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전봉석 2021. 5. 12. 05:46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6:19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서로 돌아보아 문안하는 일은 감사로 주께 제사를 드리는 일로 이로써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무엇으로 자기 행위를 옳게 할 수 있을까?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로 남을 돌아보는 것으로 이는 저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줄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신실함이란 주만 바라는 것으로 이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자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 같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게 아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주를 바람으로 쇠하고 주를 부름으로 피곤한 날이 복되었다. 사느라 드는 비용으로 치면 먹고 사는 일이나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는 기를 쓰면서 주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수고하는 것을 가소로운 듯 여기는 것은 미련하다. 평소 이와 같은 부르짖음에 훈련이 없으면 환난 때에 주를 찾지 않는다. 여기저기 도움을 구하느라 오히려 하나님을 등한히 한다. 그러나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그리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우리가 주를 부를 때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이다. 그 승전가는 서로의 문안이다. 내 일, 내 앞가림이 전부가 아니라 내 안에 두시는 이로 말미암아 생각나고 마음에 걸리는 이를 돌아보며 문안하는 것이 승전보다. 오늘 바울은 연신 서로를 문안하기를 거명한다. 그러할 때에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6-27).” 이를 모두 문안함으로 순종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따라 우리에게 증거하는 성경의 목적이다. 이를 믿어 순종하게 하시는 데 있어 우리가 서로 성도를 돌아보아 문안함은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다. 믿음 안에서 어찌 지내는지, 이번 일은 주의 어떠하신 도움으로 잘 이겨내고 있는지, 이를 마음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위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하시는 시몬 베드로에게의 말씀이 곧 우리의 것이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우리가 무엇으로 저를 먹이고 돌아볼 것인가? ‘서로 문안하라.’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 우리의 거룩한 입맞춤은 성경으로다. 말씀이 아니면 기도도 복음도 사랑도 희생도 모두가 허사다. 말씀이 아니면 진리도 교회도 교리도 믿음도 헛것이다. 오직 우리는 말씀으로 입맞춤이다. 이를 바울은 끝까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온전히 말씀으로 하나 됨을 뜻한다. 저를 사랑함은 주의 사랑 때문이다.

 

누가 누구로 인해 힘들어한다. 들어보니 가관이라 저의 방자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말씀으로다. 이를 위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 우리의 문안은 그저 안부를 묻고 어찌 사는가, 돌아보며 겉으로 관심을 두다 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4).”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벌써 우리가 받은 바 그 사랑 때문이다. 누구에게 말하길, 그게 참 어렵겠지만 주의 마음으로 주님 때문에 주의 사랑으로 대하는 게 문안이다. 서로가 좋을 때야 간 쓸개도 다 빼줄 정도로 설레발을 떠는 것이고, 이와 같은 감정은 좋은 관계가 그치면 그만인 게 되고 심지어는 원수보다 못한 관계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냥 안 보면 되고,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놔두면 될 것 같지만 그러기에는 또 마음이 어려울 따름이니, 그것이 다 주의 사랑 때문이다.

 

누구의 어떤 일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서로 말한다. 주께서 어찌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는가를 간증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럴 때 굳이 미워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 우린 다만 주께 아뢴다. 그 일 때문에도 우리가 주 앞에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 그런 거 보면 좀 이로울 필요도 있다. ‘그 일, 그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할 때가 오히려 우리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누구의 일로 저가 겪는 어떤 이로 인한 마음고생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것이 오히려 주를 더 간절하게 바라게 한다. 그것으로 한 번 더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럴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산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사람 보고 사람한테 기대하면 영락없다. 백팔백중 실패하고 배신당하기 일쑤다. 그런 저와의 관계가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시 71:1-5).

 

우리가 서로 문안함은 주 안에서 안녕하신가? 하고 돌아보아 서로의 안녕을 간증으로 삼는 고백이고 기도가 되게 한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무슨 일로 흥에 겨운 일을 맞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주를 찬송함이다. 서로의 일이 그처럼 서로를 울리다 웃기다 하는 까닭은 우리가 같이 한 곳을 바라보고 한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이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모르겠다. 나에게는 인간관계에 있어 이 일이 매우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이어서 내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어떤 이와는 이상하게 소원해진다. 전에는 그처럼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 다니던 마음이 언제부턴가는 무슨 일로 자꾸 어긋나고 불편하다. 그런데 또 어떤 이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마음이 먼저 가고 주께 저의 이름을 나도 모르고 고하고 있기 일쑤다. 가끔은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왜 이처럼 마음을 쓰나, 싶을 정도로 마음은 내 것인데 내 맘 같지가 않다. 그렇게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롬 16:5).”

 

우리가 이제 서로 사랑함은 주로 인한 것이다. 어찌 잘 지내는가? 할 때에 전에 물었던 말과는 다른 속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와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이상하게 억지스럽다. 또는 인위적이다. 그런데 주의 마음은 마치 고넬료와 베드로 사이에 저들은 모르는 하나님의 왕래가 운행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위하고 대한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단 9:17).”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가고 신경이 쓰인다 싶었더니, 저의 영혼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다. 우리 믿는 성도의 마음은 주가 거하시는 성소다. 그것이 황폐하면 주가 힘드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시 25:11).” 주께 고하고 용서하심을 받는 일, 문안하라. 문안하라, 문안하라. 문안함으로 우리는 바른 길을 간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미혹이 많은 이 땅에서 온전히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은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 우리의 순종이 서로의 문안으로 서로에게 증거되어 서로의 길을 트고 막힌 담을 허물며 황폐한 성소를 재건한다. 그렇게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6-27).” 이것이 우리의 맡은 바 사명이었다. 곧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