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전봉석 2022. 1. 27. 05:19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민 16:30-31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기껏 좋았다가 기껏 또 싫어지기도 한다. 이는 저마다의 바람이 다르고 각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기껏 성전의 봉사자들로 주의 일에 힘쓰던 자들이 서로 패가 갈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민 16:1).” 저들의 불만이 표출된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3).” 곧 자신들도 그 위신과 처지를 대우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 모세가 그들 무리의 주축이 되는 고라를 설득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9).” 서로 맡은 바가 다르고, 그 일을 진행함이 얼마나 귀한가? 또한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하는 말이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13).”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주축이 되어 광야 생활의 고단함을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에게 항변한다.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14).”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저들이 돌이킨 광야로의 생활이 어느덧 38년이 흘렀다. 저들의 반기에 250명이 동조하고 나섰다. 주동자 고라는 모세의 친척으로 레위인이었다. 자신들의 불만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를 대적한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땅이 입을 벌려 저들을 삼키게 하셨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민 16:30-31).” 이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저들을 다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후손들을 남겨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 봉사하는 자들로 세우셨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26:10-11).” 그런 저들의 후손은 대대로 남아 성전에서 찬송 맡은 자들로 봉사한다. 더욱이 저들의 찬양은 더욱 빛나고 깊게 울리는 것 같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이 시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곧 교훈이다. 저들은 그 조상들의 반역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목격하였다. 자자손손 이를 알려 더욱 더 주 앞에 온전하기를 간구하게 된다. 그리고 저들의 찬송은 성전에서 모두가 함께 부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비록 그들의 조상 고라는 무서운 형벌로 죽었으나 저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두고 오히려 주 앞에 각성하고 더욱 더 온전하여지기를 간구한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저들의 시편은 10편이나 성경에 실렸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우리 주 앞에 온전하다는 것, 이는 결국 주의 마음으로 헤아리고 그 헤아림으로 자신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일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과 같아서, 상대 눈의 작은 티를 두고 뭐라 하면서 정작 자신의 눈은 들보로 가리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들보는 지붕을 얹을 때 칸과 칸 사이, 두 기둥을 ‘ㄴ’ 자와 ‘十’로 받치는 나무기둥이다. 티와 나무기둥, 예수님의 비유법은 참으로 놀랍다. 결국 이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 하여 겉만 보기 좋게 꾸미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

 

오늘 본문에서의 고라와 그 당파를 지은 자들의 소란과 불만이 그와 같았다. 결국 자신들의 반역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배회하는 신세로 지낸 것인데 이를 두고 공연히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두렵기만 하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민 16:20-21).” 그러자 온유한 자 모세는 곧바로 엎드려 주께 아뢴다.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22).”

 

예수님은 저런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그러니까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는 데 따른 아까움을 에둘러 하시는 말씀이다. 개가 어찌 거룩을 알겠으며 돼지가 어찌 진주의 값진 소중함을 알기나 할까? 하물며 우리에게는 아는 만큼 구할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8).

 

이 놀라운 기도의 원칙 앞에까지 왔다. 고라와 그를 따른 무리들의 불만과 비난을 보다, 우리의 비판함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바른 자세로까지 알게 하신다. 가령 어제는 아이들이 오기 전에 주 앞에서 마음이 어려웠다. 가히 아이들의 무기력증은 심각하였고, 아무리 격려하고 독려해도 이미 학습된 저들의 행동반경은 꿈쩍도 않는 것이다. 아이들이 쓴 성의 없는 한두 줄짜리 글을 보다보면, 내가 굳이 이 일을 왜 하나? 싶은 마음도 든다. 이런저런 회의와 갈등은 언제든 나로 하여금 해야 할 일을 못하게 가로막는다. 생각이 너무 많다는 건 때로 하기 싫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럴 때 ‘나를 쳐 복종시켰다.’는 바울 사도의 자기고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든가 말든가, 때론 내가 나 자신의 이런저런 합리적인 생각부터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예전 같으면 벌써 관뒀을 일이다.

 

아이들이 오자 나는 평소처럼 기도로 시작하였다. 잠언을 읽고 각자의 묵상글을 쓰게 하였다. 이는 <독해, 요약, 논술>이라고 하는 글쓰기의 가장 기본 원칙에도 해당된다. 자꾸 읽고 생각해야 독해 능력이 는다. 그럴 때 요약도 가능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모든 아이들이 너무 안 읽는다. 교과서 외에 여느 책에 관심이 없다. 각자 가장 신형 핸드폰을 들고 있고 이를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 보는 게 익숙해지면 읽기를 싫어한다. 읽기는 단지 글자뿐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도, 사회의 현상도, 오늘 날의 이 모든 실상도 읽어 내지를 못한다. 아니 그 자체로 관심도 없다. 나는 이러한 실태를 알아듣거나 말거나 가르친다.

 

문득 예수님의 심정을 알겠다. 당장 처한 현실 외에 관심도 없는 자들에게 복음이라니! 그러니 그 복음의 가치를 알 리 없고, 그럼에도 주님은 다시 또, 다시 또, 결국에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자신을 드리고 자신을 나타내심인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공염불을 외우나 싶다가도 그런저런 나의 생각을 스스로 대적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늘 나는 속으로 다짐하듯 되뇐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남들은 모르지만 이곳은 교회라. 누구의 건물 그 한 귀퉁이에 이름도 빛도 없이 명분만 있는 것 같으나 ‘저 한 영혼’을 위해서이다. 나는 자주 그렇게 스스로를 독려한다. 그럴 때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쳐난다. 코로나에 오미크론에 기하급수적인 확진자 숫자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아이들을 앞에 두고 94마스크를 쓰고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해야 할 일’을 다한다. 주가 보내신 바라. 한 가정은 이제 아이들뿐 아니라 그 부모가 코로나 이후 다시 교회로 예배를 나가게 되었다. 비록 아직 두 가정은 그 부모들이 요지부동이지만 아이들이 먼저 묵상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 줄짜리면 어떻고 두 줄짜리면 어떻겠나? 매일 말씀을 앞에 두고, 가만히… 그러다 점이라도 찍어라, 괜찮다! 하는 나의 말의 의도를 아이들은 알아들었을까?

 

내친김에 어제는 시편 1편과 고린도전서 13장을 2월 중에 암송하기로 하였다. 내가 저 나이 때 외운 것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외우고 있다니까 아이들이 놀라워한다. 나름은 상금도 걸어서 우선은 다들 해보겠다고 들썩거리는 했는데… 하고 안 하고, 뭔가 이뤄지고 말고는 내 몫이 아니다. 성령으로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리 설명해주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그렇다면 이를 읽고 이해하게 하시는 것도 성령이 하신다. 우린 다만 성경 앞에 앉아 읽을 뿐이다. 어려워요! 하는 말에 나도 어렵다! 하고 답해주었다. 당연히 우리가 알아듣기에는 어렵지. 이게 어제오늘 일이겠나?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그러니 어쩔 것인가? 저들 가운데 그래서 떠난 이가 많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그만두겠다면 별 수 있겠나?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이와 같은 대답이 누구의 것이 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하루 동안이 ‘오늘 일’을 감당할 뿐이다. 설령 하나마나 한 일이 된다 해도 그것이 내게 두신 일이라고 여긴다. 어떤 기대나 성과를 바라고는 못하겠다. 예전에 글방 선생으로 있을 때는 그러느니 다른 일, 다른 아이를 가르치겠다며 내 멋대로 아이를 그만두게 하고 좀 더 나은 일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어제는 이와 같은 내 솔직한 본심도 다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어찌 들으면 감정 상할 일인데.

 

주가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어떻게 이 길을 계속 가겠나? 가까운 인친척이 다녀가면서 저의 눈에 이곳이 주의 전이기보다 ‘부러운 개인 공간’ 정도로만 여겨진다면, 이 또한 내가 말해 무엇 하겠나? 나는 누가 온다고 하여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하자고 할까? 그러려고 오나? 무슨 요일을 빼야 할까? 저가 오기 전에 혼자 궁리했던 일이 우습게 되었다. 가만히 입을 다무는 것도 일이다. 싫든 좋든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일이다. 비록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된다 해도, 심지어 아이들에게 토요일 오전에도 오라고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그래놓고는 문득 드는 생각이 이러는 게 나인가? 내 속의 주의 영이신가? 하고 갸우뚱하였다. 뒤미처 누가 오고, 전날부터 생각했던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저가 돌아간 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나인가? 내 속의 주의 영이신가? 하고….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주의 길은 우리 구상대로 가는 게 아니다. 그리 되는 것도 없다. 뭘 받다 들었다 확신하며 헛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나는 경계한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성경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를 묵상할 때 주는 늘 보이시고 말씀하신다. 어려운 마음도 즐겁고 보람된 마음도 모두 주의 것이라, 나는 이제 그리 확신한다. 점점 더, 처음 믿었던 때보다 가까워지는 게 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1).

 

말씀 앞에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이와 같은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시다. 신기하지? 나는 그리 확신한다. 아이가 성경을 찾아 읽기만 해도, 그러려고만 해도 앞서 성령은 저와 함께 하실 것이다. 곧 오늘 우리를 이끄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가 아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1-2).” 비록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고라의 반역이 없었다면 고라 자손의 간절하고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찬송이 또 있었겠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 84: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예상 밖이다. 오늘 다윗의 시편에서도 나는 저의 아침을 사랑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아이들 단톡방에도 매일 나의 묵상글을 보내놓는데, 물론 한 명도 안 보지만 나는 확신하는 게 하나 있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고, 언젠가 저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 다윗의 아침이 오늘 나의 아침으로,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하는 고백을 오늘 나처럼 사랑하게 될지… 그리하여,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7).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