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1-2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모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산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중보와 도고는 성도의 의무이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려면 저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도를 부탁하는 데 있어 자기 이야기를 할 줄 모르면 이는 모순되다. 나는 저에게 나의 이야기를 개방함으로 내 이야기를 통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 성도의 교제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일이다.
여기서 나는 글쓰기의 거룩한 긍정을 본다. 차마 말로는 옮길 수 없는 사연들이 있다. 어느 집이나 애환이 있고 각각의 애물단지가 있다. 가족이 원수라는 말씀도 이에 통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애물’은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통칭한다. 여기에 ‘단지’라는 부사어를 붙여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낮잡아 부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으로 집중하는 마음을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소리다. 누구에게는 자식이, 또는 건강에 대해, 누구에게는 돈이 또는 사람들의 기대가 애물단지다. 이를 뿌리칠 수 없어 평생을 이고 산다. 정작 교회를 가고 주를 바란다고 하는 신앙이 온통 그 속에 애물단지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 한데 이를 두고 원하는 모든 마음의 경우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애물단지가 우상단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여러 사연을 접하고 산다. 싫든 좋든 일련의 사건과 상황은 ‘하나님의 소리’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그러니까 모든 ‘애물’은 ‘단지’가 되기 이전에 사랑하여 소중한 것은 옳다. 하지만 그것이 우선은 아니다. 성경은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먼저와 나중의 원리가 있다. 나중이 먼저 되는 모든 것은 불순종으로 이는 죄악되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게 된다.
엊그제는 정신과를 다녀왔다. 불안장애로 인한 안정제를 새로 처방 받기 위해서이다. 선입견이어서 그런가, 정신과는 내과나 외과와 달리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다. 내 앞에 세 명이 있어 나는 이어폰을 꼽고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열에 아홉은 숨기듯 눈길을 돌린다. 오래 된 사이의 의사는 뜬금없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약을 먹는데 불안이 해소되지 않아 다시 무슨 약을 먹였고,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리는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저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알고 나의 문제는 건성으로 듣고 마는 것 같다. 그리고는 늘 곁다리로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여느 사람보다 나의 진료 시간은 지연된다. 그러다보니 늘 내 뒤에 기다리던 사람이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며 눈을 흘긴다. 그리 된 것은 더는 내가 낫고자 하지 않고부터다.
나도 이를 위해 주께 기도했다. 이런 나를 위해 누구도 기도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낫고자 함인데 하나님의 대답은 언제나 ‘그 은혜로 족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실은 이것으로 의사보다 자유롭게 누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저에게 나의 처지는 무장해제를 하게 한다. 자신이 꽁꽁 감추고 있던 애물단지를 과감하게 풀어놓는 것이다. 저이가 왜 내게 저런 말까지 할까, 심드렁하게 여겼던 적이 있는데 이는 주가 내게 두신 은사였다. 나는 그리 여긴다. 누군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영국의 수잔은 골결핵이라는 판명을 받고 20년이 지난 뒤에야 이 진리 앞에 두 손을 들었다. 저는 열일곱 살에 난데없는 병고를 떠안게 되었다. 당시 생소하기만 한 이 병을 낫기 위해 저는 물론이고 온 가족은 필사적으로 병원을 전전긍긍하였다. 늘 저의 기도는 낫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녀의 꿈은 의사였다. 자신의 의술로 하나님이 지으신 소중한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게 꿈이었다. 곧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알았던 수잔은 지쳐갔다. 하나님은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 걸까? 본인은 물론 가족들은 지쳐갔고, 끊임없는 병원 치료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도 한도에 달했다. 어느 겨울 날 오후, 양지바른 창가 쪽으로 돌아눕던 수잔은 여전히 변함없는 햇살에 살갗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탄식처럼 외쳤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솔로몬은 기술하고 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15-16).” 이는 염세적인 깨우침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나는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사랑한다. 더는 나의 문제로 오로지 그것으로만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는 ‘단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병은 더 깊어지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어느새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수잔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침상에 누워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늘 낫기를 바라며 조급하게 굴던 표정부터 바뀌었다. 전에는 관심도 없던 옆 침상의 환자에게 말을 걸고 저의 필요한 것을 도울 수 있는 범위에서 도왔다. 늘 주사를 놓고 링거를 가는 간호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먼저 건네기 시작했다. 달라진 수잔을 두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세요!’ 하는 저의 말에 하나둘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중에' 병 낫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 '나중에' 어떻게든 보람되게 살아야지, 하는 따위의 허상을 버리니까 누워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의외로 많았다. 수잔으로 인해 병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소문은 옆 병실로도 전해졌다. 어느새 병원 내에 수잔을 따라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저의 이름을 딴 모임에서 저는 꽁꽁 감추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영국 전역의 병원으로 옮겨지며 하나의 운동이 생겨나고 단체가 구성되었다. 훗날 저의 회고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돌봤을 숫자보다 더 많은 환우들과 함께 하게 하셨다고 주께 영광을 돌렸다.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한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병이 들거나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는 순간 그것으로 정지된다. 아이에게 ‘몰빵’을 하듯 자기 인생을 모두 바치는 부모의 심정이나 더욱이 오늘까지도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해 탄원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정은 눈물겹다. 그러느라 모두를 버렸다. 누구는 힘없는 노조원을 대신하여 고공트레이너 위에서 십 수 년을 살았다. 저들의 삶과 가치는 그것으로 의미가 깊고 감회가 새롭겠으나… 바울은 자신의 애물단지를 두고 주께 아뢰었다. 물론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러다 깨달았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
이로써 나는 나의 불안증이든 공황이든 뭐라 병명을 붙이든지, 나에게 두신 장애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은 늘 어린 나를 붙들고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말을 자주하셨다. 어린 마음에 노여움만 가득하지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있겠나? 나의 하나님은 고약하였고 참으로 악취미였다. 나는 저에게 늘 의문을 품었고, 내 문제 나의 ‘애물’에 얽매이는 동안 겉으로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달랐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참 밝다, 긍정적이다, 꿋꿋하다 하는 소리를 훈장처럼 여겼다. 저들의 기대에 부흥하려 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아이처럼 자랐다. 가만히 돌아보면 나의 학창시절은 지옥 같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괴롭힘을 다 당했었다. 놀림은 예사고 돈도 뜯기고 아무 이유 없이 끌려 다니기도 하면서, 사는 게 지옥 같았다.
그럼에도 그 일이 나에게는 오래 남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의 하나님은 전우주적인 환경을 동원하여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셨다. 어제도 누구에게 글쓰기를 권하면서, 그때 나는 지진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철자법과 구구단도 못 외우는 ‘특수아동’이었다. 어린 마음에 자살을 기도하고 수면제를 모으고 죽고 싶다는 환상을 품고 살았다. 하필 내 곁의 누가 도봉산에서 떨어져 죽었다. 모두들 실족사로 쉬쉬 했지만 저는 내 친구의 형이었고, 우리 교회에 절절한 성도였다. 저의 옷깃에서 유서가 발견되면서 어린 나에게는 자살이 쇼펜하우어의 지론처럼 사람의 자유의지에서 최고의 선으로 여겨졌다. 오늘 날 내 곁에 오는 어떤 아이의 자살충동을 그래서 이해한다. 그 환상은 매우 각별하여 남몰래 지니고 다니는 비밀무기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은 내 곁에 누구를 두시고, 저는 나의 첫사랑으로 우리가 한 일은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쓰기였다. 저의 부모는 나환자로 부친의 나병 음성으로 인한 해괴한 몰골과 모친은 심한 절름발이로 저이가 걸을 때면 허공을 한 바퀴 휘저으며 발을 떼야 했다. 그런 우리가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쓴 게 3년여의 시간이다.
이런저런 나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내가 읽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는 글쓰기 예찬론자다. 어제 한 사모에게 주의 일로 감당하는 데 있어 신랑 목사의 면면이나 아이의 더딘 성장으로 인한 고충에 너무 함몰되지 않기를. 우리는 우리 이야기에 빠져들자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저런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이를 꾹꾹 눌러 자신이 소화하려 애쓰는 것은 저주다. 노여움을 보복하려 열심히 사는 것도 저주다. 누가 자수성가하여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날에 대한 복수를 고백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 기를 쓰고 살았다. 자신이 감당하려 하는 모든 것은 저주다. 찬송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오늘 아무래도 마무리를 하겠으나, 이번 주 내내 붙들고 있던 설교원고의 요점은 하나다. 저주와 탄원은 한끝차이다. 내가 하면 저주이고 주께 아뢰면 탄원이 된다. 내가 내 문제에서 놓여나지 못할 때, 그것이 애물단지가 된다. 믿는 자의 삶이란 자기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는다.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분량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주가 내게 주신 장애나 불안이나 말 못할 여러 어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낸다.
이것이 오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하는 바울의 진술이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우리는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다. 목사가 돼서 가장 흔히 듣는 인사말 같다. 기도해주세요, 하고 이어지는 저들의 사연으로 나는 때로 벅차다. 누구 이야기로는 헉, 하고 안정제를 삼키기도 한다. 내가 죽겠어서 주께 아뢴다. 저의 이야기가 어째서 나의 이야기로 들어오는지 이제는 잘 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아브라함이 뭐? 다윗이 뭐? 야곱이 어쨌다고? 저들 이야기가 단지 저들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오늘도 우린 하란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나선다.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다 환도뼈를 상해 장애를 가지고 사는 야곱이 된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나 묵묵히 주께 아뢰며 이내 이방나라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의 고백이 우리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오늘 나의 이 모든 이야기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창세전 이미 땅과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나를 예정하사 택정하신 오늘의 이야기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어찌 이 놀라운 사실을 남들 앞에 드러내는 데 있어 주저하고 자존심 상해하며 혹여 저가 나를 업신여기면 어쩔까, 하는 염려는 가당찮다. 나의 이야기는 이미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바울은 나를 앉혀두고 이른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2).” 저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애물을 배설물로 여겼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곧 나의 이야기는 자기연민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다.’ 이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그러므로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저는 나의 이야기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이는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3).” 이 말인즉 주가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더는 내 이야기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저는 누구신가? 차돌로도 샘물을 내시는 이시다. 같잖은 나의 이야기로 구원의 영생을 이야기 하시는 이시다. 이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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