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전봉석 2021. 6. 1. 05:51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7-18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편 69:33-34

 

 

늘 생각은 앞질러가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미칠 수가 없다. 이런가? 하면 저러시고, 저런가? 하면 이러시는 데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신다. 그럴 때면 가만히, ‘아멘’을 배운다. ‘예, 옳소이다.’ 하고 주 앞에서 수긍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런 걸 두고 그렇게 내가 더듬어 찾아야 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며 산다. 그러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다른 수가 없다. 아무리 애써도 허튼 걸 붙드는 꼴이라, 수고하고 애쓰는 만큼 마음만 다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러한 마음도 허사다.

 

오늘 말씀은 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오늘의 사정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런 걸, 그렇게 보이는 걸 추구하며 산다고 기를 쓰고 살았으니 더해지는 것은 그 영혼의 궁핍함뿐이었다. 그럼에도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시 69:33-34).” 이와 같은 말씀이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후 4:1).” 곧 낙심은 우리로 꿇려 주저앉게 하지만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2).” 가만 보면 내 안에 숨은 부끄러운 일이 여전하지 않던가?

 

마음은 앞서고 생각은 이미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정작 그 삶은 더디기만 하여 뭐라 이를 말조차 없다. 가끔은 누가 아파할 때, 또는 힘든 일에 주저하고 있을 때 나는 나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무슨 말을 하다, 어떻게 아세요? 하고 저가 물으면 내가 환자니까. 의사는 아니지만 늘 당해내는 환자로 살아가니까. 하고 얼버무린 말에서 오히려 답을 찾는다. 누구더러 뭐라 하겠나? 내가 죄인인 것을. ‘숨은 부끄러운 일’을 여전히 추구하고 싶은 욕구로 가득한 어리석은 자이니까. 이를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은혜였고 은총이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3).” 망하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운 것이고 어리석은 일 같으나 더는 나에게 복음이란 그 이상의 무엇도 소용이 없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렇게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4).” 그래서 더는 염려가 염려되지 않는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어제 하루, 설교원고 본문을 잡고 그 배경을 찾아보다 저 한 구절의 말씀으로 든든하여졌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다른 더 좋은 수가 있겠나? 바울도 이를 강조한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저마다 염려가 있고 그에 따른 생각은 저 혼자 저만치 앞질러가기 일쑤고 이를 따라잡으려는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러면 그분이 너를 붙드시고 결코 의인들이 흔들리게 두지 않으실 것이다(시 55:22, 우리말성경).” 맡김으로 붙드심을 안다. 붙들림으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의 숱한 비탄의 시(詩) 가운데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는 아비로서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B. C. 797년에 저는 늘 가까이 여겼던 친구 아히도벨의 배신과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맞아야 했다(삼하 15:1-18). 그때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12).”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주께 호소하는 기도라!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나는 말씀 앞에 먹먹하였고 다윗의 심정을 헤아리다 지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상 그 어떤 슬픔보다 자식의 반역과 곁을 함께 했던 친구의 배신이 참으로 서러울 것 같다. 그러할 때 주의 말씀이 우리 영혼의 중심을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현실이 어떠하든지 주의 말씀이 나로 온전히 서게 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확실한 말씀으로 선다. 이를 알면 알수록 슬픔도 기쁨도 모두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된다.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시 55:2).” 주가 내게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큰 소리로 도움을 구한다 한들 누가 돌아보기나 할 것인가. 살면 살수록 느끼는 일이지만 모두가 저 코가 석 자라, 제 앞가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일로 서러워하거나 화낼 거 없다. 그래봐야 오히려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일 뿐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가깝다고 여기는 만큼 멀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서운함만 크다. 인생 의지할 거 없다. 그저 다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섣불리 주춤하다 느닷없이 끌려가는 수가 있다. ‘에이, 설마’ 할 때는 이미 늦는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고, 더욱이 다윗의 비탄은 역설적이게도 위로가 된다. 저의 삶이 고루할수록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섬기며 주의 뜻으로 살았던 것이겠구나! 그러니 우리의 호소는 주께 돌려진다.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시 55:3).” 당연히 힘들지. 고통스럽지. 한데 그것으로 주를 바람이 복이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저는 어찌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시련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로 바라게 한다. 심지어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이처럼 우리 안에 두시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실제 너머의 실체를 바로 붙들게 하는 것이다. 실상은 늘 그 모양이고, 때론 민망할 정도로 안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 것 같이 서글프고 구차하고 비루하기까지 한 삶이지만. 실제 그 이상의 실체를 우리는 안다.

 

다윗은 그렇게 쫓겨 압살롬의 눈을 피해 도망하고 있었다. 이에 사울의 먼 친척 중 시므이가 나와 저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깐죽거렸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삼하 16:7-8).” 그러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보복할 것인가? 다윗은 이를 기도로 옮겨 적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4-5).” 오직 주밖에 바랄 수 없는 때가 복이었다. 이로 인해 주를 더욱 의뢰할 수 있는 게 신비다. 믿음이 주는 놀라운 비밀이다. 곧 우리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있는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마음은 늘 앞서가지만 그래서 생각은 멋대로 추측하고 헛된 바람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이에 주를 바람이 기적이다.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이 다하신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의원이 필요한 환자이다. 누구의 어떤 사정을 듣고 같이 이입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여러분의 짐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의로운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시 55:22, 쉬운 성경).” 내가 의로운 것은 내 안에 두신 믿음으로다. 그래서 바울은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곧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왜 하필, 나 같이 못나고 내세울 것 없는 자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맡기셨는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이는 나의 능력으로 이루려하심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8-10).”

 

말씀을 가만히 되뇌면 그 안에 모든 게 들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13).” 그렇게 누구에게 저의 질병을 두고 말을 하다 나의 말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저들이 자랑하며 추구하는 것을 우리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이처럼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주의 뜻을 헤아리고 주의 마음을 바라게 하시는 것이 복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이를 오늘 시편으로 음미하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시 69:30).” 이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32).” 곧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33-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