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8-29
누구를 마주할 때에 저가 그리스도인이면 말씀으로밖에 더할 말이 없고, 저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말씀으로 외에 저를 위할 것이 없다. 성경은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행동강령도 아니다. 그렇다고 은혜만 강조하는 무엇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이를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의 이해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너진 삶의 회복은 회개뿐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복음은 척박해졌다. 심리적인 위로와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 정도로 전락하였다. 누구의 사연 앞에서 내가 주저하는 것도 저의 이런저런 불쌍함을 동정하고 위로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누가 나름은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공부도 제법 했고 좋은 기업을 다니며 성공한 가정을 이뤄 복된 삶을 산다고 여겼다. 그러니 가족 중 누가 병환으로 속수무책이고 이를 돌보느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간다. 그러는 중에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가 자기만 없으면 엄마 아빠가 행복할 것 같다는 소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교회가 삶의 질을 운운하며 세상에서의 형편을 살피는 동안 저의 영혼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만 못하게 절망할 따름이다.
그간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기도를 하고, 나름 성실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왜 그러는 것일까? 하고 누가 물었다. 조심스럽지만 당호하게, 안타깝지만 분명하게, 나는 저가 듣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일렀다. 성경이 성경으로 말씀하시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저는 기도하며 자신의 요구만 말할 줄 알았지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성경 통독을 하고, 기도 시간을 정해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안다. 이를 성경은 외식하는 자라 이른다. 나름 자기만족으로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자신들이 좋다고 여기고 옳다고 삼는 길을 걸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흩으시고 분노하신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 60:1).” 설교원고 초안을 잡다 이 한 구절에서 무너졌다. 나는 오늘의 나의 우울감과 때론 어쩔 수 없는 공황장애로 인한 막힘을 사랑한다. 나름 거침이 없이 살던 때를 돌아보면 그때에도 교회는 다녔고 말씀은 접하였으며 믿는다는 사람들과 어울리고는 했었다. 그때마다 모든 게 적당하여 ‘우리가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심사로 서로는 서로를 보고 위로를 삼았고 괜찮음의 정도를 측정했다. 성경은 적당한 적용과 예화로 오늘을 사는 데 유용한 책으로 전락하였고 기도는 아쉬움을 달래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정도에서 족하였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천국에 대하여는 그리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천국은 침노당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곧 우리 속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저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어디 신도시 아파트 분양권을 노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필사적으로 천국을 사모한 적이 있던가?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투자하며 살았던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그러니 결국은 복음이 약화되고 천박한 행복을 운운하며 이 땅에서의 기쁨을 선사하는 정도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절박함은 이 땅에서 사는 정도도 미치지 못하였다. 엊그제 친구에게 나는 대놓고 물었다. 그처럼 억척스럽게 노후 생활을 준비하고, 정년 후의 삶을 꾸려두면서 정작 너의 사후생을 위해서는 무엇을 예비하였나? 나름 자식들에게 물려줄 집이나 지식에 대해서는 그처럼 기를 쓰고 살았으면서 정작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는 무엇을 하였나?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천국 시민이라면 그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애통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수련의 강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필수적인 삶을 제시하신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삶이 아니라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말이다. 이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준비한 기름이 다 떨어지면 등불을 어찌 밝힐 것인지를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 앞에서 하나님이 흩으시고 분노하심을 보았다. 나름은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았고, 교회를 다녔고, 성실하게 살았으며, 그것으로 일간 남부러울 게 없을 삶이었을 터인데… 이제 겨우 아홉 살 난 아이의 입에서, ‘엄마아빠에게 나만 없으면 행복하였을 텐데’ 하는 소리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는 책망이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어느 훗날 우리 나름 열심을 다해 살다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일이겠나? 그야말로 맑게 갠 하늘에 이 웬 날벼락이람? 그러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다들 참 할 말이 많다. 주여, 주여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한들…. 열심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나름은 성실하게 산다고 살았건만 우리의 적용은 저급할 따름이고 주를 향한 마음은 조악할 뿐이며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에서는 인색하기만 하였다. 하다못해 동기들 모임에 나가는 정도보다 못하게 주 앞에 섰었고, 우리의 기도는 항상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정도로 족하였다.
언제 한 번쯤 가만히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인 적이 있던가? 그러기 위해 모든 걸 멈추고,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고 위한 적이 있던가? 오늘 본문을 점검하게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억장이 무너져 본 적이 있었던가? 나 같은 게 뭐라고, 지푸라기만도 못한 나를 위해 영존하신 하나님이 그와 같은 대가를 치르셔야 했는지! 왜 감사가 없나? 왜 감동이 없을까? 나는 왜 주의 은혜에 감복할 줄 모를까? 이는 자신을 돌아보며 통회하고 자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늘 그럴 때면 변명하는 아이처럼 억울함만 올라온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싶은. 자기 말에 겨워 주의 말씀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죽어라 하고 기도는 열심히 하고 살았는데 온통 다 나의 바람뿐 한 번도 우리는 주가 내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판단으로 속단하고 예단하고 판단하며,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신 28:67).” 그러면서 나름은 열심을 다했으나 성경은 이를 악하다 하신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사 57:20).” 이를 적당히 무마하고 아무도 모르게, 또는 자신을 외면하며 나름은 필요에 따라 주를 찾고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붙들고 산 셈이니,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1).”
종종 누구의 체험을 듣는다. 저의 간증이 남다르다. 한데 이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체험이란 주관적이고 이를 느낌은 감정적이며 더욱이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 말씀으로가 아니면 일시적일 뿐이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의 뿌리 깊은 감정으로 인하여 비틀리고 왜곡되어 저마다의 하나님을 섬긴다. 다들 그 속에 자신들의 산당이 있다. 자기 좋을 대로 제사를 한다. 성경읽기와 기도하기가 수포로 돌아가는 까닭은 성령으로가 아니어서이다. 성령으로란 나의 형편과 사정으로가 아니다. ‘어떠하든지’의 영역이다. 어떤 날은 항우울제를 여러 번 먹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왜 그럴까? 하고 다그치지 않는다. 곧 나의 일에 너무 애쓰지 않는다. 이처럼 새벽에 일어나 평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서너 개의 안정제를 삼킨다. 더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다.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흐릴 뿐이다. 어떠하든지 나는 나에게 더하신 한 날의 삶에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는 고백으로 족하였으면 좋겠다(시 118:28-29). 더는 자식의 일로 또는 가정의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어찌할꼬?’ 하지 않는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러므로 주만 바랄 수 있다는 데서 오히려 나의 약함이 강함이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다들 저마다의 최선으로 좋은 것을 찾아 나서지만, 아이엄마도 나름은 대기업이나 아이를 위해 휴직하고 어디 용한 소아심리병동이나 이름 있는 학원을 알아볼까 하는데… 고작 우리의 대책이란 게 내가 어찌 해볼 요량뿐이니. 친구의 말마따나 굳이 문제를 위한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면 애써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겠나? 그래서 술 한 잔에 위로도 찾고, 보다 학적인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문제를 더 꼬이게만 할 뿐이다. 누구는 기껏 명문여대에 들어간 딸아이가 졸지에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을 못하는 우울증에 빠졌다. 일 년 열두 달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 듣지 못해 가슴을 친다. 또 누구는 연대 물리학을 하다 집안에 틀어박혔다. 저의 부친은 재력가라 명성 있는 의사를 찾고 상담사도 붙였으나 강박적범불안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왜? 뭐가 모자라서? 하고 윽박지르며 대성통곡을 한들.
아이의 강박은 모든 사물이 거슬린다. 몇 시간씩 공들여 정돈을 하고 청소를 했는데도 어디가 삐뚤어지고 그 위에 그새 먼지가 앉았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이도 죽을 맛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다른 아이는 몸이 까부라지는가 싶은데 18층 아파트의 자신의 방바닥이 주저앉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런저런 저들의 사연을 듣고 아이 일로 눈물짓는 저들에게 아이의 문제가 아닌 당신의 문제라고 해도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회개는 없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것인가? 평생 열심을 다해 살았다. 역정을 내거나 감정이 상해 돌아간다. 그리고 어디 용한 의사나 병원을 찾다, 저마다의 신당을 찾는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를 문제로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저들의 병든 영혼의 문제였다. 나의 말이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 너는 그래서 목사가 돼서도… 하며 나의 오늘의 문제를 들먹거리며 욕을 하였다. 그러게 말이다. 한데 나는 이제 나의 문제로 문제를 풀려하지 않는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곧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1).”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이 말씀하시게 들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시게 입 좀 다물어야 한다.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내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묵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단언하건대 천국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곳이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곳이다. 이를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정작 그러한가?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교훈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시민으로 사는지를 가이드 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이다. 말하시는 하나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폴 트루니에는 이를 위트 있게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여 묵상하였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 이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여 성경은 억지로 풀 게 아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즉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이에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15-16).” 고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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