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전봉석 2022. 1. 4. 05:25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 20:26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 132:7

 

 

인생에서 감옥 같은, 더는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는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은. 한데 성경은 물론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감옥은 말씀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고맙다, 감옥아! 나에게 와주어서.’ 하는 존 번연과 같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이는 노년의 때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도 같은 고백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어느 누구보다 기독교 역사상 이룬 게 많은 저로서 이제 노인이 되어 감옥에까지 갇혔어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으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도대체 저의 푯대는 무엇이었을까? 먼저는 그리스도께 잡힌 것이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그 한 가지 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하여 저의 인생의 최고 목표는 예수시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0-11).

 

이를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 말씀이 아무나 누구에게든지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돌아보면 아주 어린 시절, 갇힌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외롭고 슬프고 답답하였던 순간, 어떻게 도무지 할 수 없는… 그때마다 나의 방어기제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혼자 울다 돌아서서는 허허, 웃고. 그런 나의 모습을 사람들은 좋아했고 저들로 나 또한 좋을 줄 알았었다. 이러한 상황이 없었던 인생이 있겠나? 삶의 곳곳이 지뢰밭 같았고 언제든 습습한 감옥에 혼자 갇힌 쓸쓸하고 외로웠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가장 황당했던 감옥이 목사가 되고 난 뒤였다! 희한할 정도로 모두가 증발하였다. 늘 곁에 있던 아이들이나 친구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는 그저 정신과적인 우울증으로 인한 느낌으로가 아니다. 실제 글방의 아이들도 모두 끊어졌다. 가까이 지내며 아이 일로 상담하곤 하던 엄마들도 ‘종교인’으로서의 목사가 된 선생이라 하여 아이를 글방에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도 아이들이 순간 다 끊겼다. 매일 나가 있던 글방이 순식간에 감옥이 된 것 같았다. 그때 그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을 나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니 나로서 할 수 있는 게 말씀을 보는 것이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 78:1).

 

바울 사도도, 존 번연도 이에 따른 세미한 음성을 감옥에서 들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성경을 펼쳐 읽었고 그때에 읽은 한 줄 한 줄의 말씀이 모두 간절하여 의미는 확장되었다. 이제는 확신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시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으신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돌아가 그 말씀을 입에 한 입 가득 물고 있을 수 있는, 고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그럼 그 말씀에 감추신 하나님의 섭리는 수수께끼 같이 펼쳐진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2-3).

 

그렇게도 들려주고 싶어 하셨던 말씀에 대해 나는 이제 부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다못해 운전하면서라도 들어라, 하고 매주일 설교원고를 녹음테이프에 녹음하여 여러 개를 복사하게 하였고, 이를 모았다가 종이봉투에 담아주곤 하셨다. 그때는 그 말조차 건성으로 듣고 차 어디 구석에 처박아두었다가 낚시터 어디에서 청소하며 한꺼번에 버리곤 하였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내 아이에게 또는 누구에게 말씀을 나누고 전하여 주고 싶은 심정이 그런 것일까? 이는 모든 부모의 사명이고 사역자라면 당연한 의무다. 저가 듣고 안 듣고, 읽고 안 읽고는 우리 책임이 아니다. 나에게 오늘까지도 내가 버렸던 아버지의 설교 테이프들이 영원한 사랑의 부채감으로 남아 나의 남은 생애 동안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되었으니까! 곧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말씀으로가 아니면, 이를 알 길이 없다. 주님의 시계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의무적으로 돌아오는 주일 원고를 미치 준비하며 초안을 잡는다. 본문을 읽고 그에 따른 내용을 찾아본다. 읽어 내려가는 성경마다 이것이 아주 오래 전 내 아버지의 설교 테이프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곁의 한 영혼,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며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다. 이는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믿는 자로서의 부모라면, 혹여 안 믿는 가정의 아이가 곁에 같이 있다면, 내 곁에 말씀을 들어야 하는 영혼을 두셨다면,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 78:4).

 

이를 먼저는 자손에게 알게 해야 하고(5-6), 나아가 우리에게 맡기시는 한 영혼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주의 사명을 다하는 일이었다. 이를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7-8).

 

그런 점에서도 나의 감옥은 축복의 자리였다. 말씀으로의 출구였다. 솔직히 나는 할 게 없어서 성경을 보고, 어느 교회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누가 만난 예수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는다. 오늘의 쓸쓸함이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걸음걸음마다의 평탄함이란 예수를 목표로 하는 푯대로였다. 가령 가끔씩 졸필이지만 먹물을 적셔 글자를 쓰는데, 먹물을 옮겨 담고 필사할 성경구절을 펴고 빈종이를 펴고 앉으면 마음이 새로워진다. 위에 적을 한 자 한 자의 성경을 읊조리고 되뇌어 옮겨 적을 때, 숨을 고르고 손을 가지런히 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는 글자 모양이 나온다. 그렇게 여러 장의 파지를 내는 동안 어느새 말씀은 입에 고여 맴돌고 손 끝에 맺혀 가지런하여진다. 이와 같이 혼자 있고, 고요한 시간이 감옥이 아니면 또 어디서 누릴 수 있는 호사인가? 그래서 나는 이제 혼자인 시간을 사랑한다. 세상에서 감옥이라 하나 외롭고 쓸쓸한 곳을 의미하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내밀한 만남의 장소였다. 그렇게 성경은 일러,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먼저는 자신이 말씀을 알고 가까이 해야 이를 자식에게 알게 하지 않겠나? 그 말씀이 살아서 삶에 나타나기를 스스로 체험하고 간증할 게 있어서 이를 아들과 그 손자에게 들려줄 게 아닌가? 우리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실 터인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나는 어렴풋이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존 번연과 윌리엄 쿠퍼와 존 뉴턴의 일대기를 읽고 있다. 18세기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 회개하여 목사가 되고, 누구보다 인자한 사람으로 목회를 하며 찬송을 지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존 뉴턴

 

윌리엄 쿠퍼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1763년 12월에 세인트 올번스 정신 병원에 갇혔다. 그런데 그 병원 병원장이었던 이가 코든 박사로 복음주의 신자였다. 저는 벤치마다 성경을 두어, 쿠퍼는 어느 날 그것을 처음 펼쳐 읽게 되었는데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이야기였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는 이야기에서 저는 감명을 받고, 이태 뒤 6월에 퇴원을 하여 고향 땅에 내려가 근처 가까운 교회로 간 곳이 존 뉴턴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였다. 일련의 상황 전개를 읽다가 모든 이야기가 이처럼 기묘하여 서로가 우연인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하나하나 서로를 끌어당기고 모여져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그 섭리에 합당한 스토리가 된다는 것에 놀라웠다.

 

세상에 파란만장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나? 지난 주에 다녀간 누구의 경우에도 들었던 저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고 들여다보면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는데… 늘 느끼는 안타까움이지만, 이야기 속의 주인공만 그의 앞날을 모른다는 것이다. 주어진 이야기에서 주의 살아계심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도 없다.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78:8).

 

말씀이 우리 곁에 이야기로 펼쳐진 것은 그 때문이다. 주어진 달란트로 충성하지 못할 때 저는 그것을 묵혀두어 쓸모없이 한다. 가장 큰 비극은 이를 잊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11).

 

돌이켜 나로 오늘을 살게 하시며 내 곁에 한 영혼, 누구를 마음에 담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이 귀하였다. 어제도 우연처럼 이제 다음 주부터 글방에 온다는 아이들 셋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내 손에는 간식으로 산 초콜릿이 들려 있었고, 나는 무심히 아이들에게 두어 개씩 나누어주며 눈인사를 하였다. 서로 낯선 터라, 아무 말도 없이 건네며 가만히 마주하게 되는 시선에서 나는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일까? 생각하였다. 앞서 듣기로는 모두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인데 그 부모부터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고 그 영혼이 모두 전멸한 상태처럼 교회를 등진지 몇 년째라 하였다. 심지어는 아이들 중 누구의 조부모가 목사님이시고 그 부모도 교회에 맡은 자로 직분을 감당해왔던 터인데, 코로나를 전후하여 신앙의 갈림이 너무나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는 실태였다.

 

그러니 우리가 잊고 사는 게 무얼까? 저들은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 부모가 들려주지 못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고1, 중3, 중2의 늪을 건너며 한참 사춘기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감히 말하면 문제다 싶은 아이 뒤에는 꼭 문제인 부모가 있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누구는 틱이 있어 힘들어하는데 신앙을 잃은 부모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정신과적인 일로 치부하고 만다. 실제 뚜렛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 20세 이상 성인이 돼야 우선 장애로 인정이 되는데, 이 또한 장애로 인정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워서 작년 한 해 1800명이 신청을 했으나 20명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그만큼 불규칙하고 그때마다 달라서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소린데, 정작 본인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뿐이다.

 

어떤 아이의 어떤 경우도 확실히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 없어, 아직 나이도 있고 그것이 미세한 정도여서 부모도 대수롭게 보지 않는데, 그것으로 파생하는 정신적인 소외나 스트레스가 또 다른 히스테리를 조장한다. 분노가 일거나 조울이 확장하기도 한다. 누구의 경우라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어느 때보다 아이들이 영적으로 무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게임을 위해 더 좋은 컴퓨터나 핸드폰을 산다. 한 아이는 어제 130만원을 주고 최신형 핸드폰을 샀다. 나름의 주장은 교육방송을 듣기 위한 것이라는데,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감옥에 갇히는 꼴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24시간 아이를 감시할 수도 없고, 이제 중2, 3학년만 돼도 몸은 성인 이상의 크기로 자라 어른아이다. 그러니 나는 마치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본다.

 

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 78:13-16).

 

그 부모가 잃어버린 저 사실을 아이에게 어찌 일깨워야 할까? 이는 애고 어른이고 상관이 없다. 어느 목사의 아이 같은 어른의 행실을 두고, 게임에 환장을 하고 저 혼자의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말씀으로 이끄시는 주의 손길을 한사코 마다하고 있기도 하니. 어느 특정 연령대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7).

 

아, 그러니 뭐라 하면 싸우자는 소리로 들으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다 안다며 듣기 싫어하는 이에게 낸들 뭐라 하겠나? 아,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 우리가 망각한 땅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틱은 고상하고 분노조절장애는 애교스럽다. 조울증은 개인의 일이 되었고, 이런저런 게 흩어지다 모아져서 조현병으로 발전한다. 일명 정신분열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구조가 아니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 매일 들여다보고 하는 게임이 죽이고, 전쟁하고, 빼앗고, 더 화려하고 근사하게, 화력을 쌓고 내공을 기르느라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뚝딱, 하면 한 나절이 다 지나갔다. 그러니 성경은 호통치시는데,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렘 2:7).”

 

얼마나 더 파괴되고 함몰돼야 그 영혼의 실태를 알 수 있을까? 어른들치고 요즘 주식이니 비트코인 가상화폐에 얼마 정도씩 물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 눈만 뜨면 말씀 묵상은 뒷전이고 주식 장세를 살피고 코인 가격변동에 정신이 팔려 있다. 내 친구도 양쪽 다 물려 수 천을 손해 보고도 그게 또 미련이 남아 어쩔 수 없이 손을 털지 못한다. 누구는 집에 또 아파트에 정신을 빼앗기고 이런저런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들어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소리만 한다. 그러니 다들 눈만 뜨면 게임에 주식에 아파트 시세에 그야말로 '영끌의 시대'다. 영혼까지 팔아 탈탈 끌어모은 돈으로 사투를 벌이는 신세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은 한가한 소리고 기도는 그 내용이 온통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돼지머리 상투잡은 소리밖에는 달리 바랄 게 없다. 그런 우리를 오늘 말씀은 불러 세우신다. 그리고 일러,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 20:26).

 

스스로 자신을 알지 못하면, 어느 순간 모든 걸 잃어버린 뒤에야 안다. 자아로 살아 남는다는 일로 평생을 허비한 목숨에 대하여 '주여 주여' 하며 그 영혼은 억울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는 주의 음성이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듯도 하다. 생을 다 살아야 비로소 아는 생이라면,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아,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 132:7).

 

부디 주 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여기가 감옥인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이 방이 고기 뱃속이야!> 할 때 비로소 요나의 기도가 드려졌던 것처럼, <여기가 감옥인 것을> 부디,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8,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