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출 12:29-30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하나님의 보복은 가차 없다. 두렵고 섬뜩하다. 그만큼 길고 지루할 정도로 참고 기다리셨다. 우리로 죄를 알게 하시려고, 정의를 실현하심으로, 두려움도 주신다. 수치와 부끄러움과 조롱도 불사하신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나훔 3:5-7).” 스스로 자처한 일이다.
번복하기를 열 번째, 드디어 저들 모든 첫 번째 것을 죽이셨다. 이는 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이 다 한 날 한 시에 죽었다. 그 밤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다. 결국은 그리 되었다. 그리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렘 4:25-26).” 기어이 일이 그렇게 되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된다. 그러기까지 하나님의 참고 또 참으심은 스스로 조롱을 감수하셨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7-8).
누구에게 주의 뜻을 전하고 긴박함을 알리면 저마다 농담으로나 듣는다. 그러려니 여기며 되레 믿는 자들을 타박하며 주를 조롱한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 27:30-31).” 자신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증언하기를,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3-25).”
말씀 앞에 나를 앉히면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형통과 불통은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이는 주를 더욱 알게 하시려고 때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내어주시듯 조롱거리가 되게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죄가 없으신 이가 죄인이나 지는 나무에 달려 저주 아래에 있게 하셨다. 이를 허용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으로 저주를 당하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인데, 그래서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요 며칠은 유난히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려웠다. 안 되겠다 싶어 아이의 퇴근 때를 맞추어 나는 먼저 병원 근처로 산보를 가서 오후 진료 접수를 하였다. 점심시간이라 날은 따듯했고 사람들은 부산하였다. 아이가 혼자 거기까지 찾아올 수 있어 그것도 용하고 다행이었다. 같이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잠깐 저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도 하고 싶고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리를 이리저리 돌려 말하였다. 곧 그럴 수 있을 거라 말해주었지만 마음 한편이 휑하니 안쓰러웠다. 같이 좀 걷다 아이를 먼저 돌려보내고 나는 병원으로 올라갔다. 늘 같은 말뿐인데,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을 속수무책이게 한다. 같은 약을 받아들고 나는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 마음을 편히 가져라, 하는 말은 하나마나 한 소리다. 교회로 올라가 아이가 잘 돌아갔는지 확인하고 소파에 누웠다가 일찍 귀가하였다. 어떤 우울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는 것, 아이의 미래도 그렇고 나의 이런저런 사정도 그렇고… 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오전 근무만 하는 아이를 불러 같이 점심을 먹여 돌려보낸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이가 일하는 곳이 교회에서 한 정거장이라, 저는 목사님밖에 친구가 없어요! 하는 말이 가슴을 한 편을 시리게 한다. 어떤 어려움,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유익을 더하게 하시는 것을 믿는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시 119:71-72).
이를 알게 하고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 이생의 즐거움으로가 아니라 고난으로였다. 아이는 성경 일독과 필사를 마치고 다시 신약을 시작하여 하루에 예닐곱 장씩 쓰고 또 쓴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런저런 사연과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가 누가 있을까? 그 와중에 누구는 주를 바라고 누구는 자신의 의로 더욱 완고하여 간다. 기어이 바로는 무너졌고 저의 왕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때론 우리로 두렵게 한다.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가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7-28).” 하나님은 기어코 주의 일을 감행하신다. 그때에는 아무도 이를 번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를 나의 이해로 다시 읽는다면 세상과 함께 내가 영원히 정죄 당하느니 오늘에 고통이 나로 살리신다. 한 발 더 들어가면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사망이나 고난을 비웃으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이런저런 어려움이 때론 나로 의기소침하게도 하지만 그것으로 나는 내 곁에 두신 아이를 생각하고 누구 일을 곱씹으며 주께 아뢴다. 오전에도 누구의 전화를 받고 저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며 그 염려와 우려를 위로하였다. 때론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모순 된가? 자기 앞가림도 어려운 사람인데, 엎친 데 덮친 저의 사연을 놓고 그 일의 의미와 주의 행하심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이 내 일이라. 내게 두시는 어려움이 나로 이처럼 깨닫게 하심을 이제는 부인하지 않는다. 적당하던 때에 나는 이를 알지 못했다. 어째서 나의 약함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거하신다는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제 이 말씀을 사랑한다. 이를 보다 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이 놀라운 역설의 역설이 성경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하시는 일이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내어주기까지, 성부께서 성자를 십자가에 달아 저주 아래에 두시기까지. 그 사랑의 의미는 참으로 깊고도 넓다. 이는 곧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기며 나의 나 됨을 도리어 자랑할 수 있게 하심이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오늘 내가 당하고 겪는 어려움이 전부가 아닌 것을 두고, 오늘 시편은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곧 오늘 나에게 행하시는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하여,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0-11).
아니면, 이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 병원에 다녀오면 이런저런 어려움을 두고 저들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로 실망하고 좌절하게 할 때도 있지만, 말씀은 위로하신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2).
결국 여기, 이 땅에서의 일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저주는 하나님의 유기다. 그리 내버려두시는 방기다. 그로 인한 오늘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곧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하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결국은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이를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운운하며 하나님의 순리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그러니 참 겁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다들 당하기 전까지 저들의 완고함으로 그 고집을 자신도 못 이기는 것이어서, 결국은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 12:29-30).” 이에 대하여 성경의 증언은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욥 21:30).” 그러니 어쩌겠나?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더욱 주를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그리 말해주고 그 말은 곧 나에게 들려주는 말로 받았다. 이에,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 85:10-11).
이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로 어렵게 하는 우리 각자의 연약함으로였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가득하심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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