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전봉석 2022. 1. 20. 05:09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민 9:23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12-13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산다는 것, 이는 복의 근원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강조한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 9:23).” 말씀을 지킨다는 것, 곧 ‘그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으로 시편의 기본 핵심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일. 아무리 뭐라 해도 성경은 연간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권이 팔리고 있다. 특히 ‘9.11 테러’가 났을 때는 미국사회에 평균보다 45% 이상 성경 판매량이 급증했다고도 한다. 우리 영혼은 공허한 것이다. 이를 채우고 무언가를 붙들기 위해 철학이며 과학, 물질이며 사랑, 영매나 샤머니즘 같은 것으로 우겨넣기도 한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는 데 있어,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랐고, 지켰다. 유월절은 출애굽 때 죽음의 사자가 온 애굽을 휩쓸 때에 저들만은 피해 넘어간 일이다.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행하였더라(5).” 곧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주의 말씀을 지켜 주야로 묵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앙과 말씀은 긴밀하여 처음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한동안은 말씀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마치 사랑의 열병처럼 성경만 읽고 보고 쓴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이는 일상이 되어 꾸준하고 은근하게 성경을 가까이 하고 산다. 마치 사랑을 할 때 연애를 하며 사랑의 열병을 앓다, 결혼을 하고 서로의 같이 함이 자연스러운 날들이 되는 것과 같다. 한동안 나는 ‘성경을 몇 권 해치웠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여 성경이 지저분해져서 새로 산 게 몇 권이었다. 그런 경우 다른 책은 보질 않는다. 그렇게 소설을 좋아하고 시를 사랑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어느 목사의 설교강해나 신앙서적 위주로 독서의 갈림도 자연스러워졌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산다는 것,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은 성도로서의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를 알려주려, 특히 성경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잠언을 가지고 같이 읽고 같이 쓴다. 시작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한 장씩 묵상하고 있는 아이 둘에게는 잘하였다고 저들이 원하는 ‘카톡 이모티콘’을 하나씩 선물로 사주었다. 성경의 지혜 없이 우리가 무슨 수로 이 혼탁한 삶을 분별하며 살 것인지!

 

삶을 두고 기구하다는 표현을 쓸 때, 세상살이가 참 순탄치가 않고 가탈이 많다는 의미다. 유독 누가 그러하여 나는 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어찌 그런 가운데서 살까… 하는 안타까움으로, 차마 나는 저의 이야기를 옮기기도 어렵다. 대학시절, 조그맣고 예쁘장한 여자아이였던 그 모습이 어렴풋하다. 병적으로 의처증이 심한 남자를 만나 의심과 구타, 모진 박해를 받다 결국은 자식도 두고 도망쳐야 했다. 아무리 법의 도움을 요청해도 공권력이 미칠 수 없는 가정사여서 오죽하니 아이를 두고 그런 모진 마음을 먹었을까? 이후 이름도 개명하고 숨어사는 처지에 저의 모친은 저의 패악질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금도 여전히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저와의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학창시절 단톡방에서였다. 목사가 된 내게 어렵게 자신의 살아온 날을 털어놓았고,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와 말씀으로밖에는 줄 게 없었다.

 

인생사 아무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는 게 서로의 푸념이다. 구슬픈 노랫가락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는 것이 안 믿는 자들의 위로라면, 우리의 위로는 주의 말씀이다. 이를 주야로 묵상할 수 있는 우리는 복이 있다. 어제 아침, 뜬금없는 저의 문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 위로하고 말씀으로 새 힘을 더하는 것뿐이라, 이런저런 저의 말에 나는 성경부터 끌어당겼다. 그리고 답 문자를 하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슬픔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이런저런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간들이 도리어 찬송이 되고 주의 영광을 바라는 놀라운 기쁨이 되기를 또한 기도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는 말씀으로 새 힘을 얻기를 기도할게. 힘내. 늘 주가 너와 함께 하심을 붙들고, 잘 견디고 잘 이겨내기를.”

 

이와 같은 말로 위로할 뿐인데,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저의 지금의 처지 또한 말이 아니어서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저이보다 혹독한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 나로서는 주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수밖에. 그저 안 됐고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간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이 오고 나는 아이들과 같이 읽은 잠언 19장(어제는 19일이었다)에서 21절 말씀을 붙들고, 아이들에게 먼저 ‘강영우 박사’와 ‘수잔 휘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영우는 중2 때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얼굴에 정면으로 축구공을 맞고 쓰러졌다. 다들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 저는 몇 차례의 수술과 병원 생활을 끝으로 맹인이 되었다. 이후 점자로 글자와 숫자를 다시 배우고 맹아학교에 입학을 하여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는 동안 부친의 가산은 모두 탕진되었고, 얼마 뒤 모친은 세상을 떠났다. 죽고 싶은 저에게 맹아학교로 봉사오던 여학생이 복음을 전하였다. 서로는 사랑을 하였고 후에 저는 연대 특수교육학과 특례입학을 하였다. 최초 국비장학생으로 하버드대로 유학을 갔고 국가에 진 빚을 갚으려 국내 교수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소경을 교수로 채용할 학교가 없었다. 이내 미국에 남아 유엔에서 일하게 되었고 미국백악관 행정부에서 부시행정부 보좌관을 지냈다. 저는 고백하기를 또래들보다 뒤진 삶으로 소경까지 되어 낙오자가 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놀라운 삶을 자신에게 선사하셨다. 당시 누구보다 유명인사가 되어 저는 우리나라 행정부와 백악관을 잇는 정치적 가교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평생을 제3 세계 인권과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하였다. 도리어 저는 자신이 맹인이 된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수잔은 주일학교 때부터 신앙이 좋은 아이였다. 의사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 되길 꿈꾸었다.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는 열여덟 살에 갑자기 쓰러져 골결핵이라는 판명을 받았다. 저의 기도제목은 온통 자신의 병을 낫게 해주시길, 그럼 의사가 되어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것. 그러나 꿈은 좌절되었고 병원을 전전긍긍하느라 세월이 흘러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매일 같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던 수잔은 그날 문득 내용을 바꿔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신도 누워 있는 처지면 누워서 곁의 환자에게 말 한 마디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고, 간호사에게 퉁명스럽던 그녀는 웃음을 주고 위트 있게 활력을 더했다. '수잔이 달라졌어요!' 하는 소문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수잔의 말버릇과 함께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점점 수잔을 따라하는 열풍이 생겨났고 이후 ‘수잔 무브먼트(movement)’라는 단체가 하나 둘 결성되었다. 그녀는 한 게 없다. 다만 자신이 환자지만 환자로서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것뿐. 이런 운동은 영국 전역으로 옮겨 붙어 수많은 환자와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구호 아래 단체활동이 벌어졌다. 지금도 저 단체는 활동중이다. 저는 훗날 자신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돌볼 수 있었을 숫자보다 환자가 되어 돌본 환자의 숫자가 몇 십 배는 더 많았다고 회상하며, 그 영광을 하나님께 올렸다.

 

같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어, 나는 어제 아이들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아침 일찍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 친구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에 이처럼 새벽에 앉아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자’의 시간이 주는 결실이라 생각한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대화다. 마주앉아 눈을 마주하는 대화다. 때론 가만히 바라만 본다. 때론 가만히 듣기만 한다. 때론 나 혼자 수다를 떨 때도 있다. 묵상은 그렇게 하나님과 마주하고 앉는 일이다. 이에 나타나는 복을 시편 119편에서 세 개 찾아보았다.

 

첫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거룩한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둘째,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 영혼은 위로하심을 받는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셋째,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7-98).

 

들어보면 이런저런 기구한(?) 사연 한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강영우나 수잔과 같이 나의 친구 누구도 엄청나게 시끄럽고 고약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소소한 이야기 속에도 남모를 사연들은 구구절절하다. 지혜자는 말하길,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러니 누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랴! 강영우도 수잔도 저마다 자기 이야기의 서러움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가만히 주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아주 특별한 고통으로만 감사와 찬송이 드려지는 게 아니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은 생은 없다. 

 

아니면? 만약 이게 아니라면? 그저 헛되고 헛된 게 인생일 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그러니 죽 쒀 개 주는 인생들도 허다하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도 그렇게 될 줄 알았겠나? 우리의 젊은 날, 그 앳된 저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에 있지만 부디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이 저의 삶에 비춰지기를. 그 모진 세월의 비밀이 축복이었음을. 그리하여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누구의 사연을 듣다, 이제 누구에게라도 아무렇지 않게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이는 바울 사도도 같았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어째서 그런가? 남들 다 잘 되고 형통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법인데…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 숨겨놓으신 은혜를 깨달은 것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이 얼마나 귀한 은총인지. 

 

아이 넷이 온다. 어쩌면 방학동안만 오다 하나가 그만두면 모두가 그만둘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저 아이들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다한다. 단지 글을 쓰게 하는 게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자 하여 묻고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플라톤은 우리의 <생각하기>를 ‘영혼이 보유한 내면의 대화’라고 했다. 이를 후에 어거스틴은 ‘말씀을 담아 생각하면 하나님과의 대화다’라고 했다. 나는 누굴 생각한다. 저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하면서 말씀을 뒤적인다. 그때마다 적당한 말씀을 주시는데, 이는 하나님과 나의 대화다. 그러기 위해 나의 관심을 말씀으로 끌어당기신다. 나는 이제 성경이나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강해나 신앙고백을 읽는다. 그런 게 읽힌다! 예전에는 신앙서적을 하등한 것으로 여겨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그 좋아하던 소설도 안 본다. 더는 시집을 돈 주고 사지도 않는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어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쓴 묵상글이 기특해서 뭐라도 선물로 주고 싶다. 누가 쓴 묵상글을 나는 읽고 또 읽고 응원한다.

 

말씀은 살았다.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때에 우리 몸의 장기들이 운동을 하고, 혈관은 쉼 없이 돌고, 맥박은 뛰는 것처럼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고1 올라가는 여자아이가 물었다. 특별히 쓸 얘기가 없는데요? 그저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 뿐인데요? 그래서 나는 그 속에 수많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가까운 날에 아이가 벅찬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자신의 묵상글로 하나님과 대면하며 대화할 것을 믿는다. 

 

그리고 오후의 한 사건.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소위 ‘자폐아이’라 여겼던 아이가 어느 영어 학원에서 쫓겨난 모양이다. 더는 보내지 마시라, 하며 학원 선생은 환불과 동시에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고 돌려보냈단다. 그 일로 아이엄마는 상처를 받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정도인가 울면서 물었다. 아내는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며 아이엄마를 위로하였고, 이제는 혼자서도 얼마나 좋아지고 잘하는지, 심지어 자기보다 한 학년 어린 1학년 동생을 챙기고 가르치기까지 한다고 위로를 하였다. 아내는 덩달아서 씩씩거리며 억울해하였고 아이엄마와 같이 속상함을 나누었다. 그 애길 나에게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면서 어쩜 그럴 수 있어? 하고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되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왜 내가 찔끔하고 찔리는 것일까?

 

한참 글방이 잘나갈 때, 이상하게(?) 우리 글방에는 상위권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모두 연고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내로라하는 대학들로 진학을 하였다. 몇몇은 조금 낮은 대학을 갔다가도 편입논술을 치러서 연고대로 다시 가기도 하였다. 생각해도 신기한 건 진짜 아이들이 잘했다. 그때는 내가 말씀 없이 살던 시절이라, 어떤 아이는 한두 번 경고한 뒤 돌려보냈다. 그게 마치 더욱 글방의 진가를 알리는 셈이 되었다. 한 아이엄마는 쫓겨간 아들을 대신하여 간식과 봉투(?)를 들고 와서 다시 그 팀에 받아주길 바라기도 하였다. 나는 우쭐하였고, 교만하였다. 그땐 우월감이 전부였다. 훗날 그것이 다 공짜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았다. 곧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이상하게 다 잘하는 애들만 왔었다! 특목고 아이들과 무슨 외고 아이들로 구성된 팀이 여럿이었다. 나는 도태되거나 방해가 되는 아이는 돌려보냈다. 그것이 우리 글방의 특성이기도 하였고, 엄마들은 그런 데 열광했다. 서로의 일그러진 교육현장이었다. 

 

그때는 한 영혼으로 상한 심령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구는 거식증에 걸렸고, 누구는 고딩인 게 스스로 섹스중독증이라고 이를 부추기듯 자랑스러워하였고, 누구는 자살충동으로 실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그런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상대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치 물갈이 하듯 하나님은 '이상한 아이들'로만 채우셨다. 어디가 아픈, 상한, 학교에 부적응하는 아이들. 그때 나는 신대원을 다니고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서로가 이상했다. 선생도 정신과 약을 먹고 아이도 같은 약을 먹거나 입원도 하였다. 참 희한하고 어이없어서 '이게 뭐지?' 하는 사이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아무튼 어제는 이래저래 긴 하루였다. 아내 말마따나 나는 늘 하는 게 없는데 바쁜 사람이 되었다. 아침 일찍 한 친구를 위로하는 일로 시작하더니 그 일이 이어져 아이들과 같이 읽은 잠언에서 누구 이야기를 들려주고, 오후께는 아내의 씩씩거림과 '우리 누구'를 운운하며 어느 학원에서 쫓겨난 일로 같이 흥분을 하고, 그렇듯 내 일처럼 역정을 드는 가운데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를 드리기까지, 새삼 나에게 일깨우시는 것은 말씀으로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확신 하나! 그리하여 한 영혼, 저 어린 소자 하나가 실은 우리 주님이셨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누구도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될 일이 되었다. 이는 두려운 일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헉!

 

말씀 앞에서 이처럼 웃었다 울었다, 어떤 소원을 말하다 주의 생각을 듣다,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같이 하며 주와 대면하는 이 묵상의 시간이 없었으면 어쨌을꼬!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이 시간을 사수한다. 어디가 아파도, 무슨 일로 뭐가 어떻다 해도, 나에게 이제는 이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우선순위가 되어, 묵상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되다.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이제 친구에게 위로할 줄 모른다. 아이들이 오고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는 이제 가르칠 게 없다. 또는 누가 와서 저의 상한 영혼을 들추어낸들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는 들을 귀도 할 말도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조차 나는 이제 말씀이 없이는 나의 약함이 감사하지 않다?!

 

그렇지!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 9:23).” 주의 명령, 그 말씀으로가 아니면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거룩의 길이다. 위로의 길이다. 지혜로의 길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모든 생각은 헛될 뿐이다. 이에 오늘 시편이 내게 들려준다.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12-13).

 

이를 우리가 어찌 알까? 먼저는 자연들이 이를 따른다. 무던히 수천 년을 그리 알고 지켜왔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3-5).

 

그리하여 오늘 내가 지음을 받은 것도,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1-2).

 

곧 우리의 찬송이 결국은 그의 영광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이를 소재로 하는 내 이야기에는 너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있고, 그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하루하루 써내려가는 이야기가 실은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 뜻을, 명령을, 말씀을, 묵상하는 일로 우리의 대화는 영원히 이어진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6).

 

그리하여 저는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이심이다. 주의 영광이 우리 삶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고, 위로의 복을 더하시며, 지혜를 더하심으로, 더욱 더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신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