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13:22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다 늙고 병든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뒤섞여 복잡한 상황이 없는 가정이 없다. 문득 누구와 연락이 닿으면 저의 이런저런 사연에 놀라고 나이가 들어 어느새 늙어간다는 데 놀란다. 그러한 고통과 사망을 하나님은 당연하게 여기시고 오히려 장려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삶의 애통은 우리로 주께 눈길을 돌리게 한다. 우리의 새로움이 거짓말 같이 빛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55).” 예전의 내가 아닌 데 놀란다. 그리고 놀라게 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신 이가 이 ‘착한 일’에 대하여 책임지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늘은 목사 내외가 올까? 하고 주의 하시는 일을 가만히 생각하다, 갑자기 친정에서 김장을 하게 되어 못 온다는 사모의 연락에 순간 그럼 목사 혼자 올까? 하고 또 다른 생각이 혹은 기대가 하루 종일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어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는 더러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외롭지 않고 어찌 기도를 하겠나? 혼자 두지 않고 어찌 말씀 묵상이 가능하겠으며, 누구 일로 마음에 남아 그것으로 볶이지 않고 어찌 중보가 되겠나? 마음에 두지 않고 사랑을 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온통 신경이 쓰이고 미열이 있는 듯 온몸이 같이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만히 앉지 않고서 어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겠나? 누구에게 마음이 쓰인다는 것은 주께서 그리 두시는 일이라, 이를 맡은 자로 사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사명이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하시며 세 번씩이나 번복하여 말씀하신 까닭은 저가 세 번 주를 부인한 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것도 모닥불 앞에서 부정을 했고, 후에 찾아오셔서 이를 확인하고 다짐하게 하셨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7).”
어찌 이 일을 감당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오늘 본문은 우리로 알게 하신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2).” 주께서 나를 돌보심이 영영히 떠나지 않으신다. 이를 삶으로 삶에서 알 때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기도제목으로 서로를 그 마음에 두고 산다. 가끔은 힘에 겨워 누구의 일로 앓는 소릴 할 때 잊어버려, 털어버려, 하고 누구는 위로할 수 있지만 저로 마음에 두고 씨름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랑이겠나? 자꾸 생각이 난다.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볶인다. 그럴 때면 내가 조금만 더 강해서 아주 의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이 일을 감당하면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어 주께 아뢰지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니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온 우주를 품는 일처럼 복잡다단한 일이다. 저이가 어찌 힘들어하나? 하고 들여가보면 그게 어찌 저이 한 사람만의 일이겠나? 그 부모와 부모, 일과 사람과 숱한 관계가 뒤엉겨 있어 사연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것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우리의 참 사랑은 역설이다. 친절하기는 쉽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러려니 하고 두고 가는 길은 외따롭다. 돌아서면 그만인 사이는 타인이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이를 주께서 두시는 마음으로라면 찢기고 뜯겨 저로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이 주가 명령하신 삶이다. 곧 오늘 우리가 성찬예식에 참예함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7).”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저의 떡과 잔을 받음인데, 이는 주의 살과 피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또한 누군가에게 뜯기고 씹혀 먹혀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8-29).” 곧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저의 영혼을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저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일인데, 나의 말과 행실은 물론 내내 마음이 시달리며 저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하심이었다.
어제는 내차 그런 생각을 하였다. 늘 마음은 다중적이어서 좋았다가 싫었다가, 기대하였다가 우려하였다가, 기쁘다가 근심하다가… 그러니 이를 감당하는 데 있어 의연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 마음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주님도 그러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우셨고, 병든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로 마음이 어려우셨고, 성전을 훼손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셨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두려워하셨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의연한 마음으로는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누구를 두고 생각할 때 저가 올까, 안 올까 하는 마음에서부터 어떤 일을 두고는 이를 어찌 이루어 가려 하시는가? 하고 묻고 또 묻기를 숱하게 한다. 그러할 때 나의 약함은 나의 수치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시 44:15-16).
한데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바라고 부르짖는다니,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83:16-18).
그러니 오늘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이를 피해 적당한 거리에서 사람을 대하고 한 영혼을 저만치 떨어져 ‘친절한 타인’으로 삼는 일은 한가로운 일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 사탄이 그리 원하는 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마귀 스크루테이프 삼촌이 조카에게 들려주는 얘기다. ‘저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린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하도록 둬. 그러다 점심때가 되면 잠시 자리를 떠나 평소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게 두면 돼. 그럼 저는 금세 잊고, 세상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굴러간다는 데 위안을 받을 테니까!’ 곧 우리의 사소함이 우리로 아무렇지 않게 옛생활로 돌아가게 한다. 여전히 세상은 잘만 굴러가고 사람들은 평화롭게 잘들 살고 있으니까!
우리의 수치가 주를 찾도록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평소의 사소함이었다. 이는 환상처럼 달콤하다. 또는 남 탓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일로 치부하지 않게 한다. 수치심이란 도출된 자신의 부끄러움이다. 이를 더 깊숙이 숨기거나 남들도 그렇다는 듯 타협하게 되면 더는 손쓸 수 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흔히 ‘다 그러고 살아!’ 하는 마음이 그래서 큰 위로인 듯하나 우리 영혼을 마비시킨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반응은 ‘나도 그렇잖아?’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 아니, 실은 더 심각할 수도 있지!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당부 또 당부하시고, 앞서 제자들을 앉히고 축사하시사 떡과 잔을 자신의 살과 피로 승화시켜 먹으라 하심은 그 때문이다. 수치는 우리로 다른 무엇을 숭배하게 한다. 자식, 가족, 자신의 취미, 선호하는 일, 종교적인 행위, 거룩한 마음까지도 동원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게 찾게 하는 일에 방해를 한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시 97:7).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못한다.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사 44:16-17).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이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 굳이 뭘 꼭… 하면서 저에 대하여, 저를 내 곁에 두신 이에 대하여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수치심을 내 안에 일으키신다. 수치는 슬픔보다 약하다. 아픈 게 더 빠르다. 수치는 느낌이고 슬픔은 현실이다.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돈 앞에 장사 없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목사도 여자와 돈 앞에서는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저의 영적인 문제는 고상하나 현실은 잔인하다. 슬픔보다 수치를 느끼는 게 쉽다. 수치심으로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지만 실은 경멸보다 배고픔이 우선이다. 세상에 우아한 신앙은 없다. 거룩한 성배를 마시고, 엄숙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해도 사람은 사람이라… 내남없이 용빼는 재주 없다. 한편으로는 누가 오길 기도하면서 한편으론 누가 오지 않길 바란다. 누구로 인해 주의 이름을 부르다 누구 일을 뒷전으로 미루기도 한다. 내 코가 석 자라. 말씀 앞에 외따롭지 않으면 한 영혼을 사랑하기가 환상처럼 가볍다.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사 42:16-17).
그래서도 나를 돌아보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의 수치로 주 앞에 송구해하고 고게 숙여 아뢰어야 한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18).
이는 주를 온전히 바라는 일로, 외롭지 않고 어찌 공부가 되겠나? 요즘에 나는 아들이 시험 준비를 하면서 혼자 싸우는 모습에 숨 죽여 응원하고 기도할 뿐이다. 일체 말을 걸거나 무슨 참견도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 땅에서의 어떤 시험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도 이처럼 자기와의 싸움이 치열한데, 영혼의 문제를 두고 한가로이 오면 오고 말면 말고, 하는 식의 태평함으로야 어찌 맡기신 사명을 다할 수 있겠나? 하다못해 책을 읽어도 조용히 혼자 좀 떨어져 있어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에도 평소 즐기던 오락을 피하고 손에 습관처럼 들고 있는 핸드폰도 내려놔야 하는 게 마땅한데,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는 게 아니라면 그게 어찌 사사로운 일일 수 있겠나? ‘내 살과 피를 기념하라’ 하실 때에 이는 곧 나도 누구에게 뜯기고 부어지는 삶으로 흉내라도 내야 하는, 그리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면 어찌 감당이 되겠나? 그러니 이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할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그리하여 그 수치심-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고한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오늘 말씀은 길라잡이다. 앞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내 앞을 비추신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출 13:21).” 그저 나는 앞만 보고 나아갈 뿐이다. 누구에게도 그리 일렀다. 오고 안 오고, 일이 되고 안 되고는 주가 하신다. 다만 나는, 그 자리에 머물고 함께 있을 뿐이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22).” 그리하여,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86:3-4,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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