐이다. 곧 주의 이름만을 의지할 뿐이다.

 

사람들이란. 바울이 발 못 쓰는 자를 걷게 했다(행 14:8-9). 이를 보고 사람들은 저를 신이라 하여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1-12).” 당장의 현상에 전전긍긍하는 일이라니. 두 사도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찢는 일이다. 절규하며 외친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 무슨 일이 어찌 벌어지고 있든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 때론 방임하시고 그것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사람을 돌보셨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16-17).” 그럼에도 그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라.

 

우리로 나 자신을 돌이켜 주만 바라게 하신다. 부모 일로 안타까워하고 혈육과 형제간의 일로 고통당하는 때에도 누구를 위함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주의 선하심만 바랄 뿐이다. 그렇듯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시 20:1-3).”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어떠하다 해도 ‘너를, 네게, 네 모든’ 것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 무엇을 소원하겠나? 모두가 바라는 당장의 상황이 아니라 그 너머 주의 놀라우신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바로 알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