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 17:8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앞서 고라를 중심으로 족장들 250명이 모세를 위시하여 아론을 대적하다 땅이 갈라져 저들을 삼키는 일이 있었다. 후에 하나님은 12지파의 지도자들에게 그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갖게 하시고, 그중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살구열매가 열리게 하신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8).”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솨케드’이다. ‘깨우다’라는 뜻을 가졌다. 이 하찮은 막대기 지팡이도 하나님이 쓰실 때 모두를 깨운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 답으로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 곧 하나님이 쓰시고 사용하시는 데는 상상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
살구열매는 생명력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죽은 것도 살리신다. 그 능력으로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소망 없는 자들과 같이 살지 않는다. 또는 허튼 데 소망을 두고 죽은 자식 부랄 만지듯 헛된 소망을 품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주가 행하신다.
한동안 이혼을 하네, 서로 별거라도 하네 하면서 끝 간 데 없이 마음이 어려웠던 이가 있다. 몇 개월 전 처음 오면서는 만날 때마다 한탄과 눈물뿐이었다. 듣다보면 나까지 마음이 어려워서 나 역시 저들을 이혼하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친정도 시댁도 부부 사이도 저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기에 충분하여 눈이 덮인 곳에 서리까지 내리는 형국이었다. 한동안 저의 넋두리에 내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고, 그러든가 말든가 말씀으로 이끌었고 주가 맡김으로 ‘아닌 것에 대하여는 단호해야 할 것’을 자주 일렀다. 결국 주변적인 문제들은 차치하고 자신의 문제가 더 큰 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이 하신다.
새벽예배를 나가고, 혼자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았다. 자신을 주께 맡길 때 하나님은 땅을 고치신다. 어제는 상기된 표정으로 와서, 일주일째 매일 저녁 가족들이 같이 가정예배를 쌓기 시작했다고 하며 좋아했다. 전혀 동조하지 않을 것 같은 저의 신랑이 전날에는 찬송할 때 반주까지 했다고 했다. 떠듬거리며 글자를 읽는 아이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먼저 예배드릴 것을 준비한다고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이 시편은 고라의 자손이 훗날에 지은 찬송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
저의 갈급함이 저의 가정을 바로 세워가고 있음을 보고 놀라웠다. 몇 개월 만남 가운데 가장 감사하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주가 하신다. 저도 어제 여러 번 고백하기를 말씀으로, 말씀 앞에 앉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실감하고 있었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 1:33).
그런 상황에 순종하며 말씀 앞으로 자신을 이끈 것에 나는 고마웠고 감사하였다. 여전히 자신의 한탄과 서러움에 짓눌려 고달파하는 일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으로 자신을 이끌자, 하나님은 속히 그 뜻을 보이셨다. 오늘 본문,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그 ‘살구열매’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한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영혼이다. 목사로서 저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가, 싶을 정도로 그의 행각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내가 듣고 뭘 어찌 해야 하나, 싶어서 만나자고 할까? 전화를 해서 욕이라도 퍼부어야 하나?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니 내 속이 그런데 같이 사는 이로서 그 패악을 다 받아내야 하는 저이의 심정은 또 오죽했을까?
어느 순간 저도 나도 더 이상 그런 말(!)은 계속 떠벌이고 부정적인 말로 속상함만 풀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같이 말씀을 폈고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말씀은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주가 하신다! 말씀으로 하게 하시자. 저이는 말씀을 폈고, 자기 혼자라도 말씀 앞에 앉으려고 이른 아침 시간을 확보하였다. 그러자 말씀이 응답하신 것이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86:5).
결코 전에 있던 일로 시비를 붙고 이를 트집 잡아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소망을 알게 하신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71:5).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은 말씀으로다. 어제는 어디 새로운 사역지를 찾고 있는데 그게 딱히 여의치 않음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듣다보니 벌써 그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이 뜻을 합하여 이참에 개척교회를 시작함이 어떠할까? 하고 저이에게 권하였다. 어느덧 마흔이라, 언제까지 부교역자로 전전긍긍하기에는 나이가 찼다. 무엇보다 부교역자로 있을 때와 실제 자신이 직접 하나님과 맞닿아 교회를 이루어 가는 일은 전혀 다를 거였다. 나는 나의 생생한 경험을 저에게 들려주었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그 생동감 넘치는 역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일이다. 맡기기만 하면 말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
주가 행하신다는 것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목격하고 피부로 느낄 수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 주의 피로 사신 곳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교회를 통해 교회로 하게 하심을 교회가 이로써 증거 될 것이다. 그러자니 믿음의 문제가 걸린다.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당장에 현실적인 문제로 갈등이 짓누른다. 실은 다 돈이 문제다. 한데 이는 가장 하찮다. 돈이 해결되면 교회가 바로 설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교회는 또한 알게 하신다. 결국은 믿음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건너갈 때 요단 강 앞에서 겪었음직한 갈등이다. 찰랑거리는 범람한 강을 보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법궤를 앞세우고 밟으라고 하신다. 밟으면 물이 마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저하며 물이 마르고 땅이 드러나면 딛겠다고 생각한다. 갈등은 끝이 없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이게 그렇게 어렵다. 맡기면 쉬운데 맡기기까지가 죽을 정도로 어렵다. 아이는 아직 어리지, 산적한 살림은 매순간 돈돈거리며 달려드는 맹수 같지, 우리 안에 또 하고 싶은 일은 많지, 그 모든 제약이 삽시간에 나를 휘감을 것만 같으니… 그러나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6).” 우리의 복종은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밖에는 감당이 안 된다.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더 4:16).” 또는 다윗과 같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편으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 34:1-2).
이게 어찌 말이 되나? 수치심과 번민으로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모멸과 환멸의 수간이었는데도 저는 주를 송축하고 주를 자랑하였다. 같은 상황에서 고라 자손들이 저들 조상의 일을 겪은 후에 깨달았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앞서 그 부모의 세대가 어떠하였는지, 그동안 자신들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당장에 처한 모든 현실이 어떠하든지, 주를 바람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역사를 한다. 앞서 있던 그 모든 수치와 모욕을 갚아주신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142:7).
주가 행하시는 데 있어 그 일이 가장 생생한 현장이 교회다. 나는 하찮고 우리 교회는 보잘것없으며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흠모할 것도 없으나… 그때마다 주가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날마다 매순간 체험하는 곳이다. 아이들이 묵상글을 쓴다. 그 가정이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교회로 향하였다. 나는 다만 ‘주가 행하실 것’을 확신하며 처음 온 아이들을 두고 기도로 시작하고 성경을 같이 돌아가며 한 구절씩 차례로 읽었다. 저들이 앞으로 어디까지 어떻게 변화될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말씀으로밖에 달리 들려줄 말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제 저 사모에게도 일러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목사는 더 이상 돈에 연연하지 말고 주변 일에 휘둘리지 않도록. 내가 보기엔 저이가 주도형이고 그 신랑 목사는 안주형이다. 주께 더욱 담대함을 바라며 스스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가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집중하기를.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항상 감사함으로 깨어 있기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하면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3).” 스스로 그와 같은 매임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매임은 자유에 놓임이다. 실은 여태 매여서 살아오지 않았나?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늦된 것 같아 매이고, 돈이 없어 매이고, 신랑의 사랑과 애정을 구하느라 저의 관심으로 매이고, 양가 부모들의 하나님 없음에 매이고… 매인 것들로 인하여 질식할 것 같던 일을 돌아보면 더 이상 매일 것도 없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4).” 주의 놀라운 역사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너무 연연하여 억매일 게 아니다. 저들은 모두 외인이다. 하나님을 나를 좀 보자 하시는데, 나는 자꾸 누구 타령을 하며 저를 내밀려고 한다. 아이 때문에, 신랑 때문에,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친정 부모 때문에… 이 끝 모를 매임에서 놓여나는 길은 주께 맡기는 것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교회를 이뤄가는 일에서는 더더욱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어느덧 나이 마흔, 아이도 훌쩍 커서 제 몫의 요구와 말을 한다. 어찌 당할까? 점점 더 자신을 옥죄올 텐데, 무슨 수로 이를 견디려는 것일까?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6).” 말의 응수는 말씀으로밖에 대응책이 없다. 저이는 종종 말을 하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얼굴을 감싸고 답답해한다. 나는 가만히 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결국 우리 영혼은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이는 늘 말씀으로 허기져 있는 것임을.
저들이 개척을 하든, 어디 부교역자로 나가든 나는 알 수 없으나 가정예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안도하였다. 먼저는 그 가정이 말씀 안에 세워져야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은 주가 하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나는 모처럼 반가운 소식에 기뻤고 저의 밝은 표정에 감사하였다. 그런 거 보면 다 때가 있고 그 과정이 있는 것 같다. 회개 없는 회심 없고, 회심 없는 성장도 없다. 머리만 자라면 든 게 많아 자신이 아는 것으로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무거운 머리를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가슴만 뜨거우면 것도 허풍만 들어 무슨 뜬구름 잡듯이 늘 남과 비교한다. 우리의 기준이란 게 누구처럼, 어떤 교회 같이… 남의 손에 들린 떡만 본다.
이를 한 방에 없애는 방법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자신에게 주시는 바 그 능력을 가지고 마땅히 행할 길을 걸어갈 뿐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남들이 다들 어쩌면 뭐하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겠나? 내게 주신 은혜로 족한 것이다. 생각보다 저마다의 재능이 뛰어나다. 각각의 달란트가 있다. 두 개면 어떻고 다섯 개면 어떻겠나? 어쩌자고 한 개뿐인 것을 남과 견주어 그대로 안주하였던 것일까?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마 25:28).” 아, 이런!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 저의 탄식을 주가 들으셨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시 6:6-7).
그런 그에게 주가 응답하셨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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