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잠언을 읽고 자기 삶에 연관 지어 글로 쓴다. 어떤 말씀이 마음에 걸려 그것으로 연상되는 오늘의 이야기를 묵상한다. 아이의 글을 읽으면 자기 자신을 분석한다는 게 주신 삶을, 말씀을 묵상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오늘 말씀에 일러,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히 8:11).” 이를 가르침은 그 속에 주를 앎이다. 그러한 변화가 궁여지책의 하나로 그리 하면 좀 도와주실까, 하는 ‘흥정’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와 흥정의 대상이 되시곤 한다.
가령,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 도망쳐 은둔해 있던 모세를 찾아오셔서 저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셨다(출 3장 후반). 그때 모세는 자기 생각을 말한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1).” 저의 우려와 회피하는 마음을 주님은 아셨다. 저에게 이적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명하신다. 저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시고, 저의 손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다. 그러한 놀라운 증거 앞에서도, ‘저는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 하고 모세가 아뢴다(10-14).
모세: 저는 혀가 둔하고 말 재주도 없습니다.
하나님: 누가 그 입을 지었냐?
모세: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하나님: 네 형 아론이 있으니 가라.
우리가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말씨름을 한다. 의심도 하고 반론도 하고 자기 의견도 굽히지 않는다. 우리가 논쟁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 알수록 이와 같은 철없는 흥정은 감히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나는 아이의 묵상글을 사랑한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자신의 일상들을 돌아보고 말씀으로 근거를 삼는다는 것. 처음에 내가 묵상글을 시작하게 된 게 실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잠언으로 묵상을 시작한 것은 여러 다양한 교재를 가지고 성구를 찾고 문제지를 풀듯 하루에 한 장씩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내가 먼저 시들해지는 거였다. 한 달 31일, 잠언 31장. 그날 그 날짜에 맞춰 무작위로 읽어도 될 격언의 말씀이 적합하였고, 안 믿는 아직 믿음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탈무드’의 근간이랄 수 있는 지혜서로 소개하고 시작하였다. 나 역시 몇 해는 그리 매달 매일 하루에 한 장씩 어떤 구절의 말씀으로 나의 일상을 반추하여 글로 쓴 것 같다. ‘잠언으로 자기분석 글쓰기’라는 거창한 구호를 붙이고 아이들과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창세전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시고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저는 변하신 게 없고 변하실 수 없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러한 분이 오늘 나 같이 보잘것없는 것을 상대하신다. 입씨름도 하신다. 흥정도 하신다. 백 번 천 번도 양보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누구의 글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저가 씨름하고 있는 한 날의 수고를 응원한다. 누군가 나의 날을 두고 그리할 것을 나는 안다. 나야말로 기도에 빚진 자로 산다. 내 가족은 물론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소돔성이 멸망되기 직전에 롯을 생각하셨다. 베드로 사도가 저를 의인이라 일컬었으니 저를 의인가보다 하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도대체 저의 행실로나 살아가는 행태로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러한 저보다 못한 나를 주께서 의롭다 하심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이에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로 저의 글보다 뚜렷한 이유는 또 없다.
내가 버릇처럼 누구에게 글을 쓰기를 권하는 것은 우리 안에 주를 앎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가 보인다. 저의 음성이 들린다. 내게는 그러했고, 내가 아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하였다. 모세의 흥정에서 그게 나였음을 인정하고, 롯의 터무니없는 짓거리에도 나 역시 다르지 않은 것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도 돌이키신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7-8).” 그뿐이신가? 돌아오면 그 뜻을 거두신다.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26:3).”
누가 누구를 속단하겠나? 나 같은 것도 참고 기다려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나는 누구의 글을 읽으며 응원한다. 저가 쓰는 글은 고스란히 나의 기도가 된다. 오늘은 저 아이의 글과 또 누구의 사연과 어떤 이의 기도부탁 내용을 들으며 쩔쩔맨다. 고작 예닐곱 명도 안 되는 내 곁의 사연을 두고도 나는 이러한데, 큰 교회를 시무하고 숱한 사람들을 건사하는 이들의 마음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이에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나는 경외함으로 아뢸 뿐이다.
우리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사연과 어쩔 수 없음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이는 오늘 말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이를 위해서도 주께서 나의 고통을 감내하신다. 진통 효과가 떨어지면 몸은 아우성이고 나는 주께 토로한다. 때론 하나님이 무심하신 듯 외면하고 계신 것에서 정작 주의 관심을 알기도 한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불쑥 내 앞에 두시는 어떤 이로 인하여 나는 주의 사랑을 목격한다. 두어 해 전, 한동안 찾아오던 아이가 있었는데 저 애는 손목을 긋고 자주 자해를 하다 정신병동에도 입원을 했던 여자아이였다. 저의 외로움은 부모의 열심 때문이었고, 억척스런 부모의 삶은 그 부모의 지겨운 궁상으로 인한 것이었다. 손목을 긋고 자칭 동성애라고 고백하는 아이에게 나는 그저 목석같은 존재가 되었다. 뭐라 이르지 않았고 그래서 뭐? 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마치 모든 걸 쏟아내듯 아이엄마가 먼저 며칠 간격으로 몇 주간 찾아와서 몇 시간씩 있다 가더니 후에 딸애가 와서 꼭 석 달을 그리하다 갔다. 그때 난 뭘 했나? 생각하면 한 게 없다.
한 게 없는 게 나의 한 일이었다. 한참 후에 그걸 깨달았다.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냥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 이렇게 있다 보니, 인연이 다 됐겠거니 생각하던 아이가 새로 연결이 되었고, 나는 다시 저의 이야기를 듣고 읽는다. 내가 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겠나? 싶은 누구의 애끓는 사연을 읽으며 나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고 앉아 저의 글을, 이야기를 읽거나 듣다 주의 이름을 되뇐다. 어느 훗날 저들도 나와 같이 그럴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를 같이 읽고 듣고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나도 내가 이러고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저들도 가끔은 놀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말리겠나? 모세는 입씨름을 하듯 하나님과 흥정하다 졌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17).” 결국은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내가 맞서 싸우는 것 같지만 아니었다.
이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출 4:18).” 저는 주의 말씀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도 하란을 떠났고, 야곱도 라반의 집을 떠났다. 우리가 안주하던 곳에서 하나님은 길을 떠나게 하신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읽으면 이렇게 정리가 된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이를 바울의 음성으로 다시 들으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내 몸이 아플 때 이와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편안하고 괜찮을 땐 들지 않던 생각으로, 아프니까 손이 자꾸 간다. 어르며 주를 생각한다.
주께서 나의 생을 어찌 함께 하셨나? 우리로 생각하기 참 좋은 시간은 아플 때다. 힘들 때고 외로움에 지켜 손목을 긋고 싶을 때이고 그만 살고 싶을 때이다. 나는 내 곁의 저이들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나를 사랑하셨던 주의 사랑이다. 내가 저 아이를 뭐라고 사랑하겠나? 오래된 사이의 아이에게는 돌려 말하지 않아서 좋다. 난 널 믿지 않는다.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나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어디 이게 한두 번인가? 나나 너나 닮았다. 묵묵히 듣는 아이에게 그러므로 같이 주를 바라자, 애써 주를 바라자, 하고 말하였다. 나의 말은 간절하였고 두려웠다. 실은 내가 누가 어찌 될까봐 지레 겁을 먹곤 한다. 오죽하니 누구를 만나면 똥이 마렵다.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곧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라고 한다면 주님이 하시라. 나의 사랑은 빈약할 뿐 언제 시들하여 지겨워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 15:29).” 저가 나의 하나님이시다. 고로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히 8:1).” 그는 나의 대언자가 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어느 훗날 내가 전능자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은 벌하실 수 없다. 나를 벌하시는 것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확신으로 누구를 사랑한다.
이에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이와 같은 말씀 때문에도 하나님은 오늘도 내 편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허리를 비틀고 앉아 통증으로 찡그린 얼굴을 하고도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56:9).” 이처럼 내가 보는 것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가 듣는 말씀을 저이에게 보여주고 싶다. 우리로 사랑하게 하심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사랑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와 같은 말씀 하나로 이미 충분하였다.
그렇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부디 나의 남은 생이 흔들림 없이 그러하여서,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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