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22. 1. 18. 05: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민 7:1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1-2

 

 

지루할 정도로 같은 날의 반복이다. 그 날이 그 날 같고 그 날이 그 날 같으나 반복되는 매일은 특색이 있다. 그 날과 그 날 사이에는 같은 이야기가 연속되어 지루한 것 같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저들이 드린 헌물의 내용을 같은 내용으로 각각 동일하게 나열하고 이를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다. 흔히 그럼 일정 부분에서 생략, 이하동문 하고 넘길 수도 있는 것인데, 하나님은 지루할 정도로 이를 거듭 말씀하시고 모세는 이를 또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참 치루하고 따분한 그러면서 너무 길어서 그 내용이 동일한 것 같으나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이를 귀히 여기심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오늘 시편의 찬송으로 다시 묵상하면 적절하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1-2).

 

허락하신 평생의 날을 꾸준하게 채워가는 일, 그 날이 그 날인 것 같고 그래서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다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회심하면 믿음이 생기고 이를 의롭다 하신다. 나를 양자로 삼으시고 하루하루의 삶을 성화시켜 가신다. 이때의 견인은 때로 불가항력적이고 가까운 미래에 영화를 이룬다.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하고 무던함으로다. 단시일에 무엇이 뚝딱 해결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 부르셨다 해도 모두 이에 응하여 택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이를 누가 임의로 행하는 것일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겠으나 저마다 자신의 선택으로 또한 그리 한다.

 

네 아이가 글쓰기를 한다 할 때, 둘은 꾸준하고 둘은 흐지부지하다. 잘하는 둘을 격려하고 안 하는 둘을 독려해야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오늘 말씀의 ‘그 날이 그 날 같은’ 것에 대해 대부분은 쓸 얘기가 없다! 하는 반응이다. 별로 특색 있는 게 없다 하여 그 날이 그 날에 묻혀버릴 수는 없다. 이를 알게 하시려는가? 하나님은 일일이 그 똑같은 헌물-날들을 기록으로 남기셨다. 우리가 흔히 상을 타거나 졸업장을 받을 때 ‘이하동문’ 하고 말면 그만인 내용일 텐데, 개개인에게 이는 그저 단순하게 같은 내용의 것일 수 없다. 그리하여 중생이란 더디고 지루한 것 같으나 그렇다고 우리의 생을 ‘이하동문’으로 묶어 한데 쓸러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곧 너와 내가 같은 것 같고 같은 날의 연속에 같이 놓인 한 덩어리의 생애 같으나 결코 그 누구도 그 하루하루가 그 날이 그 날인 경우는 없다. 나를 창조하신 이는 모두를 창조하신 이와 같고, 우리는 모두 그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각기 그 하나하나는 독립되다. 곧 우리의 중생은 우리의 인격, 지-정-의 그 모두의 변화됨을 의미한다. 이에 즉각적인 변화가 있고 점진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곧 우리로 선한 일에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는 우리로 변화되는 삶을 살게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육체가 자라듯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그 가치가 달라지듯이 우리의 영적인 수준도 자라가야 한다. 이는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다.

 

이처럼 또, 다시, 늘, 같은 일의 반복인 것 같으나 그 날과 날이 포개지면서 우리는 날로 새로워져 간다. 하여 중생은 부르심의 증거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달라지는 게 없다면 이에 대한 어딘가 문제가 있다. 중생이 없다면 소명도 아니다. 그 증거는 ‘아멘’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때이다. 주님, 하고 부르게 되는 부름은 아멘, 하고 어떤 일에 또는 말씀에 동조하면서 하나가 된다.

 

실제 우리가 읽거나 듣는 일은 믿기 이전에 생긴 일이고 이를 행함은 부르심이 있어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그러니까 어떤 내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 같으나 그의 안에는 이미 이를 행하고자 하는 발동이 있었다. 이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엄청난 진리 앞에 서게 된다. 영접하는 자로 그 앞에 서는 자는 앞서 그리 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나는 한 아이를 보며 느낀다. 같이들 시작했다 하나 듣는 것이 모두의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라도 자주 말하는 것은 꾸준하다는 것은 은혜다. ‘어쩌다 하루’가 아니다. 이를 간혹 혼동하여 어떤 날은 이런 일도 있고 어떤 날은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각각 그 날이 서로 새로운 것처럼 유도하는데 실은 모두 하나다. 때가 되면 이끌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일과 같다. 이때 매순간이 꽃이고 열매인 나무는 없다. 지금은 한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로 다 죽은 듯 말라비틀어진 거죽만 남아 있으나 그것이 곧 봄이 오면 새순이 나고 가지를 뻗어 풍성한 잎사귀와 함께 꽃을 피울 것이다. 때가 있다함은 더러는 참 지루하고 지겨운 일이기도 하다. 그 때를 우리는 알 수 없어 더러는 스스로 나자빠져 다른 길로 향하기 일쑤겠지만,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45:3-4).

 

이내 이를 행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가 않다. 주님은 일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당장은 아닌 것 같고 모두를 봐도 아닌 것 같은 것에서 우리가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성경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무엇으로 길라잡이를 삼을 것인지! 누구는 위인으로 누구는 자신의 꿈과 목표를 세워 이뤄가는 일이겠으나,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사 40:15-16).

 

그리하여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 고작 한 방울의 물이라니! 한 통의 물은 결국 한 방울의 물로 비롯되는 것이어서, 이 일을 굳이 해야 하나 싶을 때 나는 이를 묵상한다. 저 아이가 얼마나 또 저러다 말지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구의 의욕이 때론 나로 더욱 자라가게 하는 것은 저로 인하여 내가 나에게 두신 날의 소중함을 아는 일이다. 이에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낸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는 이제 붙들린다. 누구에게도 권하여 어느 날 하루 날 잡아서 백 장의 글을 쓰기보다 하루에 한 장씩 열흘을 쓰는 열흘을 더해 백 일을 쓰는 게 더 낫다. 책을 수십 권 읽는 것도 중요하나 한 권의 책을 그처럼 여러 번 읽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인내다. 인내는 은사다. 성경의 모든 인물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성도의 불가항력적인 견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아의 방주도 아브라함의 긴 여정도 모세의 무모한 사역도 다윗의 순종도 실은 다 그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로 연마된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알 수 있었던 외로운 40년의 미디안 광야 생활이 있었고,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상숭배의 헛됨을 알았기에 가능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탁한 삶에 지친 이유였다. 이에 모든 게 다 때가 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리하여 지혜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

 

하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지루한 반복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2-8).

 

결국은 ‘때’이다. 그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알 수 없음에도 오늘의 이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 안에서 자라간다. 꽁꽁 얼어붙은 땅의 흙이 헐거워지는 날이 오면 흙은 그 사이로 스며서 얼었던 물기가 틈을 내고 그 틈새로 바람이 들고 햇살이 기운가 하였더니 곧 새순이 뻗을 길을 내어준다. 어느 글에서 보니 새순이 땅을 밀어올리고 나오는 힘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실제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방영된 것 가운데, 공사중인 구 도로 한복판에 놓아둔 컨테이너 박스가 비스듬히 들리는 일이 생겼다. 그 안에는 인부들이 먹고 자는 숙소로 그 무게는 장정 여럿을 더한 것이었다. 처음엔 겁에 질려 기울어진 컨테이너 땅 밑에 어느 배관이 터졌나싶어 다들 도면을 살피고 지적도를 구해다 보는데도 그런 게 없었다. 이내 장비를 동원하여 조심스레 아스팔트를 뜯고 땅을 파고 들어갔는데, 버섯 세 개가 아스팔트 아래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여린 버섯 세 개가 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의 일이다.

 

결국 우리의 구속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의 엄청나고 비밀한 일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니 무엇이 불가능하겠나?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 저의 가혹함은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우리가 무슨 수로 돌릴 것인가?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 27:34).”

 

울어도 못하는 일이 있다. 이를 우린 너무 쉽게 여기는지,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5:19).” 다만 순종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바꾸어버리신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요 2:25-26).”

 

나는 종종 누구에게 나의 어릴 때 이야기를 말할 때 어찌 아무렇지도 않겠으나 더는 그것이 나를 조정하지는 못한다.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과거는 더 이상 회상 그뿐이다. 아니, 오히려 교훈이 되기도 한다. 이는 모두 내가 자라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일일이 하나하나 저 지루한 반복을 무던히 참고 또 귀히 여기시며 하나하나 열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늘 자주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함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누군가 내가 모르는 동안에도 날 위해 기도하심인데, 그것이 또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심이라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1-2).

 

이와 같은 기도가 내 것이 되고 나의 찬송이 된 것이 놀랍기만 하여, 더는 예전과 같이 사람을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3-4).

 

더는 이 허무함을 알진대,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