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민 22:28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 11: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서로 건네는 덕담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복은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서로가 바라는 게 다르나 결국은 자기만족으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이번 설 예배로 드리면서도 과연 우리가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할 복이 무언가? 내가 바라는 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빌어주는 복은 자칫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우선은 오늘 본문의 복, '발람의 나귀'가 본 것을 말하여 들려주는 복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지 못하면 짐승이라도 눈을 열고 이를 대신 본다.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 발람의 길을 막아서며 저의 나귀는 주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섰다. 이를 알지 못하고 발람은 나귀를 때렸다. 그러자 나귀의 입이 열렸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 22:28).” 하고 주인을 나무란다. 우리가 전해야 할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못할 때, 길가의 돌이라도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시는 이시다. 흔히 미련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를 두고 ‘돌대가리’라 하는데, 성경에 비추어 보면 돌도 다 듣는다.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수 24:27).”
그러니 돌보다 못한 사람과 나귀만도 못한 사람이 흔하다. 해여 나는 어떠한지, 어제는 설을 보내며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 인사를 예사롭게 건넸다. 누구나 복을 바라고, 복이라면 개똥도 주워 먹을 판이다. 한데 어떤 복이냐 하는데는 그리 관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하는 말 정도로 막연하지만 하는 일 다 잘 되길 비는 정도이니, 그 복이 온당한가 하는 문제는 한 번쯤 심각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이 아무리 유용해도 누가 어찌 쓰느냐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한다. 돼지에게 진주나 개에게 귀한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그러니 복의 근원과 그 출처를 알고, 그 복의 통로가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행여 짐승이나 돌만도 못한 존재인데 저에게 더해지는 과분한 복이 되레 저의 인생을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먼저는 복의 길에 대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여기서 '경외'란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뜻한다. 그 길은 길 도(道) 자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이는 구원의 길로 궁극적인 복의 원천으로 향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우리가 주를 섬김으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진정한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되묻는다. 이를 위해 허다하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도 자처하였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그 중에서도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3-24).” 그야말로 제 발로 복을 찼다. 애굽의 실권을 쥐고 주인처럼 굴림할 수 있었던 자가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붙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주를 경외함이었다. 이를 위해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36).” 저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못 배우고 미련해서도 아니다. 그러한 지혜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혜안이다. 이를 보고 들은 ‘발람의 나귀’도 ‘여호수아의 돌’도 가능하였다.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1-2).
이에 시인은 복의 출처와 형통의 비결을 동시에 알려준다. 첫째는 시온의 축복으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5).
시온은 다윗이 이룬 예루살렘의 총칭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장소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9:11).
시온은 근본적인 축복의 발산지이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6).
이는 다윗성으로 다윗이 그곳으로 옮겨간 후 하나님도 그곳으로 택하셨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총을 예상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2:13-14).
그곳이 곧 성소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20:2-4).
시온에서 찬송이 나온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65:1-2).
결국 우리로 성소를 향하게 하심은, 오늘에 이르러는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이 전파되고 찬송이 이어짐을 의미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34:1-3).
이에 우리는 시온에 선다. 이는 예루살렘이라 하여 오늘에는 교회를 중심으로다. 교회는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로 모인다.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사신 곳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그러므로 우리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셨다. 나아가 우리 몸이 거룩한 주의 교회가 되게 하신다. 우리 각각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리하여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결국 ‘귀 있는 자’만이 듣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3).”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이것이 누구나의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었으니, 발람의 나귀도 보는 것을 못 볼 사람이 수두룩하다. 곧 우리가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하는 첫 번째 복은 시온의 복이다. 이는 보게 하는 눈이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를.
두 번째 빌어주는 복은 저의 형통함의 복이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2).
일찍이 죄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았다. 그 결과 모두에게는 먹고 사는 일이 중책이 되었다. 그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땅은 저의 수고만큼도 결실을 내어주지 못하게 되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이는 모두 죄의 결과다. 그러니 다들 사는 게 고역이다. 벌어먹고 살기가 여간 고된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죄로 온 인류가 맞이한 숙명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라고 한다면, 오늘 나로 나의 다음 세대의 복도 가늠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우선은 지혜자가 그 헛되고 헛됨을 알린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2-4).
그런데 놀라운 은총은, 거기에서 주의 형통함을 보이신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7).” 그럴 수 있는 자격도 명분도 없는데, 이것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세 번째 복은 가정의 복으로 우리들로 인한 자녀들의 축복이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 128:3).
포도나무는 본래 무엇엔가 의지하여야 열매를 맺는다. 포도원에 가보면 가지마다 어디에 얹거가 묶어 둔 것을 보게 된다. 곧 부부란 서로의 의지다. 으르렁거리면서도 서로가 없이는 못 사는 사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감람나무 같아서, 자자손손 그 축복의 언약은 이어질 것이다. 즉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우리로 그치는 축복이 아니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9-12).” 곧 자자손손의 복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시 128:5-6).
이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92:12-15).
곧 우리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무심히 건네는 덕담의 인사는 이처럼 무겁고 진중하며, 어마어마한 속뜻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된다. 그저 가벼이 건네고 마는 인사말 정도가 아닌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7-18).
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나는 발람의 어처구니없는 소행을 지켜본다. 오히려 ‘발람의 나귀’가 복이 많다. 본 것을 보는 눈과 ‘여호수아의 돌’이 복이 많다. 들은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것이 복이다. 이를 묵상함으로 새삼 어제 내가 누구에게 건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흔히 건네는 말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이를 우리는 책임져야 한다.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그저 단순히 지나가는 말처럼 툭툭 건네고 던질 말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일로 그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다들 목숨 걸고 죽기 살기로 사는, 안간힘을 보면서 하물며 영생의 일을 두고는 더더구나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또 하나, 오늘 나에게 두시는 복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로 어떤 복을 빌어주는가? 하고, 말씀 앞에서 새삼 나의 가벼움을 두고 회개한다. 복의 근원도 출처도 분명치 않으면서 함부로 또 누구에게 이를 마구잡이로 건네는 말로서는 복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이에 성경의 기본적인 복의 출처와 그 통로와 결국을 살필 수 있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 놀라운 복의 복을 약속으로 받았음에도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행여 ‘여호수아의 돌’과 ‘발람의 나귀’만도 못한 사람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한다 한들 싸우자고 덤빌 뿐이니, 함부로 입을 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 소린 아닌 게 틀림없다. 오늘 시편도 이를 한탄하는 게 아니겠나?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 11:1).
우리가 아무리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었다 해서 이를 사랑하는 이에게 무턱대고 전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발람은 그 일로 자신의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다. 우리의 정중한 권함이 저에게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우리가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심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들을 것을 듣고 볼 것을 본 이유로 우리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덕담 한 마디가 저와 나를 곤란하게도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결국은 주를 바랄 수밖에. 인생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이께 정직한 자로 서는 길밖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4,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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