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전봉석 2021. 11. 14. 05:0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9:16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 82:8

 

 

악인도 악한 날에 쓰신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가만 보면 세상 그 무엇도 ‘어쩌다 거저’ 생겨난 것은 없다. 이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 버릴 게 없이 하는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곧 우리에게는 말씀과 기도의 사명이 있다. 바로도 바로의 일을 할 뿐이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곧 쓰임 받은 후 버림당할까 두려워하였던 바울의 심정을 알겠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불신앙적인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을 자신하지 않음으로 주 앞에 항상 돌아보아 말씀과 기도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겠다.

 

말씀이 말씀으로 이끄실 때 나는 새롭다. 이를 누구에게든지 알게 하고 싶은데 그래서 말을 하고 권하며 안쓰러워하는 동안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우리의 만남과 그 시간을 허락하신 이의 뜻을 알게 하고자 나름은 여러 말을 더해본다. 글쓰기와 책 읽기가 억지로 되는 게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의 시간과 생활 속에서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어찌 누가 말로다 알게 할 수 있겠나? 하는 둥 마는 둥 오면 그만두겠다고 일렀다. 이제는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 억지로 애써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말하고 또 말하기를 여러 번 할 뿐 더는 그 속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어서… 실은 내가 넘겨짚어 ‘어떤 슬픔’을 끄집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우리의 영혼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어서 이를 남이 캐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은 슬픔보다 잔인하고 심각한 감정이다. 오늘 날 우리 모두는 상실과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 한 마디로 우울하지 않은 영혼이 없다.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시 88:2, 6-7).

 

시편은 우리 감정의 보고다. 모든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여 오늘의 내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곧 우리가 누구에게 무슨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토해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편한 대상이 되신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9-10).

 

마치 하나님을 조롱하듯 버릇없이 덤비고 따지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래도 되는 대상이 되어주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3-14).

 

어떤 희망을 잃었을 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절규가 저절로 나온다(전 1:2). 저는 회의하여 말하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3-7).

 

세상은 과거를 추억하고 믿는 우리는 미래를 추억한다. 소망이 없으면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소망을 이루는 것이 환난에 의한 것이었으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래서 어떤 헛됨, 그 부질없는 일을 두고도 그 안에 소망을 바라게 하시는 것이었구나!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이루신 것이 소망이겠다.

 

누구를 대할 때, 어떤 일을 마주하고는, 더는 이 일을 계속 해서 뭐하겠나? 하는 마음이 들 때의 허탈함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나름 냉정했던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을 오래 가르치면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얘는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을 때면 가차 없었다. 그게 옳은 줄 알았다. 몇 번 알아듣게 주의를 주고 그래도 어려울 것 같으면 아이엄마에게 통보하고 그만두게 하였다. 나름은 더 나은 곳을 다니게 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이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저 한 영혼을 주께서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가, 하는 일에 대해서이다. 그때라고 왜 상한 심령이 없었겠나? 그때 그 시절 그 아이들의 가정이라고 모두가 온전하였겠나?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러는 것을, 나는 그런 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누가 묻기를 네 곁엔 왜 죄다 ‘그런 사람들’만 있냐? 하는데, 그것보다 무심하고 냉혹한 말은 없는 것 같다. 저의 곁이라고 어찌 그 영혼이 모두 온전하겠나?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은 하나님이 행하셔야 하는 일을 대신 하게 하려 하심인데 내 양을 먹이라, 하는 말씀의 의미와 같이,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2-3).” 그러라고 오늘도 내게 저를 보내셨다. 뒤집으면 저에게 나를 보내신 것도 된다. 곧 우리로 서로의 곁을 같이 하게 하시는 것이다. 아이와 같이 있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학원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는 일에 돈벌이로나 삼았다면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더는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면서부터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와도 수업 전에 기도부터 한다. 싫어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나를 찾아온 것은 나를 만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데 확신을 두고서부터이다. 그래서 누구와의 만남에서든 대화로 시작하려고 일부러 그리 어색하게 구는 까닭도 그리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책임을 성령께로 전가하려는 마음에서다. 또한 누구에게는 이런저런 일을 함께 공유한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수 있는 동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를 말할 때 누군 그저 흥미로운 사건(?)으로 듣고, 누군 그 일(?)의 특수성에만 관심을 둔다. 그런 자와는 공유가 어렵다. 실은 그러는 저는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 일, 어떤 사건을 ‘남의 일’로 여기면 더는 같이 나눌 수 없는 사이다.

 

가령 아주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가 생일 선물로 케이크를 카톡으로 보내고 전화를 하였다. 뜬금없기는, 웬 이린가 하여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통화를 하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서로 너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가 전부이고 그것마저 몇 마디 묻고 답하다 어색하였다. 넌 좀 어때? 하고 친구가 묻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게 고작 ‘늘 똑 같지 뭐!’ 하는 회피성 말이 전부였으니! 그렇게 둘도 없이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친했다고 친한 사이였는데, 어쩌다 우린 서로의 말을 잃어버린 것일까? 기도 제목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사이가 되면 남도 아닌 친구도 아닌 이상하게 서로 잘 아는 어색한 관계로 전락한다. 서로의 관심이 서로 다른 데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너스레를 떨듯 몇 마디 말을 더 거들다가 통화가 끝났다. 지혜자의 권면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 4:9-10).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의 교제란 서로의 문안이 주의 일을 염두에 두고서이다. 곁의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서 서로가 가도를 의뢰하며, 그 사연을 나누고 같이 짊어지는 사이다. 주께 아뢰며 합력할 수 있다는 게 하나보다 둘이 나은 복이다. 그렇지 않은 사이는 빈말이 고작이다. ‘친절한 타인’으로 서로는 친한데 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선에서만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형식적으로 웃는다. 서로 피해가 없도록 마음 쓰는 정도에서, 그런 마음으로는 주의 사랑을 충분히 나눌 수 없다. 상대적으로 ‘친밀한 관계’란 불편하다. 저로 인해 내가 더 힘들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란 저의 짐을 대신 내 등에 지는 것이라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성도란 저의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서로 나누며 주께 아뢰고 맡기는 사이다. 나의 것을 저에게 덜어서 기도를 부탁함은, 저의 문제를 내 입으로 성령께 아룀은 자기가 자기를 위한 기도보다 그 효과가 더 빠르다. 인디언들과 성도의 차이는 그걸 자신들이 지느냐, 주께 함께 맡기느냐 하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11-12).

 

나는 가끔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나의 기도를 누구에게 떠넘기지 못할 때이다. 물론 내가 내 기도를 아뢴다. 그러면서도 기도의 동역자란 둘이 서로를 따듯하게 하는 사이다. 목사가 되고부터 싫든 좋든 남의 말을 자꾸 전해 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이를 같이 나누어 공유하고 같이 중보하며 같이 주께 아뢸 수 있는 사이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다. 그럴 수 있겠다 하여 누구에 대해 기도를 부탁했는데 저는 잊는 경우, 며칠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할 때, 그러면서 늘 자기 일로다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면 맥이 풀린다. 우리의 관계는 결코 ‘친절한 타인’으로가 아니다. 그럴 거면 가장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은 전화상담원이다. 고객응대서비스에 따라 어찌나 친절이 처벌처벌한지. 나만 그런가? 그런 친절에는 기계적인 반응만 느껴진다. 네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들려야 한다. 누구 이야기를 마치 나의 일처럼 주께 고하는 것, 그것도 은사다.  

 

그저 자신을 잘 돌보며 자기 식구끼리 오순도순 잘 살다 오라고 우리를 주의 자녀로, 제자로 삼으신 게 아니다. 그럼 뭐 굳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도 그만큼은 산다. 나는 오늘 시편을 그런 시선에서 되새겼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가끔 아내와 나는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의 사정을 두고 기도한다.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은 기도할 줄 모르는 저 아이와 그 부모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맏는 부모의 얼토당토 않은 관심으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하여 대신 주께 아뢰는 일… 누가 알겠나만 하나님이 이를 들이신다. 누가 나를 찾아오고, ‘어찌 할꼬?’ 하고 죄의 괴로움으로 신음할 때, 내가 뭐라고 저의 문제를 해결하겠나? 그런 게 아니라, 주께 아뢸 줄 모르는 저를 위하여 대신 먼저 아뢰고 고함으로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의 합심기도이다. 그래서 안 오면 마는 것이지만! 오게 하신 이가 오게도 하시고 가게도 하실 일이고, 나는 다만 저로 속상해 하는 것은 기도할 줄 알게 하시기를. 저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기를. 이를 알게 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시인의 통탄도 그러한 게 아닐까? 이제 나는 내가 누구를 사랑함에 있어서 주의 이름으로,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겁부터 난다. 내 앞가림도 못가리는 주제란 걸 내가 더 잘 안다. 그래서 다들 지 코가 석 자인데도 누가 누구를 위해 기도함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일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도 내 곁에 두시는 이를 위해 기꺼이 먼저 저를 아뢴다. 이는 성령님께 대신 짐을 지우는 일이다. 기도와 말씀으로밖에는 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교횔 왜 나가고 하나님을 왜 믿겠나? 그러느니 산 좋고 물 좋은 절간이나 더 나은 다원주의로 사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속세의 모든 집착을 떨구고 무념무상으로 사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자기 일로만 기도에 기도를 더하는 자는 그 영혼이 함몰된 것과 같다. 자기 일만 고하고, 그 필요만 요구하는 기도는 기독교라는 이단과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울보다 종교적인 왕이 어디 있었나? 죽으면서까지 이방인의 손에 죽을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이 얼마나 숭고한 정신인가!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남의 슬픔이 나의 고통으로, 그리하여 이를 주체할 수 없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나누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는 복되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1-2).

 

조금만 둘러봐도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상한 심령으로 쩔쩔매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은 ‘너와 나’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시키는 일이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그 한계가 종교적일 뿐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나 자기 기독교나 뭐가 다를지는. 오늘 시편은 이를 구분하여 알려준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2:6-7).

 

다 쓸모없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