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전봉석 2021. 7. 14. 05:33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7-8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7

 

 

칼빈은 시편을 우리 영혼의 해부도라고 했다. 그만큼 다양하고 심도 있고 놀라운 사실과 고백들로 가득하다. 가령 지난 주일의 본문이었던 시편 58편은 저주시로 109편 137편과 같이 어찌 이런 내용이 성경으로 수록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가령 109편에서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에 대하여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6).” 하거나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7, 9). 그뿐인가?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10).” 아니 아예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13).” 하고 아뢴다.

 

이런 내용의 성경을 어찌 읽고 이해해야하나 싶은데, 실제 우리 속에는 악의와 불의와 온갖 거짓과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다. 겉으로야 알 수 없으나 사람 속보다 복잡한 게 또 있을까? 늘 이런 말씀을 접할 때면 읽기조차 민망하여 나는 고상한 척 굴다가도 내 안에 그보다 더한 뿌리 깊은 감정들이 있다는 데 직면하게 된다. 열등감은 물론 괜한 자격지심에 혼자 끙끙 앓는 경우도 있다. 이를 어찌 감당하지 못하여 마음에 병이 난다. 그것은 여러 형태로 표출된다. 뚱하니 입을 다물어버린다거나 뭐든 남 탓을 하기도 한다. 미움과 절망이 그릇된 길로 인도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길로 달려가게도 한다. 그러니 누구 이야기로 덩달아 속이 답답하다가 그 해결책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직접 보복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독한 마음을 먹고 이를 실행으로 옮길 때 범죄가 된다. 둘째는 꾹꾹 눌러 참는 것이다. 당장은 그것이 인품 좋은 사람으로 비추지만 억눌린 감정은 이내 표출되게 돼 있다. 자식과 아내에게 발산하든, 소위 말해 갑질을 하며 살든. 셋째, 시편에서처럼 하나님 앞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저주가 되지만 하나님께 아뢰면 이는 탄원이 된다.

 

하나님 앞에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시 59:5).” 다윗은 사울이 죽이려고 보낸 자객을 피해 숨었다가 이처럼 주께 아뢴다. 그러면서도 훗날 저는 결코 사울의 죽음에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하던 사울과 압살롬을 애도하며 슬퍼하였다. 우리는 분명히 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겉으로야 알 수 없어도 그 속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게 사람이어서 그야말로 자신을 비우고 낮추며 주를 바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다. 곧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죽어라 하고 기를 쓰며 살 땐 뭐라도 이뤄야 하고 가져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그것으로 보람을 얻고 보란 듯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 행복인 줄 알았다. 그러니 혹여 누가 뭐랄까, 남이 나를 어찌 여길까 싶어 거짓으로 나를 꾸미고 살아야 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누구보다 나은 정도로 여기며 자신을 속이기까지 한 것인데… 우리는 대부분 꾹꾹 눌러 참으며 자신의 감정을 속인다. ‘카펫 밑으로 쓸어버린 먼지’ 같다. 당장은 해결된 것 같고 괜찮아 보인다. 그러다 툭, 하고 어떤 일에 의해 터져 나온 감정은 분출하여 걷잡을 수 없다. 한 아이는 그렇게 분노조절장애를 겪는다. 또 누구는 조울증으로 자신의 감정기복에 자신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아무리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이성이 아닌 묵은 감정으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 문제는 애굽이 아니다. 광야가 아니다. 정작 우리의 문제는 물러설 곳이 없는 홍해 앞에서이다. 비하히롯과 바알스본 두 산으로 가로 막힌 길에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밀어닥친다. 앞에는 가로놓인 홍해로 더는 갈 곳이 없다.

 

설상가상, 눈이 쌓였는데 그 위에 서리까지 내렸으니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주를 바라게 된다. 모세는 주 앞에 엎드렸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기도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못할 말이 없다. 굳이 할 말을 준비하고 또는 만나는 게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같이 있어서 좋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해도 되는 게 사랑이다. 기도다. 내가 주께 아뢸 때 나의 어떤 말도 못할 말이 없다. 주께 아뢰면 탄원이 되고, 내 속에 담아두면 썩은 감정이 되고, 이를 표출하면 범법자가 된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저마다의 사연은 구구하여서 우리는 아이의 일로 의논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부모의 일이다. 나 자신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누구와 어떤 얘기를 하든지 마무리로는 글을 쓰라고 한다.

 

글쓰기는 말하기의 언어화다. 말은 감정으로 덧씌워져도 글쓰기는 자정능력이 있어 형상화된 나를 관찰할 수 있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왜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셨을까? 때론 해석이 분분하여 언어는 늘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우리로 꿈꾸게 한다. 소망을 갖게 한다. 기도는 글쓰기와 같아서 나의 이와 같은 묵상글이 실은 기도가 된다. 묵상은 그 어원이 리허설이다. 연습이고 연마다. 기도는 훈련되어야 한다. 곧 기다림은 사랑으로밖에 견딜 수 없다. 사랑하면 믿고 바란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길을 나서는 아브라함이 되게 한다. 이를 두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이 되게 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환도뼈가 꺾여 장애를 입는다. 남은 생을 야곱은 절뚝거리며 살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안 됐으나 정작 안 된 이는 자기 속을 자신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일러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이어서 기도하게 하신다. 기도는 염려를 이기게 한다. 어떤 분노를 오래 품지 않게 한다. 이를 직접 표출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주께 아뢴다. 시편의 구조다. 칼빈은 그래서 시편을 영혼의 해부도라 하였고 나는 성경 중에서도 시편을 사랑한다. 하여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오늘 본문의 시편처럼 나로 주를 의뢰하고 붙든다. 누구 일로 마음이 어려웠다가 주 앞에 토설하고 나면 이내 더는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감정에 시달린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주께 아뢰면서 나는 더 이상 나의 옛 이야기가 부끄럽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것으로 누구를 위로하고 주의 도우심의 증거로 삼는다. 그야말로 나는 지진아였고 특수아동이었으며 구제불능이었다. 그런 나를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일을 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기묘하다.

 

한 영혼이 주 앞에 나아오기까지 정말이지 온 우주적인 역사가 다 일어났다. 우연처럼 누가 아팠거나 죽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는 옴짝달싹 못하는 궁지로 몰려 저는 비로소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 해 가장 범람한 요단을 딛고 나아갈 것인지 머뭇거리다 도로 뒤로 물러설 것인지. 오죽하니 그런 일로 나에게까지 말을 하게 되었을까? 누구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저에게 글쓰기를 권한다. 우리 믿는 자들은 묵상을 해야 한다. 경건이 없이는 거짓된 자아를 마주하지 못한다. 마주했을 때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때 나의 이 필사적인 글쓰기는 마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나의 이 시간은 사자가 움켜쥔 먹잇덩이다.

 

나의 하루는 이 시간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나는 누구에게 글쓰기를 권했으나 저는 여전히 생각중이다.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라 하나님 앞에 진득하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뭐라 한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독소는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안도하거나 광야에서의 돌보심으로 안주하는 것이다. 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로소 전투가 시작된다. 내 안의 탐욕과도 싸워야 한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자족의 비결은 복 중의 복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는 나의 능력이 아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누구를 마주하게 하시고 어떤 사연이나 형편을 듣고 내가 먼저 헉, 하고 불안과 초조가 밀려들 때면 동시에 나는 주를 더욱 바랄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그렇게 새벽을 깨우고 그렇게 말씀 앞으로 나를 앉힌다. 이는 오직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데서 나는 이제 안도한다. 내가 저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 아니다. 저의 일로 나의 영혼을 들추고 ‘카펫 밑에 밀어두었던 먼지’를 털어낸다. 묵은 감정이 수두룩하다. 누구의 고백으로 나의 것도 들추어서 주 앞에 내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주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소식인지. 그러므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더는 치우치지 않도록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11-12).”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하루를 연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 이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