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민 10: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출애굽 후 시내산에 도착하여 1년여의 시간을 휴식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출발에 앞서 각 지파대로 숫자를 세고 3주가 지난 후 성막을 거둬 어깨에 메고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하려 하였다. 나팔은 신호다. 각 족속마다 군기를 두어 이를 중심으로 군호와 대열을 짰다. 나팔을 불어 백성을 소집하고 영적으로는 신앙을 일깨운다. 먼저는 대적을 향해 나아갈 때,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9).” 그리고 희락의 날과 절기 때,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0).”
‘그리하면, 그로 말미암아’ 하는 문맥의 이어짐은 당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는가를 주목하게 한다. 즉 어떤 현상이나 결과의 이유가 되는 동사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2년 2개월 20일을 머물렀다. 그동안 하나님은 저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막상 출발하려니까 마음이 어려웠던가? 모세는 장인 호밥이 돌아가려하자 저를 만류하고 함께 동행하기를 청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도 충분한데 광야를 잘 아는 의지할 만한 사람 호밥을 곁에 두고 싶어하였다. 이내 호밥은 돌아가고 저는 홀로 그 길의 진두에 서야 했다. 실은 저를 앞서 하나님의 궤가 인도하고 계셨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35-36).”
먼저는 신호를 알리는 나팔과 소속을 알리는 군기에 주목한다. 오합지졸로 대호를 형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류와 정돈이 필요하다. 이는 살림의 지혜이기도 하고 실생활의 실속이기도 하다. 내키는 대로 하는 생활은 그 정신이 혼란스럽고 생활은 난무하며 어떤 일이 닥치면 우왕좌왕하게 되어 있다. 보면 꼭 늦는 이가 늦는다. 이런저런 이유와 변명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저들의 억울함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데 보면 생활은 무질서하고 무절제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어떤 날은 이랬다가 어떤 날은 저런다. 나는 누구를 대할 때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하지만 이는 말로써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늘 그러고 살았다. 그리고 자주 하는 말, ‘못하겠어요!’ 한다. ‘못하다’와 ‘안 하다’는 엄연히 다르다.
못 하다는 하려는 의지가 있다. 안 하다는 그 의지조차 없다. 오늘 성경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각 족속과 그 지파별로 군호와 대열을 정비하고 군기를 중심으로 모으고 흩으신다. 이를 알리시는 신호를 두게 하셨다. 그 선두에는 하나님의 궤가 있었다. 그럼에서 ‘호밥’을 의지하며 부탁한다.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31).” 저는 당면한 현실과 내재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럴만도 하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여태 훈련하시고 가르치신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과연 호밥을 의지하려 드는 태도가 옳은 것인지…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32).” 이, 무슨!
사람이 우상이 될 때 어떤 다른 섬김보다 그 의존은 더하다. 누구더러 나는 저의 문제가 의존하는 데 있음을 말하였다. 실은 의존에 그 주체는 중요하지 않다. 꼭 저여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저가 옆에 있어서다. 그러니 더 심각한 것이다. 반드시 저이어야 하면 이는 사랑에 가깝고 헌신도 불사한다. 한데 의존은 그냥, 그가 옆에 있어서이다. 다른 이여도 상관없다. 그러니 동시에 불만도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적당함이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의 주범이다. 살만한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다. 좋은 건 아니지만 없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인과적이다. 네가 그래서 내가 이런다는 식이다. 곧 이게 다 네탓이다. 너 때문이다. 스스로 원인을 저에게 둔다. 그러니 결과도 늘 같다. 나는 저의 가정의 총체적인 문제를 여기에 둔다.
또 하나 아주 심각한 문제, 게임이다. 게임에 미친 영혼은 구제불능이다. 도박이나 오입질처럼 손모가지를 자르거나 거세를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생명 경시 풍조 어쩌고 하며 운운하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는 그게 다 게임문화가 활성화되면서다. 날로 급성장하는 게임시장은 이제 어마어마한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 되었다. 모든 게임을 주도하는 스토리는 전쟁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내가 이기려면 무조건 상대를 없애야 한다. 하다못해 물풍선게임이라도! 특히 ‘리니지’라는 게임은 사탄의 아주 훌륭한 걸작이다. ‘플레이 킬’이라 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술에 따라 그 스킬이 달라진다. 쏘고, 찌르고, 허물어뜨리며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에 희열한다. 더욱 자극적이고 잔인하게, 더 무참히 심각하게 짓밟고 무자비할수록 쾌감은 배가된다. 리니지 게임은 우리 영혼을 악하게 조정한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지만 목사들이 게임에 빠져가고 있다. 그게 뭐, 하는 식으로 이제는 문제의식도 없다. 아이들이 그 틈에서 자란다. 게임의 즐거움을 익혀가고 무의식적으로 폭력의 훈련이 이루어진다. 엄마들은 저들을 외면함으로 시들어간다. 그런 가운데 학습된 무기력증은 혼잡스러운 영혼으로 판단력을 흐린다. 누군 말을 하다 말고 하려던 말을 잃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하면서, 나는 저의 중증인 상태를 심각하게 본다. 살림은 방치되듯 버릴 걸 버리지 못하고 쌓여간다. 흔히 성격으로 치부한다. 이런저런 문제나 사연의 원인이 거기 있다. ‘다 버려야 해!’ 하고 나는 단호히 말하였다. 그러나 저의 의지로는 가망이 없다. 게임의 세계를 버릴 수 없는 사람들과 같다. 어지럽게 널린 가운데 사는 것도 일종의 게임 같다. 나는 거기에 내버려두는 것.
사탄의 놀라운 착안으로 오늘 날 산업의 발달로 우리 영혼은 마비 되고 있다. 가상과 현실이 혼재하였다. 천국과 지옥이 가상의 영상 가운데서 더욱 실감난다. 전쟁도 실제 스크린 안에서 추진된다. 무인 드론이 사람들의 마을에 정밀 타격을 가한다. 죄의식은 없다. 가상과 실상이 뒤범벅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을 살리는 어부’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스스로들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못하는 영혼마비의 존재가 되었다. 게임이란 그 자체가 주는 희열이 있다. 먼저는 시간을 죽인다. 인간성을 상실하게 한다. 사람을 죽인다. 물론 가상으로이나 실제로 살인과 폭행이 난무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어제 뉴스에서 같은 또래 여자아이가 사소한 일로 동급생 아이에게 끌려가 무인텔에서 무참히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다. 이를 실시간 동영상으로 전송하며 곁에 선 아이들과 영상 너머의 관중이 환호한다. 길게 한숨을 내쉬다, 피해 학생이 떨며 호소하는 소리가 가상 같이 여겨진다. 영화나 드라마에 흔하다보니 뉴스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유사한 게임으로 혼재되면서 그리 주목을 끌지 않는다. 그리고 은근한 외면과 무시, 무안으로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더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시대다. 어른들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이 살았으나 죽었다. 사람이나 괴물이다. 돈벌이가 장난이 아니다. 게임시장은 날로 성장하여 여느 콘텐츠 개발 산업보다 유력 종목이다. 아빠 곁에서 아이가 이를 보고 배운다. 더, 더, 잔인하고 끔찍하게. 그러나 아무런 가책도 없이!
목사가 무슨 게임이야? 하고 놀라며 나무라는 나의 말은 실없는 소리다. 별로 문제의식들이 없다. 우선은 몸에 밴 것이다. 당사자도 곁에 같이 사는 사람들도. 그러려니. 오늘 즐거움으로 한 날의 수고는 족한 것이다. 다음은? 그때 가서 벌어질 일은 그때 가서, 어린 아들이 혼자 방에서 핸드폰 게임을 한다. 너 뭐해? 하고 묻는 아빠! 응, 핸드폰으로 게임해! 하는 아들의 대답. 아빠는 거실에서 린틴지(?) 게임 중이다. 음향효과나 갑작스런 장면으로 무서워하면서도 아이도 서서히 일정부분 쾌감을 배워간다. 우리는 모두 영혼을 혹처럼 몸 밖에 달고 사는 괴물이 되어간다. 10대 청소년들의 무참한 묻지마 폭행. 무인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빠져 있는 시간, 우리 곁의 영혼들이 영혼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목사가 무슨 게임이야? 하는 나의 말은 해놓고도 우습다.
주님은 엄히 경고 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그러니 우리의 적당함과 늘어질 수 있는 여유가 저주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9).” 이런 말씀이 그냥 그렇다는 소리지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는다. 농담으로나 듣는 것일까? 뭐라 입에 담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있다. 목사 내외로 두 딸이 있었다. 특히 큰 아이가 주를 멀리하며 어지러운 삶을 살자, 사모는 딸을 두고 기도하기를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소원했다. 그 애가 서른이 되어 위암에 걸려 돌아왔다. 작은 딸을 두고는 차마 그리 기도할 수 없던 사모는 저가 좋다는 곳으로 시집을 보냈다. 안 믿는 가정이고 안 믿는 사위인데, 슬픈 어미의 마음으로 딸의 행복만을 빌었다. 적당히 잘 사는 집이라,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시부모는 몇 푼 안 되는 직장생활 그만두고 주식이나 공부하라며 각각 일 억을 척척 내주었다. 실은 나의 딸아이 친구 이야기라 내가 괜히 마음이 더 어렵다.
이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나는 누구에게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쓰고 또 쓰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기를 기도한다. ‘이처럼 사랑하사’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대신하여 날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세상이다. 세상은 인류다. 인류에는 내가 있다. 한 사람, 저 한 영혼을 의미한다. 요즘은 모든 게 숫자로 가늠되고, 사람 수가 돈인 세상이라, 한둘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여론조사에 밀려 칩거를 한 진보당의 누구에게 나는 실망했다. 한 사람 때문에도 싸워야 하는 게 진보다. 세상이 요지경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두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누구를 만나면, 특히 저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종인 것에 더더욱 마음이 어렵다. 평신도와 비교하려는 말이 아니라, 사명자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차라리 그만두면 저 혼자 자기 한 영혼의 문제로 씨름하다 그칠 일인데, 하물며 자식이 곁에서 보고 산다. 맡기신 영혼들이 있다. 그런데 게임에 몰두하고 무슨 건담인가 피규어에 거액을 쓴다. 제 정신이 아니다. 이 글을 읽으면 마음 상하겠으나, 차라리 상해서 욕을 하고 싸우자고 덤볐으면 좋겠다. 내 새끼고 내 동생이면 뒤지게 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든가 연을 끊던가. 문제는 스스로도 문제지만 그 아이가 보고 따라한다. 사모는 그 일로 눈물을 찍어낸다. 그런들? 알면서도 어쩌지를 못한다.
공군에서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전투기 몇 대 값이 든다고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해 3년 반의 시간을 동고동락하시며 가르치셨다. 이제 광야 길로 들어서야 하는 모세를 훈련하고 교육시키느라 2년 2개월 20여일이 지났다. 자 이제 약속의 땅으로 길을 나서야 한다. 한데 호밥을 의뢰하며 자기 곁에 있기를 호소한다. 이게 우리다. 우리 자신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도로 물고기 잡으러 돌아갔다. 도무지 사람으로는 사람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누가 저를,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침마다 묵상글 하나 쓰는 나를 두고 저는 위대하게 여긴다. 저가 묻기에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다고 말했다. 필사적으로, 나로서는 그게 아니면 '그나마' 그렇게 나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나라도 별 수 있겠는가? 내 말이 어찌 전달되었을까? 나에게는 ‘이거라도’ 붙들어야 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도 수 골백번을 흔들린다. 쉬 넘어지고 고질적인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난 나를 안다. 아주 잘 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주가 아니고, 말씀이 아니면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다. 아니면 무슨 수로 나와 상관없는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제는 고1 올라가는 아이가 2년여 만에 교회 목사님과 통화를 한 모양이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대면예배로 교회 출석을 하지 않던 아이들이 약속을 잡고 오는 주일에는 직접 교회로 가는 모양이다. 아내가 귀띔을 해주었다. 내 안에 저절로 감사가 또는 기쁨이 넘친다. 글짓기를 시작하면서 나름의 조건이 교회를 다시 나가야 한다는 것. 예배를 드려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 그리 일러 말을 하면서도 과연 아이들이 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는 덮어놓고 기도부터 하고, 잠언부터 찾아 같이 읽게 하였다. 이를 가지고 글을 쓰는데, 이상하다! 아이들이 순순히 따라온다. 세 번째 시간에는 자신의 생활을 연관 짓고 말씀을 끌어다 자기 생각을 쓴다. 성령의 함께 하심이라니! 그러니 어찌 내가 아니 말씀을 붙들겠나? 그리고 첫 번째 주간의 지난 주일 전날,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하는 아이의 답문자로 기뻤고, 네 번째 만나고 어제 오후, 돌아오는 주일에는 직접 교회로 다시 나가는 것을 두고 담당 목사님과 약속을 잡는 것 같다.
이 어떤 감동, 이 어떤 벅찬 기쁨, 이 감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주격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기쁨이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아이들이 교회로 간다. 당장 누구네 차를 타고 어떻게 갈 것인지, 서로들 의논을 하더라는 말에 내 안에 드는 기쁨! 어떤 감동, 이게 과연 내 것이겠나? 코로나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어쨌든 2년여 가까이 교회를 끊고(?) 살았던 아이들이 오는 주일부터는 직접 교회로 간다. 예배 없이 지내던 아이들의 생활이 다시 예배로 간다. 내가 그 일로 기뻐한다. 왜?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이를 위해 죽어라 하고 새벽에 일어나고 말씀을 끌어다 쓴다. 묵상글을 하루라도 빼먹으면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다. 묵상글은 내게 은으로 만든 나팔이다. 새로 더하시는 하루를 알린다. 그리고 내가 속한,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군기다. 어디에 있어야 하고 어디에 서야 하는지.
누구를 두고 한참을 생각하는 일, 저를 마음에 두고 연거푸 주의 이름만 부르는 일, 내가 하는 일이란 고작 그건데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말, 이는 공허한 고백이 아니다. 힘으로는 할 수 없어 이처럼 말씀으로 말씀 가지고 엎드릴 뿐. 이것이 묵상이기는 한지, 나는 이제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인지, 그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를 뿐, 그럴 때 지금 내 안에 이는 어떤 뜨거운 감사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고 기쁨인 것을 안다. 저 아이들이 다시 교회로 간다. 예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더니 진짜로 한다. 그러시려고 내게 보내셨구나! 느닷없이 글방을 온 게 그 이유였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즐거움도 실력이다. 나는 게임이 왜 재밌는지 모른다. 몸에 배기 전에 끊어내야 한다. 한두 해 시간이 거듭되어 그것이 습관이 되고나면 이제 생활이 되고, 그 생활은 저의 인격이 되고, 그것은 결국 저의 운명이 된다. 한 아이가 있었다. 자꾸 침을 뱉고 몹쓸 말을 입에 쓴다. 아이엄마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재미로라도 침을 찍 뱉고 무슨 말 끝에 툭하니 몹쓸 말을 뱉는다. 아이엄마는 그러다 안 되겠다싶어 아이를 이끌고 뒷마당으로 갔다. 그리고 아이에게 봄에 심은 나무를 뽑아 보라고 했다. 아직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못한 나무가 맥없이 뽑혔다. 다음은 작년에 심은 나무를 뽑아보게 했다. 생각보다 힘이 들었지만 흔들어대며 뽑으니 그것도 어렵지 않게 뽑혔다. 다음으로는 몇 년 된 수령의 나무를 뽑아보게 했다. 제법 마디가 굵은 나무는 흔들고 안간힘을 써도 뽑히지가 않았다. 그러자 아이엄마가 말했다. 네 습관도 이와 같다. 지금 그만두면 쉽게 고칠 수 있지만 한두 해 거듭되면 네 힘으로는 고치기 힘들게 된다.
어쩌겠나? 당장은 아직, 어리니까. 젊으니까. 건강도 돈도 적당하니까. 아직은 몸을 움직여 거동이 가능하니까 그러는 것을. 결국은 눈을 뽑고 그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라도 그 영혼이 돌이켜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나는 누구를 만날 때 다른 이보다 두세 배는 더 마음이 쓰인다. 우리는 주의 종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닌가? 한데 게임이나 자기 습관에 빠져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면, 저의 영혼은 그렇다 쳐도 누굴 위해 무슨 기도를 하겠으며, 어떤 말로 다른 영혼을 위로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두려운 것은 그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제 홀몸이 아니다!
가슴 아프다. 마음이 좋지 않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더욱 주님만 부른다. 어쩐다? 하고 생각만 많다. 통화를 할까? 뭐라 간절한 편지라도 쓸까? 한데 저를 둘러싼 친정이고 시댁이고 그 모든 상황이 녹록하지가 않다. 사탄의 방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저들의 무기력은 저들 스스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발람의 나귀’가 되어 먼저 본 것으로 두려울 뿐인데, 저들은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 열시 열한시 늦게서야 일어나 게임기에 앉는다. 먼저 그대가 좀 정신을 바짝 차리길, 하나님과 사생결단을 하듯 살려달라고 애원하길. 그래도 그게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그대가 부디 허접한 나와의 만남에서라도 듣고 본 게 있다면 두려워할 줄 알기를. 그렇게 돌려보내고 오후께 일찍 귀가하여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 149:4-6).
우리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들렸다. 자기를 벨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찌 아니 두려운가? 부디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고 또 바라며.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7-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 있는 사람 (0) | 2022.01.23 |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0) | 2022.01.22 |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0) | 2022.01.20 |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0) | 2022.01.19 |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0) | 2022.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