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전봉석 2021. 4. 27. 06:10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편 35:9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로 사는 게 무얼까? 누가 그 문제로 어려워하는 것을 두고 나는 먼저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 일로, 종종 우리는 실적주의에 빠진다. 남들처럼 뭔가 해서 이뤄야 할 것 같고, 비교적 그리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송구해하는 마음 자체로 귀하였다. 누가 만약 묻는다면 나는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라 대답하겠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오늘 나의 이런저런 모습이 주가 주신 것이라 여기는 것으로, 한심한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내어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은 우리가 아는 바,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는 아무도 저의 죽으심을 감사할 줄 몰랐다. 그렇게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럼에도 묵묵히 정해진 길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저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전부 드리신 분으로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우리 또한 그리 살게 하지 못하시겠나? 가야하는 길, 이미 정해진 길에는 이정표가 필요 없고, 우리가 아는 바,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와 함께 사는 것뿐이다. 잘났든 못났든, 잘하든 못하든, 다만 있는 그대로 더하시는 한 날 한 날의 삶을 더해가는 것. 오늘 본문은 이를 정의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나는 이 말씀을 액면그대로 따른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살 뿐이다. 믿음으로라 하면 더하시는 날의 모든 주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것으로, 시편의 말씀을 그대로 가져오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지금이 그럴 때인지 아닌지, 또는 누구처럼 어쩌고저쩌고 비교하고 대조하여 더 나은 무엇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게 두신 게 빈약함이면 빈약함으로, 모자람이면 모자람으로 주를 바라는 일. 우리의 참 특권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사느냐’인데 이는 곧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 사는 그것이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왜? 그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려 하심인데,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곧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주를 바라며 주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내가 내 곁에 두시는 누구로 주를 바라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까닭은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예수께서 시몬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것인데,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주의 양의 먹일까? 무엇으로 먹일까? 욥의 증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선명해지는 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곧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산다는 것은 나의 이 모든 것, 오늘의 모든 상황에서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 평안은 엄청난 값을 지불한 대가로 얻은 것인데,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주의 죽으심으로 오늘의 내가 산다. 일찍이 이사야의 증언도 그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한데 그 이유가 우리의 그릇 행하였던 것이었으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곧 오늘의 평안이나 슬픔이나 이런저런 삶의 모든 질고는 주를 더욱 바라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2).”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러므로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8).” 이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주 흔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과 견주어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려는 데 있다. 오늘 바울은 이와 같은 세대의 특징을 진술하고 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사람은 얼마나 요지경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를 편먹고 거들며 자기만 행할 뿐 아니라 남들도 그리 행하게 하려 한다. 정말 저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그러는 것일까?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 다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그러나 그렇게 알면서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어쩌겠나?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마치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 22, 23).” 이게 실은 우리의 한심함이다. 뭘 못하고 누구처럼 성과를 못내서 실적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엄연히 우리의 그릇됨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적용하셨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 50:8).” 곧 우리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은 나의 실적으로 증명하는 무엇이 아니라 주가 이루신 의를 나의 의로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해야 할 것을 행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른 아침에 나로 이처럼 주 앞에 앉게 하시는 이 시간이 내게 귀한 것은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 있어 말씀으로밖에는 길이 없다. 누구 좋은 스승으로도 아니고 어디 좋은 벗으로도 아니며 뭔가 나름의 성취로도 아니고 그에 따른 어떤 실적으로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된 것이 감사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비루하고 가진 건 없고 때론 빙충맞은 한 날 한 날의 보잘것없는 삶인 것 같으나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왜 그러신 것일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 삶으로 살아서 사는 일에서 나타내는 삶이라니.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모든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 하시는 것은 구주의 십자가로 우리의 원수를 모두 이기셨다. 한데도 여전히 그 일에 끌려 다니는 까닭은 알게 모르게 자꾸 세상적인 실적에 연연하기 때문이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누구처럼, 남들처럼 그런저런 일에 아무런 실적도 없는 것에 마음을 두고 고심하기 때문인데… 엄연히 이는 불신앙의 요소가 크다. 그리스도는 다 이루시었다. 그의 부활이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오히려 더 무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의한 것이다. 다만 주를 인정함으로 맡기신 한 날에서, 주신 바 나의 나 된 것으로, 무던히 주를 바람으로 누구를 염려하여 주께 아뢰고 그 일이 아무런 표도 안 나는 일이나 주 앞에서 행하는 나의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이는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내가 굳이 마다하거나 더 나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의 사망을 제거하셨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럼에도 자꾸 우리를 치대는 것은 당위다. 성도라면 이렇게 행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저렇게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현실의 실적주의가 어릴 적부터 우리를 길들여온 증거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7-58).” 좌로도 우로도 치우칠 것 없이, 흔들리지 말고, 견실하게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것. 곧 주신 바 한 날의 삶에서 오직 주만 의뢰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5-6).” 곧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 곁의 누구에게, 나의 한 날의 이런저런 고단함에서도 주를 의뢰하는 나에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 17).” 오직 오늘도 믿음으로 산다. 주가 더하신 날이면 주가 이 모든 것을 행하심을 신뢰함으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이로써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