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전봉석 2022. 1. 31. 05:16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1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시 9:13

 

 

미리암이 죽었다(1). 광야에서 아론도 죽었다(22-29). 때가 되면서 하나둘 죽고, 백성은 므리바에서 반역을 하고(2-13), 에돔은 자신들의 땅으로 지나가는 것을 거절하였다(14-21). 광야 생활로 38년 되는 때 가네스 바네아에서의 일이다. 보면 늘 원망이 앞선다. 그간 하나님이 어찌 하셨는가를 알 텐데, 소위 므리바 물 사건은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반역의 심성을 보여준다. 이에 모세는 기도한다. 기도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6).”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하셨다. 그리고 일러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8).”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10-11).”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였고 그 영광을 실추시켰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 그 일로 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긍휼과 거룩하심에 있다. 우리의 죄악이 붉을지라도 주는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홀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한데 모세는 분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시켰다(10). 반석에서 말하면 될 것을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이는 하나님은 불신앙으로 규정하셨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12).” 예사로운 일로 여겨 그럴 수 있듯 행한 일일 텐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마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행사하였다. 사사로운 일 같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하나님의 영광 그 여섯 가지 약속을 알려준다. 첫째는 아낌없이 베푸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여기까지 인도하시며 함께 하실 때 저들도 이를 알고 그때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을 텐데.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언제나 받은 것은 적은 것 같고 받아야 할 요구는 넘쳐나는 법이다. 우리의 이 심성의 함정을 누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 하나님은 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 지레 모자라고 답답해하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으로다.

 

둘째,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악이라도 선으로 갚으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6:11-12).” 당장의 현실이 우리를 어렵게 하나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닌 것은 ‘하늘에서 상이 큼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끝까지 그 경주를 다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저는 부르심의 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곧 세 번째 하나님의 약속은 장래 우리가 받을 은혜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다. 이를 위해서도 청결을 훈련하고 연마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때론 이를 위해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이를 알고 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약속은 주의 영광을 전하는 자에게 더하시는 능력이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내가 뭔가 준비하고 갖추어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신 바 그 처지를 다함으로 충분하였다. 이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4).” 미련을 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예비 된 면류관이 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우리가 지금은 다 알 수 없으나,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곧 우리를 위한 긍휼의 그릇이 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하심이 담겼다.

 

다섯째는 그런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막아주신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고 이를 증명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이를 가리고 숨길 필요가 없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엄연하여서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주의 이름이 우리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심에 합당한 기쁨을 얻게 하시며, 선을 이루시고 능력을 더하시며, 믿음의 삶으로 예수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모든 게 그분 안에서의 영광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옥 같은 고백을 남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를 알기까지, 모세의 불신앙과 그에 따른 결과도 큰 교훈이 되지 않았을까? 저로서는 그럴만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누군가를 인도한다는 일은 어쩌면 날마다 자신과의 싸움이겠다. 그러므로 주의 영광은 우리가 주를 우러르며 주께 그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는 일에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하나님은 주의 백성으로부터 주의 이름이 불리고 도움을 간청하는 소리를 기뻐하신다. 곧 우리가 예수 안에서의 만족은 그 결정적인 단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하면서 자신의 어떤 권위도 업적도 능력도 이루었다 하는 기념할만한 일도 모두,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 놀라운 만족, 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4:11-13).”

 

이와 같은 고백이 또는 실제의 삶이 나에게도 가능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이는 어떤 불안과 불만과 불신앙적인 요소에 대해 나는 늘 부대낀다. 잘 알면서도 또한 여전한 나와의 싸움은 때로 치열하다. 오늘 모세의 심정과 저의 행동에서 나는 저의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려 38년, 광야에서 단련된 세월이 저나 저의 백성이나 모두는 동일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고 그때마다 도우시고 살피시고 인도하셨는가를 저들도 모를 리 없다. 한데 그 한 순간, 천하에 온유한 자 모세도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내려쳤다. 저는 후에 가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자신도 들어갈 수 없는가 하고 주께 아뢰기를 하였으나 끝내 허용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신 4:21).”

 

때론 간결하고 때론 가혹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열정은 오늘도 여전하시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시 96:3).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지 않으신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 오롯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사 12:4-6).

 

어쩌면 오늘도 우리에게 한 날의 삶을 더하시는 것이 주의 영광을 보게 하려 하심이고, 이를 나타내어 증거 하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 11:40).”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가 우리 삶을 위협적으로 엄습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까?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9).” 이는 하나님의 열정으로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3-14).” 하나님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이 성령을 우리 가운데 두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고로 오늘의 이 한 날 한 날이 예배라.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설 연휴가 시작되고, 코로나 정국은 여전하고, 대선을 앞둔 민심은 요동을 치는 이때에,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시 9:13).

 

일련의 사태에서도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4).” 하는 시인의 기도를 작은 소리로 따라 읊조리게 된다. 하여,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1).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2, 13).

 

그리하여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