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5
다들 특색이 있고 자기고집들이 있다. 누가 뭐라 하는 걸 싫어하고 뭐라 한들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한동안 연락하기를 그만두고 아침마다 말씀만 보냈다. 그러다 문득 연락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상태는 도져서 약을 아침저녁으로 한주먹씩 먹고 일상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말을 해봐야 소용이 뭐 있나 싶어서 그만두려하면 이처럼 하나님은 다시 연결을 하시는 셈인데, 당장 오늘 아침 일찍 오겠다고 하니 것도 놀랄 일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없는 유년이 어디 있겠으며 상처 없이 산 사람 또한 누가 있겠나? 스스로의 아픔에 너무 절절맬 거 없다. 그것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무리 지나간 과거가 암울하고 억울했다 해도 그것으로 말이다. 하면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생각해야 한다. 반드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또 어려워하며 서러워할 테니까. 아이에게 말을 해도 녀석은 그저 다 안다는 식이니, 다루기 참 어려운 상대라 그만해야지 하면 이상하게 또 서로 연결하신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주의 공의를 나타내는 데 있다. 반드시 세상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치닫게 돼 있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 46:1).” 벨은 바벨론의 ‘주’이고 느보는 저들에게 ‘학문의 신’이다. 소위 우리들도 종종 말하길 ‘지금이 어느 땐데’ 하고 허용의 범의를 넓힌다. 나이든 사람은 나이들이 완고하고 젊은이들은 젊은 사기에 완강하다. 저마다의 고집은 가히 어쩔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악한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킨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당장 운신이 어려운 처지에서도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변명에 몰두한다. 뭐라 하다 그 말에 항변하면 나는 입을 다물게 된다. 저와 싸우고자 한 말이 아니다. 논쟁은 소모적일 뿐이다. 가령 장모에게 주일을 성수하는 일에 대해 물론 코로나로 서로가 조심해야 하고 연로하시니 그럴 수 있지만, 교회만 빼고 다닐 데 다 다니면서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이다. 한데 어디를 왜 갔는지를 뒤늦게 내게 설명하려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변명으로 억울한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봐야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이를 아시는 주께서 오늘도 우리를 일깨우신다. 깨어있게 하신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성경은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12-13). 나는 누구보다 나아서 뭐라 이르는 것이 아니다. 약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못한 이가 없고 나의 약함은 나로 늘 좌절하게 한다. 장마가 시작되고 나의 몸은 물 먹은 솜 같이 무겁다. 여기저기 파스를 너무 붙여 살갗이 다 일어났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것은 진통제를 참고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안도한다. 누가 내 백팩을 보면 한숨을 쉴 것이 종류별로 진통제에서부터 각종 안정제와 파스까지, 위장약들이 가득이다. 이를 이고 지고 어딜 가나 들고 다니는 한심함을 나는 이제 기꺼이 감사한다. 참다못해 진통제를 먹으면 속이 볶일까 하여 미연에 위장약도 같이 복용을 하고 혹시 몰라 진경제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가끔은 하루가 지면 안도의 한숨이 감사로 길게 나온다. 너무 긴장하고 살지 마시라, 스트레스 받지 마시라 하고 의사들은 권하고 정신과에서는 아예 대놓고 ‘지금 하는 일-만나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하는데 그러니 산에 들어가 홀로 생활을 해야 하는가? 나는 저들의 말을 호의로 받아 말씀으로 대치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런저런 일에서 우리는 스스로 삼가 자기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이는 저들을 멀리하고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존하는 날 동안에 주를 멀리하게 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소리다.
아무튼 녀석이 앞서 것도 오전에 일찍 서둘러 오겠다는 소리에 반가움 반 귀찮고 부담스러운 마음 반으로 그러자고 하였다. 어쩌겠나? 주가 내게 두신 일이고 아무리 떨어내도 도로 붙는 정전기처럼 녀석과도 어느새 십 수 년의 시간이 되었다. 저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 지금 아이가 스물여섯인가? 일곱인가? 결국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로 자신을 소진하듯 아무런 목적도 없고 계획도 없이 산다. 이 글을 읽으면 발끈하면서 자신이 왜 목적이 없냐고 항변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주는 밥이나 축내고 부모 등골이나 빼먹고 살며 동생들 보기에도 빙충맞기 짝이 골칫덩어리다. 저도 실은 안다. 면목도 없어한다. 그러면서 어영부영 산다. 뭐라도 하라 이르면 나름은 뭘 한다고 듣기 싫어한다. 듣기 싫어해서 한동안 연락을 놓으면 이상하게 내 마음이 편할 줄 아는데 그게 또 희한하여, 어쩐지! 며칠 전부터 괜히 마음에 밟히더라니. 아, 그러니 우리를 주 앞에 어쩌면 좋을까? 내가 저 아이보다 좀 뭐 나은 게 있어서 이런 소릴 하나?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어쩌면 녀석한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 것 같다.
더는 힘에 치여 예수 앞에 나아와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막 7:25).” 그 심정이 어떠하였겠나? 그러니 예수님의 거절은 신선하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이와 같은 모욕적인 말에도 저 여인은 굴하지 않았다. 저가 주이심을 알았다.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절박함이 결여되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해볼 거 다 해봐야 안다. 나는 요즘 내 자식에게도 뭐라 이르고 시큰둥해 하면 더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께로 돌린다. 주가 알아서 하십시오! 어쩌면 나의 부모의 전법이 통한다. 나 같은 아이를 어찌 양육하고 다스려 키웠을까? 그 가난의 늪에서도 우리 네 남매를 어찌 주 안에서 주의 길 가게 하는 사역자로 세우실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하나다. 마치 저 여인과 같이 주가 아니시면 알아서 하시라, 하는 심정?
누구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더니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건 여전한 자신의 완고함이지 시대는 늘 똑같다.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우르를 떠나는 아브람과 같이 길을 나서야 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걸음을 떼는 것이다. 내가 오늘 오겠다는 아이를 뭘 어쩔 수 있겠나? 처음도 아니고 지겹다. 할 거 안 할 거 다 해봤다. 심지어 쌍욕도 하고 모질게 야단도 쳤다. 그 엄마랑 통화도 하며 문제를 정도를 알리기고 하였다. 그런들 도로 제자리다. 그런 아이를 오라 해서 어쩌겠다고!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이 또한 주께서 인도하심이라. 나는 그리 여긴다. 순응이다. 다른 더 좋은 온유를 알지 못한다. 내 속이 편한 건 아니다. 귀찮다. 월요일은 늘어져서 영화도 한 편 보고 소설도 읽고 나름은 빈둥거리며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그런데 말씀은 마음을 지키라고 하시니. 우리의 본성은 내가 아는 것보다 악하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상대가 안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사람, 별 거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오늘은 아이에게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야겠다. 나의 도움은 서로가 피곤할 뿐이다. 나름은 선생이라 여겨 녀석은 그래도 내가 꽥꽥거려도 찍소리 안 하고 듣기는 한다. 물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만, 그러면서도 또 이상하게 이처럼 연결이 되는 걸 보면… 하나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것일까? 약을 한 주먹 털어먹고 아버지 차를 몰로 4, 50분을 달려 여기까지 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뭔가 그 안에 답답증은 있단 소린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해결이 안 날 문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오늘 말씀이 경고음처럼 길게 들린다.
우리는 더 어둠에 있지 않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5-6).”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할 때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정신을 바로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에 쓸려간다. 뜬금없이 손위처남이 장모를 모시고 예배에 왔다. 어머니의 성화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대놓고 코로나 핑계를 대는 것에 일갈했다.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마시라. 그것으로 예배가 어렵고 주를 바라는 데 시험이 든다면 자신을 돌아보시라. 교회는 복지 차원에서 큰 교회로 다니는 게 아니다. 나의 말을 어찌 마음에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참 피곤한 상대이다. 나름의 열심이 자신을 삼킬 우려가 크다. 한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10).” 이는 복음의 근간이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11).” 이는 신앙의 근간이다. 나의 싫고 좋음은 과감히 무시해야 한다. 주의 뜻은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렘 6:10).”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둘 게 없고, 오히려 내 안의 나를 다스려야 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7-18).”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19-22).” 오늘 우리 가는 길의 이정표다. 부디 주가 함께 하심을.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26).” 저들의 방문을 마다할 수 없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27).” 나의 사명은 내가 정한 게 아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8).” 주의 은혜로 하자. 하는 데까지 하는 것뿐이다.
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1-2).” 이것으로 송축이 되고 찬송이 되기를, 나는 은택을 잊지 않는다. 그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5).” 이를 안다면 오늘 한 날의 수고는 오늘의 일로 족하다. 하면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 내가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이에 다시 말씀 앞으로 오는 것은,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그렇게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7).” 그러므로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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