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전봉석 2021. 8. 1. 05:31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인 상태’는 모두 중독이다. 토요일 오후, TV를 통해 무료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을 보았다. 마약에 중독되었다 헤어나려 애쓰는 버스킹 뮤지션의 이야기다. 청소년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우연히 시작하게 된 마약, 그로 인해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고 길거리를 떠돌다 길 고양이 ‘밥’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을 회복해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어떤 슬픔 혹은 고통이 주는 충격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무엇에 중독이 된다. 약물에 빠지는 것만이 아니라 일에 대한 중독, 사람에 대한 중독도 무시무시하다.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중독의 위험이 도사린다. 우리 믿는 자들의 아홉 가지 열매라 할 ‘성령의 열매’는 그 의미를 묵상할 때마다 왜 절제를 맨 뒤에다 두셨는지를 알게 한다. 절제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감정을 억제한다. 그와 더불어 갈망을 증대시켜 주를 바라는 데 열중하게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는 우리 안에 주의 영,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데 따른 결실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하지만 그 사랑도 절제가 없으면 집착이 된다. 집착은 어떤 것이 마음을 빼앗아 늘 거기에 쏠려 있다. 이를 정도가 넘치지 않게 조절하고 제한하는 것이 절제다. 성령의 열매는 그렇게 사랑이 앞에서 우리를 견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리고 절제가 맨뒤에서 밀어간다.

 

희락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중추적인 감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오늘 우리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희락은 곧 향략이 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쾌락은 충동적인 감정으로 욕망의 충족으로 온다. 사는 데 따른 즐거움을 그런 느낌에 두면 이는 점점 헤어날 수 없는 늪 같이 빠져든다. 오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성경은,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4).” 결국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중독이다.

 

화평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안정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이다. 저마다 자신의 바람과 요구가 있기 마련인데, 지나치게 화평을 모색하면 변질된 평화주의자가 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용납한다. 종교적 화합을 도모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도모하려 들 때,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이로써 바벨이 되었다. 절제가 없는 화평은 애매한 박애주의자나 그릇된 화합으로 치닫게 한다.

 

오래 참음은 인내다. 오늘 말씀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로 주의 약속을 받는 데 따른 필수적인 덕목이다. 내일 아침에 묵상하게 될 11장의 모든 믿음의 영웅들은 오래 참음으로 ‘더 나은 것’을 바랐으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그 삶이 비록 고단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그런데 이와 같은 인내도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에 사로잡히게 한다. 곧 주 안에서 절제가 없는 인내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념과 믿음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다.

 

자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닮아가는 것으로 자기보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자비는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게 한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4).”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하지만 앞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30).”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절제다. 절제하지 못하는 자비는 무책임한 허용과 방임이 된다.

 

양선은 남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앞을 양보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로 남을 비판하지 않고 이해하며 관용을 베풀게 한다. 곧 스스로 삼가 저를 헤아리는 마음을 더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이에 절제가 없는 양선은 자신의 일을 회피하는 변명의 구실이 된다. 양선은 엄연히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 미덕이지만 절제가 따르지 않는 양선은 자신의 사명과 의무를 회피하는 구실이 된다.

 

충성은 맡은 자의 기본자세다. 진정으로 우러나는 정성으로 섬김의 최고봉이다.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의 충성이다. 지혜서에서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동력이 진정한 마음으로의 충성이다. 이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그런데 절제가 없는 충성은 건달들의 의리나 전쟁에서의 무자비한 복종만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자칫 충성보다 무자비한 비행도 없다.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예수의 마음의 결정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간다는 것은 점점 더 온유하여져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맡기신 바, 오늘의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을 안다. 한데 절제가 없는 온유는 맹물 같은 사람을 만든다. 타고난 성품이 온유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칫 방관과 무관심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절제하지 않는 온유는 그 어떤 잔인한 성품보다 차갑다.

 

마지막으로 절제는 정도가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는 한계를 지정한다. 바울은 일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를 지혜자도 일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3-14).” 왜? 저는 알고 있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15).” 절제를 절제하지 않으면 완고한 사람이 된다. 자기고집과 아집을 신념으로 둔갑시켜 이를 또 믿음인 줄 안다. 절제에 절제를 더하지 않으면 ‘악으로 깡으로’ 산다.

 

영화 한 편을 보다 문득 중독이 주는 무서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아침, 우리로 이뤄가는 성령의 열매 또한 절제가 없으면 그 모든 게 중독이 되어 끔찍한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더하시는 듯하다. 그리하여 지혜자는 우리의 절제가 주를 경외함으로만 가능하다는 데 주목한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아니면 우리의 수고로 이루는 성령의 열매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사랑이 집착이 되고, 희락이 쾌락이 되고, 화평이 그릇된 타협이 되고, 오래 참음이 무던한 사람을 만들지만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자비가 방임을 낳고, 양선이 자기만족을 부추기며, 충성이 무분별한 복종을 낳고, 온유가 흐리멍덩한 타협주의가 되게 하고, 절제가 자기 아집이 되기 십상이라.

 

이를 오늘 시편은,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우리의 모든 수고와 애씀이 헛되고 헛되다.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돌볼 때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내가 어찌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이 자칫 절제 없이는 중독이기 쉽다. 절제는 우리로 항복하게 한다. 주 안에서 우리의 항복은 굴복하는 굴욕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최선의 투항이다. 자신이 내세우던 모든 의로부터, 선으로부터, 나름의 애씀과 수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더욱 배가시킨다. 이에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내가 애써 수고하는 것으로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이는 곧 우리의 소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나는 무엇보다 이 시간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것은 이와 같이 말씀으로 말씀이 이끄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이는 어느 농부와 같아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곧 나의 이 시간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과 비례한다.

 

주일 아침, 주께서 더하시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권하기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