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전봉석 2022. 1. 3. 05:10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우리에게 거룩은 너무 막연한 듯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를 전제로 두고 실제의 삶, 일상을 세세히 건드린다. 하다못해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32).” 즉 주를 경외함이란 일상의 소소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에서 새겨나는 것이다. 곧 주의 뜻을 가리어 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삼가는 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이와 같은 말씀은 스스로의 속단을 금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13).” 허탄한 자랑에 억매여 사는 일에 대해 새삼 말씀에 가만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 같다. 결국 주의 뜻은 이루어진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7-8).”

 

막연하여서 때론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주는 마치 들려주시는 말씀과 같이 나를 독려하신다. 본래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빈말, 오고 가는 속에 없는 말 따위를 혐오한다. 각별히 주의 하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여 주거나 받지 않는다. 이는 어떤 말에 또는 누구의 대우에 연연할까 하여 삼가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가 되었다고 또는 누구 생일이라고 뜬금없이 표하고 새삼 무엇을 나타내는 것을 주의할 정도로 면구스러워도 한다. 특히 목사가 되고 의식적인 인사가 된 것이 기도할게요, 하는 말인데 과연 참으로 얼마나 기도하는지. 이는 실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일로 어떻게 누굴 위해 기도하겠다고 해놓고 그렇지 않으면 이보다 거짓되고 헛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평소 잘 연락도 안하는데, 이는 빈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 지내시죠? 하고 묻는 말에는 저에 대해 참으로 그리 궁금해 하는 관심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예전과 달리 아내의 핀잔도 이어지곤 하는데 그런 빈말, 형식적인 말없이 어찌 사회생활, 사람 관계가 원만하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 관심이 없었더라도 어떤 날이 되면 형식적으로라도 인사를 건네고 표현해야 옳다는 것인데… 실은 내가 예전에 그것이 아무리 가식적이라 해도 누구보다 그리 살려고 해서 그런가? 점점 더 이를 경계하고 일부러라도 조심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다 보니 굳어지는 마음인가? 심지어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만두기 일쑤이다. 실제 나는 너무 과중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요즘은 문장으로의 표현보다 이모티콘이나 어떤 캐릭터와 문구가 흔해터진 시절이라, 삐쭉 한 장의 사진 하나면 족한 인사들이 늘었다. 애교스럽기도 하고 성가신 말을 대신하는 편리함도 있어 대충 때울 수 있는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중에 가까운 친구로부터 아주 진지한(?) 새해 인사를 받았는데, 내가 건넨 것에 비해 너무 과분하였다. 저는 전심으로 글을 썼고, 이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다 이것이 내게 주는 것 이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보낸 답은 아멘, 하는 화답이었다. 즉 나의 이 묵상글을 보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인데 그 가운데 또 대부분은 읽지도 않는 걸 알면서도 그리하는 것은 최소한의 나의 마음으로다. 그런 중에 저의 글을 여기에 옮기는 것것은 어쩌면 묻지도 않아 결례가 될 수도 있으나 함께 읽는 누구라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아멘, 하지 않을까 싶어. 곧 내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아멘이 되는 것을.

 

감사, 감사!, 감사.

 

형의 메시지를 보며 성경으로 돌아갔고

형의 메시지를 읽으며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싶었고

형의 메시지를 들으며

 

귀가 뚫려,

나를 향해 애통해하시는 주의 기도를 들었고….

 

내 영이 나태하고 위태했던 순간순간마다 건지셨던 하나님의 손길. 형을 통해 나를 잡아주신 그 손길을 찬송합니다!

 

돌이켜볼 수 있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똑똑히 보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바로 지금 곁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매일매일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합니다.

주의 것이 아닌 것에 구역질이 나는 생리적인 반응이 더욱 민감해지도록 주의 영을 종일토록 부어주소서.

나의 죄를 희게 하신 그 손길로

주의 영에 젖어 살도록

기름 부으소서!

 

형,

감사해요.

셀 수 없는 시간을 떠올라도 영원토록 새롭고 새롭게 떠오르는 해처럼,

주님을 바라는 우리 삶의 여정이

주 안에서 새롭고, 새롭기를 기도합니다.

-친구의 새해 인사 전문

 

염치불구하고 전문을 그대로 올렸다. 전에 저가 말하길,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위해 쓰는 글로 나의 이 모난 묵상글을 응원한 적이 있다. 가끔은 굳이 이 글을 공개할 게 뭔가 하다, 저의 말처럼 나의 허물조차 주의 은혜로 선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16-19).

 

즉 나의 나 됨이 보잘것없으나 이것까지도 주님이 선으로 바꾸어 한 영혼의 울림이 되게 하실 것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러한 고백이 어찌 또 내 것이겠나? 곧 나의 친구의 글이 어찌 나를 위한 것이겠나? 우리의 권함으로 주를 찬송하고 주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45:7).” 이런저런 나의 비루한 모습까지도 그 가운데 주가 함께 하심을 드러내려 하심이겠다. 주님의 아름다운 계획, 그 감미로운 새싹, 하나님의 꽃을 찬송함인데,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10).

 

곧 저에게 젊어서부터 못 보일 꼴을 참 많이도 보이며 살아온 터인데, 우리가 같이 주를 찬미하고 오늘에 두신 각자의 삶에서 주를 찬송하게 될 줄이야. 곧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 데 있어 같은 동시대를 살며 주를 생각하듯 서로를 생각함으로 위하고 위함으로 기도하게 되는, 이처럼 우리 젊은 날의 어리석음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엊그제는 다른 친구가 여수 애양원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보내오며 나의 이야기 속에 있는 그곳에서의 사연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친구의 진심어린 글 하나가 우리에게 더하신 날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꽃, 즉 아버지의 섭리를 우리로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6).

 

바울 사도의 이와 같은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고 진심어린 충고로 권함을 더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같이 나이 들어가며 곁에서 보아본 서로의 모습이 있으나 날로 새로워지는 서로의 속사람으로 인하여 주를 같이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함은 주를 바라고 더욱 주를 의지하는 모습으로 서로의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일 텐데, 이것이 인위적으로는 안 된다. 꾸며서 어찌 가릴 수 없는 속되고 비루한 모습까지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선물이 되었으니, 오늘 시편은 우리로 어떻게 평안한가? 하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 같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1).

 

그저 어린 아이라 하지 않았고 젖 뗀 아이라 한 것은 자기 의지로서 이를 취함이다. 억지로나 본능적인 무의식의 일로써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그리 하는 것은, 더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꿈꾸지 않는다. 허튼 망상으로의 신앙이 아니다. 위안으로 삼으려는 믿음도 아니다. 실제의 삶으로 비록 주 앞에 내어드릴 게 없어 빈 손 들고 앞에 와 주 앞에 엎드리는 일이겠으나 비로소 주를 알 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내가 무엇으로도 주 앞에 자부하고 내세워 자랑할 것이 있겠나? 거듭되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어떤 것으로 주를 찬송하겠나? 그러므로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기를.’ 감히 아뢰어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다만 오늘도 주어진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여 주를 생각하고 또 바람으로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다시는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아니하도록,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저 겨울나무가 또는 뒹구는 낙엽이 교만하고 허황된 나로 인하여 대신하였다. 그뿐이던가?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비록 오늘도 또 몇 번이나 좌절하고 낙심하여 쓰러지고 넘어질 테지만,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2).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날들이었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사람의 소중함은 그와 함께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이다. 저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시려고… 그러는 동안 주는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은혜로 받은 것이지 나의 수고로 얻은 게 아닌 것을 알면 알수록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이를 같이 하게 하시려고, 소리 소문 없이 내 곁에 저와 같은 이들이 같은 길을 동행하는 것이겠으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하여 더욱 더 거룩, 거룩.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이로써 오늘도 한 날을 산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이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준행함으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2).

 

하여,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