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전봉석 2021. 12. 14. 05: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출 39:42-4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주를 경외하고 이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자이다. 이 일을 정의로 행한다. 흔들리지 않으며 이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5-6).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의 일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다. 막무가내로 닥치는 현실과 같아서 그때마다의 선택이고 행동이다.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에 따른 열매로 우리의 됨됨이는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28장에서 언급한 제사장의 옷에 대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간단히 정리하면 가장 속에는 고의(28:2)를 입었다. 우리나라의 고쟁이와 같다. 두 번째로는 속옷을 입었는데(39-40), 곳은 통으로 되어 발목까지 팔은 손목까지 내린 긴 옷이었다. 베실로 짰다. 셋째는 그 위에 띠를 띠었다(39:29). 네 번째는 에봇받침(22-26)으로 속옷 위에 걸치는 옷으로 에봇을 달기 전에 입는 옷이었다. 다섯 번째로는 머리에 관을 씌웠다. 그 위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을 새겼다. 여섯째로는 에봇이다(2-7).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며졌다. 일곱째로 판경 흉패를 걸쳤다(8-21). 12지파를 나타내는 12개의 보석을 달았고 다른 한 겹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을 넣는 주머니가 있었다.

 

비로소 성막과 제사장의 옷이 완성되었다. 성막은 금 1톤이 들어간 엄청난 무게의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하였더라.” 하는 표현이 아홉 번 나온다. 이는 전적인 순종이다.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우리 삶의 곳곳을 간섭하신다. 주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일에서든 주께 묻고 이에 답하는 형태의 생활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이고 이를 준행하는 삶은 은혜이다. 주가 선별하여 세우신 주의 종, 목사를 인정하고 주가 거하시는 성소, 교회를 인정하는 일은 성도로서의 기본이다. ‘여호와께 성결’이란 더욱이 오늘 날 이와 같이 어지러운 때에는 우리의 가는 길을 제시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울려나는 소리가 어떠할까? 성경의 출발은 하나님께 성결한 삶에서다. 한 보 한 보 그 걸음마다 거룩이 딛어진다. 디딤판이 거룩이라면 발돋움은 은총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악의 모양이라도 버린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2).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성결이 막연한 게 아님을 알리신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예복을 만들고 이를 정교하게 짜서 입고 주의 일을 수행하는 일, 신약을 살며 우리 모두의 사명이고 사역이 되었다. 흔히 보통 은혜라 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골고루 내리시는 햇살과 바람과 일상의 평범함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행 14:16-17).

 

우리로 주의 자녀답게 살게 하심은 특별은혜로 이뤄진다. 어제 누구의 전화를 받고 저의 글쓰기에 대한 열의에 나는 주의 관여와 주목하심을 주의하였다. 얼마든지 나는 나의 지난날 부끄러웠던 일을 고백할 수 있다. 이는 염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나의 허물과 죄악에도 주의 은혜가 어떠하셨는가를 자부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선뜻 드러내기는 어렵다. 애써 잊고 살았던 아픔일 수도 있고 남모르고 감추고 살았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더는 개의치 않는 까닭은 주의 은혜가 어떠하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인데, 그럴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의 부끄러움 따위, 죄악된 모습 따위, 허물과 실수투성이 따위에 끌려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곧 누가 묻기를 어떻게 하면 맛깔스러운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데, 나는 나의 ‘날것’을 과감하게 가져가 그것으로 요리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나의 날것이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어떤 슬픔이나 부끄러운 과거다. 이것이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회개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개는 내 안의 죄를 들춘다. 드러난 상처는 치료함을 받는다. 감추고 여전히 동이고 싼 것은 아무렇지 않은 듯하나 썩고 문드러져 악취를 낸다. 자신은 몰라도 그래서 허영과 허세로 세상은 유행이 지배한다.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괜찮은 척, 좋은 척, 다 아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모든 ‘척’과 ‘체’가 우리 영혼을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 잘난 체, 있는 체, 좀 아는 체 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자신을 자신도 모르고 산다.

 

거죽만 남은 사람들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작 자신도 열어보기를 두려워할 따름이다. 글쓰기에 대해, 그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남에게 보이는 나는 열에 아홉이 꾸며진 허상과 같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여러 사람의 웃음과 슬픔과 말과 행실은 그래서 위태롭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서부터가 꾸며진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순간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면 연예인들의 자살이 파생하는 효과는 엄청나다. 대중은 저의 겉만 보고 좋아할 따름이다. 이에,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0-14).

 

그저 우리는 먼지뿐임을. 자신의 실체를 바로 알 때, 과거의 상처 따위로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상으로 오늘을 출렁거리지 않는다.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확신은 나야말로 지난날을 떠올리면 울화와 침통함과 억울함과 어떤 끔찍한 원망이 득시글거린다. 모든 인생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누군들 그 안에 분함과 원통함이 없을 텐가. 그러나 이를 가지고 누구는 주께 찬송이 되고 누구는 여전히 건드리기만 해도 심한 통증을 호소하듯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에게 글쓰기란 그와 같은 자신의 과거, 덮어둔 카펫을 들추는 일이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성급히 말하면 모든 명작이란 소설이나 영화나 음악의 배경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하는 정의로 명료해진다(롬 13:1). 때론 저가 부당하고 옳지 못한듯하나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 이를 통해 주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 심지어는 악한 날을 위하여 악인도 쓰신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 16:4).

 

그러니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 아니다. 지혜자의 말은 이를 누누이 강조하고 나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9).

 

이를 바로 알 때 나의 어두운 날들까지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주께서 그것으로 어찌 사용하시려는가, 하는! 믿음의 결단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에게 그리 설명을 드렸다. 얼추 나이가 들고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서 글쓰기에 대해 희망하는 것 같은데, 남들이 다 보고 다 느끼고 다 아는 것으로는 감동이 없다. 글쓰기의 세 축인 묘사, 진술, 설명 가운데 흔히 무의식적으로 설명을 선호하게 되는 까닭은 자기 이야기를 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으로 남들 다 아는 선에서 적당히 채워가는 여백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태풍이 한 번 지나가듯 속이 한 번 뒤집어져야 비로소 자기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마주할 수 있다. 막연한 감사는 하나마나한 소리와 같다. 진정한 감사는 통회와 함께 드러난다.

 

전에 글쓰기를 가르칠 때는 도식화되고 정형화된 글로 서술형 문제에 답을 기술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그 너머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어떤, 내밀한 자기 이야기가 진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의 느낌이나 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겉만 핥는 내용으로는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 정작 이를 위해 탄식하시는 이가 계셨으니 성령이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8).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 둘의 일이다. 정작 모든 이야기의 연결과 연결은 너와 나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1-22).

 

이와 같은 말씀을 오래오래 입에 머금고 있다 삼키면 그것이 우리 안에 썩은 부위에까지 도달한다. 묘사는 이를 더욱 생생하게 돋보이게 하는 실력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3대 원칙은 묘사, 진술, 설명이 한데 어울려 맞물리고 얽혀 지면을 채우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두고 스스로의 연약함-부끄럽고 송구하고 염치없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령은 우리의 그 연약함을 친히 감당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27).

 

그러니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이 실은 얼마나 큰 은혜이고 은총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결국 지혜자의 함축된 격언은 그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잠 16:1).

 

나는 생각하고 또 말하고, 신중하고 또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 모든 응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여 나는 권할 뿐 강요하지도, 강요할 수도 없다. 전적인 행함은 우리에게 더하신 자유의지, 이를 주께 양도함으로 주가 행하게 하심으로 나를 맡김으로였다. 그러니 사람의 일도 하나님의 일도 영적으로만이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느닷없는 누구의 전화, 어떤 소망, 그에 따른 나의 하고 안 하고 하는 결정은 이제 어려울 게 없다. 다시 말해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기도도 없다. 나는 누가 왜 그 지경인데도 기도하지 못하고 왜 그처럼 아등바등 자기가 애써 수고하느라 보리새우처럼 등이 휘었나 했더니, 맡김과 내려놓음도 성령이 그리 하셔야 가능하였다. 그러니 나름 기도한다고 했다는데 이뤄지는 일이 아니도 없으니 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3).

 

이 간단한 진리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아니라고 뻗대는 동안은 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일은, 보리새우는 끝내 자기 등짐에 눌려 자기 등 안에서 죽는다. 모든 생을 마치고 주 앞에 섰을 때 나와 너의 모습은 어떨까?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출 39:1).” 부디 그러하기를. 그리하여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이것이 나의 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 있기를. 결국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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