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전봉석 2021. 12. 16. 05:29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1:13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처한 상황과 형편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차이는 있겠다. 소나 양이나 새를 가지고도 드렸다. 모두 그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전가하였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4).” 속죄는 전가된 죄를 대신한다. 죄책감과 눌림, 죄로 인한 영향들과 그 어두움을 걷어낸다. 이제 이 일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의 특정한 일이 아닌 우리 모든 믿는 자의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전가하지 못하고 여전히 짊어지고 사는 것들에 대하여, <천로역정>의 기독도와 같이 그 여정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고달프기만 하다. 곧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못한 등짐은 고스란히 자신이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다.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고 그에 따른 결과인데 그걸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주께 맡기겠어요?’ 하는 누구의 말에 나는 경악을 했다. 그리고 문득 의외로 우리 믿는 자로 산다고 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진 듯, 이와 같은 순간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삶은 이중으로 고달프다. 안 믿는 자로 사는 일이면 훨씬 홀가분하게 살 텐데. 믿기는 믿는데 안 믿는 자의 그것과 믿는 자로서의 자책이 이중적이어서 짊어진 무게가 너무나 엄청나다.

 

그러한 누구와의 대화 그리고 오늘 아침의 말씀, 그에 따른 상관관계가 참으로 기묘한 듯 느껴진다. 이때에 나를 붙드시는 한 구절의 말씀이었다.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먼저는 그 내장을 비워야 한다. 정강이를 쳐 무릎을 끊어야 한다. 이를 불살라 번제로 드려야 한다.

 

내장을 비운다는 것, 그 속에 들어찬 온갖 분노와 서러움과 저주와 갈등과 미움과 시기 등. 이는 모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데서 주워 삼킨 별미들이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무슨 의미일까? 우리 안에 모든 감정의 기준은 남들과의 비교와 대조로 나누어진다. 비교는 서로 비슷한 것들로, 대조는 서로가 다른 것들로 엮여 있다. 비슷할 때 동질감도 느끼고 그것으로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것 때문에 견주어 마음의 다툼이 인다. 다른 것에서 이질감이 느껴져 적개심을 갖는다. 가령 누구를 의존하려는 욕구는 저와의 엇비슷한 상태에서 가까이 더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르듯 사람은 각자의 손금처럼 개별적이다. 어느 한 사람도 같을 수 없다. 다르다는 데서 생겨나는 갈등은 수만 가지다. 그것으로 아군이 되고 적군이 되고, 이편저편으로 갈린다.

 

정강이를 쳐 부러뜨린다는 데는 스스로 딛고 서는 것의 좌절이다. 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기쁨의 삶으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고 홀로 외따로이 견뎌야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길이 좁고 그 문은 협소하다고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런데 누가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옮겼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언젠가 누구는 힘쓴다. 어떤 필요를 느끼고 힘쓴다. 그런데 아무히 힘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 주를 따른다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를 ‘힘쓰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를 구하여도 그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란 말씀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믿는다고 다 믿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신앙고백으로 무임승차하듯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슨 의미일까?

 

누구와의 대화에서 기도해라, 기도해야지! 하고 말하면 저도 (신기할 정도로 모두 다) 자신들도 기도한다며 억울해 한다. 마치 내가 잘난 체 한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이다. 한데 그럼 구한다고 구하며, 기도한다고 기도하며 산다는 소린데 왜들 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일까? 구하라, 찾으라, 두르리라, 하고 주시겠다잖았나? 왜 그럴까? 먼저 살필 것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하여, 지혜자가 한 말이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전 5:1).

 

즉 기도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로 규정하였다. 그러할 때 우리 발, 내가 딛고 의지하고 밟았던 것을 삼가라는 경고한다. 나름의 온갖 헌신과 봉사, 한다고 하였다는 어떤 자부심들 그것이 우리로 우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악을 행하는 일과 같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4).

 

서원은 단순히 말해 기도한 것이다. 먼저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할 때의 서원은 기도한 것이 있거든 갚으라는 것이다. 그 마음에 주를 바라는 모든 소원이 우선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의 하루가 주 앞에 온전하기를,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주를 나타내는 삶이되기를, 그렇게 바라고 아침마다 기도한다. 그럼 그리 행하라는 것이다. 말로만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라는 것이다. 헌금은 인색하고 주를 섬기는 마음은 넘치는 듯 호들갑을 떤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짧으면서 늘어져 TV 앞에 또는 게으름으로 안주하는 데는 능하다. 그냥 막연하게 감사한 것이다. 하다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도 감사의 표시가 있기 마련이다. 선물을 준비하거나 돈을 건네기라도 한다. 약소하나마 마음을 표시하려 든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왜 그처럼 우리는 인색한 걸까?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가곤 하는 것은 아주 오랜 습관 때문이다. 또는 다른 어떤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갚기를 더디게” 한다.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우리 걸 받아서 뭐하시게? 어른이 애 손에서 막대사탕을 받아 뭐하시게? 이는 우리 때문이다. 줄줄 알아야 받을 줄도 안다. 드릴 수 있어야 더 큰 걸 바랄 수도 있다. 스스로도 말하길 ‘작심삼일이에요.’ 하며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호소하던 누구에게, 그 정도로 덜 급한 것이라 단언하였다. 살만한 것이다. 죽겠다면서 늘어져 여전히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하는 이유는 솔직히 아직 덜 죽겠는 것이다. 정말 죽겠어봐! 악, 소리 난다. 체면? 내 자존심 따위? 명색이 존중 받아야 할 어떤, 자존감? 당장 죽겠는데 그럴 여유가 어딨나? 그러니 성령으로밖에는 뭐가 위중한지 모른다. 우매한 자들은 이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당장 먹을 게 있고, 살만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서원한 것을 갚으라!” 하고 재촉하신다. 이는 분별 있게 좀 살아라! 하시는 꾸지람이다. 경고다. 기도해야 하고, 그 시간을 얻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과연 나의 심령이 상한 것은 아는지, 통증이 오기까지 우리의 자각은 무뎌져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못한다. 고통이 닥치면 우린 그 고통이 완화되고 치유되기만을 구한다. 고통이 가리키는 근원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제도 누구에게도 지금 당장 뇌를 열고 암 덩어리를 떼어내야 할 뇌종양 환자가 두통약만 찾고, 잠시 머리 아픈 것만 가시면 좀 살만하다고 고집부리는 형국이라 일러주었다. 저들 부부를 주의 사역자로 삼으신 이를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닌가!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그게 아니면 지금 목사가 또는 사모가, 사모이면서 전도사가 그 타령에 그 짓거리에 그런 불안과 불만으로 서로들 견제하며 사는 게 전부일까?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언사는 겸손이 아니다. 아주 끔찍한 교만이다.

 

하물며 목회자로 산다면 어느 한 영혼을 맡았다는 소린데, 안 두렵나? 나 하나 개판 치고 말 일인가? 저 영혼은 나 때문에 골병드는 게 아니겠나? 하물며 안 믿는 자들과 어울리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아니 저들과 더 친밀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참 이상한 일이다. 정작 문제가 뭔지 저들은 알지 못한다. 우선은 당장 자신들에게 두신 아이가 고통당하고 있다. 발달장애니 뭐니 하는 일은 차치하고 그 영혼이 황폐해져 가는 게 느껴진다. 성질은 점점 아빠 닮아 우악스럽고, 성향은 점점 엄마를 닮아 의존적이다. 그 고집에 그 집착을 어찌 감당하려고! 엄마와 아이 둘이 무슨 검사를 진행했는데, 아이의 불안 정도는 99, 엄마의 불안 정도는 100이 나왔다고 한다. 평균치가 30에서 70사이로 70 이상만 되면 높은 편이라고 하는데, 모자의 그 수준은 가히 심각 그 이상인 것 같았다. 그만큼의 의존성이 높다는 소린데, 둘 다 으르렁거리면서도 아빠 목사에게 의존한다. 그러니 독립을 꿈꾸고 자립을 장담하는 것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소위 말해 자유로운 영혼이란 그만큼의 무절한 삶을 의미한다. 제멋대로 산다는 소린데 이보다 더 끔찍한 삶이 있겠나?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5).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한 저는 결코 정강이를 잘라 불사를 수 없다. 그 속의 내장을 비워낼 수 없다.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가 귀한 것이다. 도대체 그럼 왜? 나름 기도도 하고 주께 순종하고 헌신하며 산다고 사는데도 그 모양일까? 다섯 가지의 이유를 찾아보았다.

 

첫째, 그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악하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

 

곧 그 기도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자신의 욕구와 갈망에 기인한 것이다. ‘바라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아서’이다. 늘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것은 주를 바람에서가 아니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그러면서도 사역자로??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러다 어느 훗날,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109:7).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더는 되돌릴 수 없을 때, 주 앞에 섰을 때, 그때에 심판을 받을 죄인으로 서야 한다니! 외려 저의 기도가 죄로 변한다니! 그러니 우리가 죽어서 모두 주의 앞에 섰을 때 억울한 호소가 사방팔방에서 울려날 것은 당연하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름은 억울하다. 애쓴다고 애쓰며 주를 따르며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며 살았던 이들이 수두룩하여 여기저기서 아우성친다. 일찍이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그러니 가만히 앉아 자신을 근신할 필요가 있다. 주여 주여 하는 그 삶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럼 그러고 있는 남편 목사를 말려야지. 주의 이름으로 싸워야지.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핑계다. 그걸 왜 자신이 해? 주께 이르고 또 고하여서 정신 차리게 해야지. 게임에 야동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행실에 가정에서 굴림하는 독재자로서의 행실을 뜯어 말려야지. 당당히 맞서 싸워야지. 차라리 갈라서거나 같이 죽거나 목회를 관두거나! 죽기살기로 덤벼도 모자랄 판에 두 모자는 저의 눈치를 보며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어떻게 하면 나아질까 하고 듣기 좋은 말로 하소연을 한들? 그러기를 10년째 아닌가! 나는 나도 모르게 역정을 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말씀을 입에 머금고 잠시만, 단 며칠만이라도 제발 침묵하시라. 그 입 좀 다물고, 그 마음에 이는 온갖 생각을 좀 멈추고, 주 앞에 차라리 죽고자 하고 매달려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들려지지 않는 이유 두 번째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 때문이다. 그러니 말이 많고 사람에게 고하고, 사람에게 위로 받기를 원한다. 거기에는 안 믿는 사람이라 해도 괜찮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왜 그럴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양복 깔끔하게 차려 입고 말쑥하고 번드르르하게 기도하기를 좋아한들? 무리들이 있으니, 모두가 사람을 의식해서다.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은 저를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며 귀히 여긴다.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며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가 꾸려져간다. 누구에게 저의 교회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늘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도 성도들이 담임목사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이었다. 또한 저의 말이면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올 것처럼 맹신적이다. 이는 저의 카리스마 때문이다. 남다른, 특이한, 뭔가 야릇한, 좋게 말하면 남다른 은사인데 이는 모세가 수건으로 자신의 광채나는 얼굴을 가렸던 것처럼 감추어야 하는 것이지, 이를 드러내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위에 굴림하려는 짓거리는 안 뵈도 악하다. 악한 이유는 저로 인해 성도들이 주를 뵙지 못한다.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니 별의 별 미친 것들이 다 있다. 성추행을 일삼고, 교인들을 하인 부리듯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혀를 놀리면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한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의 분별은 무슨 분별? 그저 수동적인 어린 아이들처럼 그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굴러간다. 저는 신이다. 하나님이 되었다.

 

세 번째로는 잘못된 간구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2-3).

 

우리 안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모든 악의 총체인 살인도 결국은 욕심으로 인한 것이다. 시기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툰다. 싸움이 멈출 날이 없다. 한데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하실 때 주께 구하고, 주와 씨름하고 주와 다투어야 하는데, 실제 하나님이 돈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자리를 보장할 것 같지도 않고 하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이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다. 가령 나도 내가 원하는 목사상이 있었다. 나는 목사가 되면 바라는 폼이 있었다. 신학만 마치면 뭔가 그럴듯한 교회? 성도들?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주실 줄 알고 그렸던 모습들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구해도 남들 보기 면구스런 목회와 남들에게 빙충맞은 목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아 어쩔 땐 은근히 화도 난다. 왜 나의 기도는 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넷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3-14).

 

이렇게 약속하시고선 어찌 들은 체도 않으시는가 했더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과연 나의 기도는 그런 내용이었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내가 바라던 교회, 목사상, 목회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나? 고개 숙여 고백하건데 그렇지 않았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누가 좀 알아주길 바랐다. 나도 누구처럼 ‘뽀대나게’ 목회를 할 줄 알았다. 결국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다섯째, 능력 없이 형식적으로만 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 28:9).

 

다시 말해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떠들기만 하려니까, 입만 나불거리는 목사가 는다. 가만히 골방에 앉는 기도는 없고 남들 앞에서 우쭐하며 화려한 언변으로 좀 나은 체 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간구하고 구하였으니 들어주시면 오히려 독이라, 달라는 대로 주는 게 저를 죽이는 것이어서이다.

 

오늘 말씀으로 나의 번제는 어떠한가? 드려지는 나의 향기는 어떠한가? 나의 내장과 정강이를 불살라 그 향기를 주께 올려드리고 있는가? 이를 다시금 점검하게 하신다. 누가 온다. 또 누가 오기로 했다. 나는 누가 온다는 데는 이제 별로 기대가 없다. 뭘 할까? 이제는 겁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데 확신을 두면 둘수록 저가 아이이든, 환갑이 훌쩍 넘은 어른이든, 난 모르겠다. 주께 맡기듯 나의 기도도 마구잡이다. 누구와 통화하면서 또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안타까우면서 동시에 지겹다. 저를 불쌍히 여기면서 한심하다. 위로와 역겨움이 함께 일렁인다. 안 그러려 해도 저 혼자 널뛰듯 하는 마음을, 어쩌겠나?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묻고 또 묻고 할 말을 내 입에 담으시라, 간구한다. 주가 필요한 영혼이라. 오죽하니 나 같은 자에게 저를 맡기시겠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나는 하나님만 바란다, 그러기를 기도한다. 저가 어쩌든지. 누가 뭐라든지. 부디 나의 남은 생이 그러하기를 또 빌고 바라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은 요동을 하니 어쩌겠나? 주께 또 고하는 수밖에. 이를 오늘 시편에서 나는 두려움으로 그러나 소망을 가지고 마주하게 된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해도 이를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저를 내 앞에 나와 같이 동행하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라면,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3-4).

 

그러므로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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