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전봉석 2021. 5. 31. 05:41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이런저런 일로 시달리다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의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쫓기듯 살고 도망치듯 살다보면 문득씩 그리울 때가 있는데, ‘이게 뭐지?’ 하고 가만히 묵상하면 주께서 더하시는 자유다. 곧 우리 안에는 아주 오래 전에 상실한 유전인자 하나가 있는데 ‘에덴에서 누렸던 자유’이다. 지고 가는 삶의 무게에 눌리다 질식하기 일보직전에 스치듯 깨닫곤 하는, ‘언젠가 있었을’ 자유를 떠올리곤 한다. 곧 그의 백성이라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그래서 우리 안에는 주의 이끄심을 바라는 본능적인 바람, 어떤 탄식이 있다. “…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공교롭게도 그게 왜 아플 때, 실패하고 좌절해서야 기억이 나는 것일까? 이래저래 안 좋은 일로 시달리다보면 우리 안에는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어떤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이는 순전이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니다. 어쩌다 그리 되는 우연도 아니다. 반드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 안에 두시려고 우리를 쥐고 흔드는 이에게 맡겨두신다. 그렇게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어서 때론 이게 뭔가? 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그 신호 같다. 그랬을 때 비로소 ‘또 주의 영을 내 속에 두신다.’ 이는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저마다 말 못할 사정을 한두 개쯤 가슴에 안고 살면서, 그 마음이 때론 힘에 겨워 질식할 것 같을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아, 왜 이 마음이 이처럼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 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래서 이제 무엇을 두고 기뻐해야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게 하신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곧 오늘에 두신 한 날의 수고가 고달프고 힘든 것만은 아닌 게, 그것으로 주를 다시 바란다. 잃어버린 무엇, 삼가 나의 존재의 의미를 새삼 진지하게 돌아보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나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그러므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곧 우리가 주의 마음에 다윗과 같이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주신 상황에서 주를 바라는 일이었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고. 때로는 이 길이 과연 맞나, 싶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아, 지금의 나는 은혜다. 마뜩찮은 것들도 포함하여 이에 이를 모두 지고 주를 따른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지 숙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구질구질한 삶의 질고가 아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단적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아픈 아이와 아들과 아내가 전부인 청중 앞에서 말씀을 전하다보면 사탄은 슬그머니 속삭인다. 이런 말을 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여러 번 다시 읽으며 검토할 때도, 뭘 꼭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내 안에 고질적인 갈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제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 사도의 고백이 괜한 과장이 아닌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일, 나는 다만 주의 말씀을 준비하고 증거하고 저들에게 전하며 위하여 기도할 뿐이다. 어떤 결과도 예상하지도 않고, 기대하지 않음으로 바람을 주께 둔다.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만 있게 하신다.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그만두고 나면 이상하게 속상하다. 더 들어줄 걸, 같이 동조하고 이해하려 할 걸, 그 속은 또 오죽할까, 싶어서. 이런 마음이 들면서, ‘이게 뭔가?’ 싶은 게 주의 마음이다. 말씀을 전하면서 주께 하듯 하는 것이 증거였다. 그렇게 예배는 자꾸 나의 몸에 밴 익숙한 것을 저버리는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뇌까리는 주기도문이나 신앙고백처럼 허무한 게 있을까? 찬양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묵상하지 못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깊이를 더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제는 괜히 회의가 들었고, 이게 뭔가 싶었는데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그렇듯 그러는 자체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의 익숙한 것들에서 놓여나는 일이 예배였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 인위적으로 또는 몸에 익숙한 것으로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하는 일이 간음이지 않나?

 

누구처럼,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고 씨름하는 일은 그래서 헛되다. 한 명이 오든, 내 앞에 누가 있든, 오늘 한 날이 어떠하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더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노력이 필요하다. 억지로라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습관이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나를 내버려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잡는 일에는 하나님도 관여하지 않으신다. 놓아둠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실 뿐이다. 비로소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시 45:15).” 그때에야 주의 영광을 본다. 하면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68:34).”

 

나의 이 모든 것, 탐탁지 않은 것까지도 주의 능력으로 조성하시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5).” 그러할 때 내가 여기, 주의 성소에 머무는 것이 복인 것을 안다. 어제는 문득 너무 멀리 떨어진 것처럼 외따롭고 우울하기까지 하던 마음이다. 이 일을 계속 하면 뭐 하나 싶은, 한데 오늘 말씀은 그런 나의 마음을 마치 다 꾀고 알고 있으신 것처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나의 그러그러한 날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누구에게는 보여지고, 저는 나를 보며 주에 관한 것을 읽는다. 보이고 읽히는 삶으로 살게 하심이 복이다.

 

이는 허투루 굴며 나의 바람을 좇던 날들을 그리워하다보면 안다. 그게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었는지. 이를 알고 이를 알게 하심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더는 내가 아니다. 내가 임의로 써가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이를 내게 알게 하시는 이가 나로 하여금 바라게 하시고 주의 이름으로 주께 아뢰게도 한다. 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어디가 아프고 또 무슨 일로 마음이 어려울 때, 생각보다 일이 더디고 마음은 급할 때도 가만히 주의 기다림으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때론 농부처럼 무던함으로만 이 길을 간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게으르지 말게, 나태하지 않게, 주는 때로 나를 그렇게 쥐고 흔드는 이에게 맡겨두시는 것이다. 왜? 미혹당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눅 21:8).”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그렇게 하루하루 날이 더해지면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러니 우리는 결코 연기처럼 불려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미혹하던 것들이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 68:2).”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