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고(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은혜’가 있다(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때마다 필요와 간구를 채우시는 은혜가 있고, 한참을 더디게 심지어는 내가 잊어버리고 내어맡긴 일이 훗날에 이루어지는 때도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 우리의 판단과 기준은 번번이 낭패를 겪고는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서 걸으니 우리로 뒤따르게 하신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4).” 하나하나 우리의 이름을 알고 부르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곧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우리보다 도 잘 아신다. 주가 길을 여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른다.
먼저는 말씀으로다. 길을 여신다 하면 소리내어 우리를 부르시는 일과 같은데,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우리를 큰 소리로 깜짝 놀라게 부르시는 데 있어 고통으로 주의 음성을 크게 모아 들린다. 이를 루이스는 늦은 나이에 아내로 얻은 아이 딸린 과부를 사랑함으로 알았다. 사랑하던 아내가 골수암으로 죽고 졸지에 남의 아이를 떠안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때서야 저는 사랑의 참 의미를 알았다. 저는 어디에서 말하길,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 않으신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뜻이 바뀐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기본 전제가 없이는 구술할 수 없는 고백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어찌됐든 물고기 뱃속까지 들어가게 된 고통으로 주의 참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욥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들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잃고 자신은 병들어 고통 중에 있을 때, 아내는 저를 버리고 떠나고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입바른 소리를 해댈 때… 저들은 어떠하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크게 들었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고통이란 믿음의 확성기다. 하나님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시고 재촉하실 때 쓰신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신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나는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데서 안심한다. 내가 아는 나는 변덕이 심하고 감정은 기복이 있고 들쑥날쑥한 기분에 따라 그때마다 바라고 요구하는 것도 다르다. 그런 나의 생각에 맞추지 않고 변함이 없이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맘 같지 않아 힘들다가도 그래서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나의 나 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더욱 확실해진다. 나를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신 이유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그렇게 새롭다.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는 그렇게 수동적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알면 알수록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일이 무의미한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는 말씀에서 ‘아, 참 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이는 결코 내 이성과 지식으로 깨달은 바가 아니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곧 우리는 어떠하든지 주의 선하심을 더욱 확신하며 살게 되는 사람들이다(14:7-9). 주께서 우리로 우리의 환난이 그렇게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게 하심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말씀은 나의 부친이 주의 부르심을 받을 때 확실하게 붙들렸던 말씀이다.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하였다가 모든 것을 잃고 죽으려는 심정으로 주 앞에 엎드렸을 때, 나의 부친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체험을 하셨다고 하였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를 이끄신다. 말씀은 주어진 환경을 돌아보게 하는 통찰과 분별력을 주신다.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도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곧 우리에게는 남들이 알 수 없는 판단력이 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성령을 심으시고 성령이 내주임재하심이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일련의 사태를 겪을 때, 그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로 주의 인자하심을 더 크게 더 가까이서 더 세미하게 느끼고 누리게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어떤 의무감이 생긴다. 전에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던 누구의 이야기나 어떤 상황이 크게 보이거나 크게 들린다. 확대되어 나로 하여금 보이게 하시는 이의 눈은 그때마다 앞서 우리로 내적 감화를 체험하게 하신다.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로 설명해줘 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다. 나야말로 어릴 때 늘 그러한 경험을 하곤 했었다. 가령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같은 또래 아이들과 세례를 받을 때, 어린 게 뭘 안다고 잔망스럽게도 그처럼 울고불고하며 회개를 하였을까?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같이 어울렸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 날 그처럼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중에 하나는 목사가 되어 선교사로 나가 있고 하나는 사모가 되었으며 나도 뒤늦게야 목사가 되었다. 그뿐인가? ‘때를 따라 돕는’ 사람들이 늘 내 인생에는 예비 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내가 인덕이 많다 여기며 너스레를 떨고 말았는데, 주의 은혜는 내가 그릇 행하는 동안에도 변함 없이 한결같으시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새찬송가 301장)
돌아보면 우리는 수혜자다. 특혜를 입었다. 주의 은택을 누렸다. 그런데 늘 안타까운 것을 이를 잊고 살다 고통을 통해서나 그제야 주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글처럼 ‘고통보다 깊은 은혜’는 고통을 지나면서 알게 된다. 퀘이커교도들처럼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신중하게 처신하여 깨닫는 진리가 아니다. 때론 당혹스럽고 난데없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데,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슬픔 중에도 나의 묵상글을 읽었는지, ‘남은 생은 주만 바라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에 답을 주며 ‘꼭 그렇게 하겠다’는 저의 대답에 뭉클하였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 바울의 설교를 다시 귀담아 들으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하는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동조하고 아멘, 할 수 있는 게 우리의 저력이다.
곧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 우리로 더는 속되다 하시지 않는다. 그러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속죄함으로 씻음을 받은 주의 자녀이었다. 이를 붙들고 사는 게 복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도 이제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여름을 재촉하는 늦은 봄비인가 이른 여름비인가, 요란하게 퍼붓고 있다. 나는 말씀 앞에서 새삼 나의 날들을 돌아보고, 남은 날들을 주께 의지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 이는 이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감사함이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눈물이 나고 슬픔에 젖어 괴로움으로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인지. 전에는 다만 날 위해 살고 날 위해서 죽는 것을 행복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기를 바란다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연거푸 말씀을 되뇌며, 그럴 자신도 용기도 없는 나의 미천함까지도 주께 내어놓는다. 그리하여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이로써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9-10,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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