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 80:12-13
우리의 감정이 이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한다는 신호다. 화가 또 슬픔이, 짜증이 또 설움을 나를 뒤흔드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그의 귀한 사명을 받은 자임을. 그런데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함으로 남과 같이, 남보다 못한 처지로 자신이 자신을 괄시하며 사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면 주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줄을 모르고, 자신을 업신여기면 남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런 우리로 우리의 현실을 알게 하시려고, 오늘 시인은 포도나무 한 그루로 자신을 비유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시 80:8-12).
아무나 들락거리는 마음은 길가밭과 같은 마음이 된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 13:4).” 말씀이 뿌려져 소망이 있는가했더니, 그 마음이 길이 되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누구나 밟고 지나다녀, 우리 마음의 완고함이란 스스로가 단단하게 굳힌 것 같으나 실은 여러 사람이 함부로 여겨 그리 된 것이다. 곧 우리는 애굽에서 옮겨온 포도나무 한 그루 같아서 주께서 이를 가꾸셨다. 하여 그 가지가 뻗어 튼실해졌는데 담이 허물어지면서 지나가는 모든 이가 이를 마음대로 따게 하셨다.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할 때 남의 손을 탄다. 그뿐인가?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 80:13).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이를 마음대로 취급한다.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하신 말씀,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잠 23:10).” 스스로를 경계하지 못하면 허물어진 담으로 온갖 것들이 드나든다. 쓸데없는 염려와 근심이 쉴 새 없이 꼬인다. 오지랖도 과하면 병이라고, 그러니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라,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4-15).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를 남의 손이 타지 못하게 하여주시기를…. 절망은 외로움에서의 도피다. 자신을 외롭게 하는 것이 자신일 때 절망은 그 깊이가 더욱 짙다. 그래서 절망은 내부의 갈등조차 거부한다. 우리가 흔히 무기력하다고 할 때 이보다 무서운 외로움의 끝은 없다. 이를 악랄하게 이용하는 것이 현대 사회를 잠식해버린 게임 같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들 게임에 미쳐간다. 서넛이 같이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가상세계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 같다. 광고가 모든 시대를 대변한다. 화장품과 게임의 세계가 점령했다. 자신을 꾸미는 일이나 스스로를 가상세계에 방치하는 일이 동일한 듯하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서러움과 외로움이 사랑을 갈구하는 데서 오는 자기 절망인 것을 알았다. 절망은 점점 서로의 친밀감을 차단한다. 자기 세계로 이끈다. 각자의 외로움에서 저마다의 성을 구축한다. 가상의 현실이 현실에서의 가상이 되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두고 서로가 각자 씨름한다. 그게 무서운 것은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지 못하고 나아가 서로를 경멸한다. 경멸은 서로의 친절을 역겨워한다. 잘해주는 덴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더는 값없이 사랑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점점 어려운데 점점 싫지가 않다. 절망의 끝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다.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 바울은 그런 우리를 질타하듯 꾸짖는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어쩌다 어른이 된 것처럼 어쩌다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처럼 수동적이고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논리의 지배를 당한다. 이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할 때 밖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닌 자기 안에서부터의 공격이 일어난다. 그것은 수치심이다. 더는 친밀감을 원하지 않는다. 사는 게 지옥이라도 이를 거부할 수가 없다. 스스로 구축한 성에 갇힌 신세다. 이때 불의한 분노가 인다. 순간적으로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으로 세계를 평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은 승리한 듯하다.
하여 야고보 사도는 단호하게 전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아이의 실수나 ‘그럴 수 있는 사소한 잘못’을 두고 훈계한다. 훈계에 감정이 실리면 응징이 된다. 어린 것을 세워두고 몇 시간째 같은 말이 이어진다. 아내를 대하는 데도 다를 바가 없다. 윽박지르고 아이 앞에서 모욕한다. 자신이 재판장으로 굴림하여 저들의 과실에 대해 언도하듯이 판결한다. 말씀은 이를 중지시키시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 이러한 상황은 스스로의 세계에 갇힌 자의 망상과도 같다.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족함이 없을 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이와 같은 불의한 분노가 불일 듯 일어난다. 아이를 벽에 세우고 반성을 강요한다. 아내를 핀잔하다 모욕감을 더해준다. 분노는 공격으로 발산된다. 만족함이 없다는 것은 저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이고, 불안의 불씨는 무력감에서 온다. 가만히 아주 잠깐만 자신을 돌아보아도 자기 안에 ‘어린 자신’이 그러는 것을 볼 수 있다. 저가 화가 난 것은 지금의 일 때문이 아니었다. 실은 누적된 '어린 것'의 자아가 이를 조종하듯 기억조차 닿기 어려운 아주 어렸을 적의 외로움, 무시와 경멸, 차가운 시선 따위 들이 한데 뒤섞여 오늘의 자화상을 형성했다. 그것으로 자긴이 옳은 줄 알지만 실은 불풀이다. 복수에 의한 처절한 응징이다. 능욕당한 '어린 자신'을 위한 잔치다.
이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말만 듣고 내가 내린 누구에 대한 결론이다. 이 모든 상황은 동정의 한 면 같아서 이쪽과 저쪽이 다르다. 같은 동전을 두고 서로 다른 쪽을 본다. 나는 그림을, 상대는 금액을 알리는 숫자를, 그래서 둘 다 옳은데 틀리다. 들어보면 저이의 말이 이이의 말이고, 이이의 말이 저이의 말이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한다. 이상하지? 그 값은 동일하게 치른다. 서로 감정이 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서로의 안에 악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일컬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 결국 다른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산다. 그러든가 아니면 둘 다 똑같은 값을 물어가며 엉뚱한 소릴 지껄어대던가. 말씀은 이미 우리 마음에 심어놓으신 것인데, 이를 뒤로 미루거나 앞으로 당기거나. 애굽에서 옮겨 온 포도나무는 그렇게 다 익었다. 추수할 때가 가까울수록 달려든 해충으로 난리도 아니다.
그러니 어쩐다?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화는 모든 감정의 찌꺼기와 같다.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 분도, 그 안에 말 못할 서러움도, 실은 쌓이고 쌓인 자기의 '어린 것' 그 유년의 못다한 말의 분풀이의 일종이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이를 벗어내는 일은 살갗을 도려내는 일처럼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아심으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6:26).” 어쩔 수 없이 또(!) 그러했다 해도 하루 동안에 불어야 한다. 한데 불의한 분노는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가령 당연히 아이를 나무라고 훈계해야 할 때도 저를 마치 하나님 앞에서 예수를 대하듯이 해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27)." 그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밖에 다른 수가 없다. 사탄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 곁에서 틈을 엿본다. 우리의 감정의 문제는 그만큼 가벼이 여길 게 아닌 것이다.
이를 까발려야 해! 하고 나는 누구에게 말하였다. 저는 자신이 어렵게 말한 ‘자기 이야기’가 누구에게 알려질까 두렵다. 나는 그것까지도 훌훌 털어내듯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고, 이에 좋은 방식이 글쓰기인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고 그 전후사정을 서술할 때 더는 뒤주 속에 감추어진 어둠 같지 않다. 어릴 때는 양지바른 곳에 쌀을 넣어 골고루 햇살에 펼쳐놓았다. 그럼 눅눅한 쌀 속에 숨어 있던 쌀벌레들이 스물스물 기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주의 빛이 우리 안에 들게 주의 뜰에 자신의 이야기를 널어야 한다. 어둠에 갇햐 있던 자기 이야기에 빛이 들게 해야 한다. 여전히 살아서 좀 먹고 있는 어릴 적의 감정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로의 ‘기도부탁’이 실은 말할 수 없는 저의 이야기를 들추어 주의 뜰에 너는 일이다. 같이 나누고 이를 두고 같이 기도한다는 것은 그 역사하심이 크다.
누가 내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에 대해 뜬금없이 고마움을 쪽지로 알려왔다. 저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후에 말히길, 단지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게 전부라면 가망이 없다. 해결이 안 된다. 아니, 굳이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된다. ‘어떤 위로’는 세상에 널렸다. 그 가운데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가장 대표적인 게 게임이다. 현실을 도피하고 부정한다. 절망과도 타협한다. 더는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저에게 일러 나는 ‘너의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나도 생각날 때면 기도하겠으나 '자기 이야기'를 듣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그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기다리시면서. 결국 우리 안의 불의함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모든 감정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신호다. 못 기다리고 불쑥, 튀어나오는 게 감정이니까.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시 109:1-3).
왜 하나님한테 고하지 않아? 하고 나는 누구에게 물었다. 하나님께 아뢰지 않은 말을 사람에게 흘려대니 자꾸 사람 앞에서 울지! 저의 동조를 얻으려고!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아무리 친밀하다 해도 돌아서면 자기 문제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사람이다. 지 코가 석 자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담을 허무신다. 아무나 들락거리며 아까운 열매를 탐하게 하신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시는 것일까? 누가 물어서 나는 서둘러 말해주었다. 기다리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더딘 것 같으니까. 사람의 빠른 호응과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은 착각은 마치 한 잔 술은 금세 알딸딸하여 혼곤해지는 정신 같다. 해결된 것처럼 착각을 주며 다 풀린 듯 헛소리를 해댄다. 그러니 기도한다고 해결이 되겠나? 하는 마음을 허물어버리시는 것이다. 무너진 담을 지나 사람들이 드나든다. 저들이 밟아댄 마음은 길가가 된다.
사람에게 물린 사람들이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TV 앞에서 혹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게임 속 가상세계는 역동적으로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다! 잘은 모르는데, 요즘은 서로가 게임을 하면서 대화도 하고 문자도 하고, 가상이 현실과 혼동되어 어디가 실제인지 분간이 어렵다. 여기가 내 마음인지, 누구라도 드나드는 문인지, 길인지, 한데 뒤섞여버렸다. 그럴 수 있겠으나 목사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
나는 누구의 이야기에 우려를 표시하고, 다음에 올 때는 신랑과 같이 와! 하고 말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질러버린 것이다. 어쩌자고? 언제까지나 저의 시름에 덩달아 들어주기만 하는 일은 끝도 없겠다 싶어서, 성경공부하자! 하고 다시 일을 벌였다. 순간 겁이 난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도 있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한데, 안 올 거야! 하는 생각이 더 컸던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마음 뒤에는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더 컸다. 도대체 내가 뭘 어쩌겠다고 저를 오라 한 것일까? ‘에이, 설마’ 하고, 슬그머니 하나님께 되물었다. 나의 의심은 주 앞에 붙들려 그리 말할 놓고는 혼자 고민에 빠졌다. 누가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이유는 있었다.
먼저 저의 불의한 분노가 아내와 자식의 고유한 선택권을 침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그것은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서 오는 우월감으로, 실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딱 그랬다! 저의 이런저런 모습이 예전의 나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불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올 것 같지도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질러버린 것도 있지만 나의 어리석었던 시절,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살던 날들에 내가 나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던 짓을 그대로 기록된 영상을 보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려서 말이지! 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였다. 이를 다 까발려야 한다. 저가 자신의 처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내가 나의 허물을 발판으로 오늘 누구를 대하고 위로하고, 그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다소 놀란 듯 듣고만 있는 누구에게, 다음에 올 때 신랑더러 같이 가자고 해! 하고 말하고는, 이를 위해 기도해줘! 하고 부탁하면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5-16).
앞의 ‘그들’ 가운데 내가 있었고, 주의 힘을 노래하는 오늘의 나도 이제는 나였다.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 되심을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실은 저도 애쓰는 것이다. 그걸 안다. 나름은 아내나 아이에게 잘하고 싶은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게 우리 안의 자신, 자기의 '어린 것'이 여전히 응어리진 마음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대하는 데 욱, 하는 건 실제 자기 모습이 보여서다. 아내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것은 사랑하고 위하는 방법을 그렇게 알고 있어서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여기는 것은 그 부모의 사과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자신의 말에 자신조차 괴로운 것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용서를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이 땅으로, 여전히 자신으로 사는 한은 나름 한다고 하는데도 번번이 또 그런다!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9:21-22).” 아, 그러니 사랑하면 할수록 사는 게 지옥이다. 고달프기만 하다. 이를 곁에서 같이 하는 게 지치니까 게임에 몰두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괴물이 되어서 사랑을 한다. 아내는 그런 자신에게서 고통을 느낀다. 아이는 자신을 곁에 두고도 아빠를 그리워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담장이 무너져 포도나무 가지가 길가로 뻗어났다. 아무나 들락거리는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질 리 없다. 그럼 그이랑 같이 와서 뭐해요? 하고 묻는 누구에게 “성경공부하자!” 하고 말한 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밖에는 무슨 말을 더한들? 오늘 시편은 이에 답한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 80:5).
이를 통해 지난하게 몸에 밴 습성을 직접 목격하게 하신다. 그러자니,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6).
우리 안에 드는 회의감으로 주 앞에 세우시고, 우리의 실상을 목격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2-13).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두 손 들고 주 앞에 엎드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4-15).
그런 걸 알면서 여태 방치하고 아무렇게나 살았던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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