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전봉석 2022. 2. 9. 05:28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민 29: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하시는 명령이 1, 7, 12, 13절에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이번 29장에서 나팔절, 대속일절, 초막절(장막절)을 다시 환기시키고 있다. 저들의 7월이 우리의 1월인데, 아빕월이라 한다. 이 날은 거룩히 모이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는 또 죄 용서의 기쁨을 누리게 하심이다. 7월 10일이 되면 저들의 대속일이 시작된다. “일곱째 달 열흘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민 29:7).”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체험하고 이를 깨닫는데 여느 일로 분주하면 산만하였을 터. 속죄일에 자신의 죄로 애통하며 회개한 후, 초막절에는 이를 기쁨으로 누렸다.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이레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12).” 그리고는 할 수 있는 한 성대하게 감사하였다(12-38절). 이 모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잊지 말고 따라야 할 규례와 절기에 대한 말씀이다.

 

그럴 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강조의 말씀에서 새삼 우리의 분주한 일상이 늘 우리로 주를 온전히 바라지 못하게 함을 알린다. 내게 한 친구가 있는데 저는 늘 바쁘다. 하는 일이 건축 설계에서 감리까지니까 늘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러다 보니 늘 우선순위가 회사 일이다. 주말에는 녹초가 되고 주일은 종종 다른 볼 일로 예배를 미루고는 한다. 어제도 저와 전화 한 통 하는데 제대로 이런저런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바빠서 성경 읽을 시간은커녕 예배에 참석하는 일조차 분에 겨운 일이다. 일이 없는 날에는 일이 없어서 또 기다리는 일들이 산적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위안처럼 ‘바쁜 게 좋지!’ 한다. 이는 우리가 성별된 자들임을 알지 못할 때, 믿지 않을 때 하는 소리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성경은 일러, 자신보다 귀한 것은 없다. 내가 귀한 것은 주께서 쓰실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에 합당하고자 하는 데 있다. 곧 모든 선한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함이 필요하다.

 

가끔은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면 정신이 없다. 그럴 때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가 ‘남들처럼 주를 섬기려 한다!’ 누가 이런다니까, 저가 어떻다니까 그리 행함으로 자신의 못함을 무마하려 드는 것인데, 하나님은 언제나 개별적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전체적이시면서 개체적이시다. 하나하나 그 하나의 인격체로서 주를 만나야 한다. 이때의 공통된 준비가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온유하여짐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그러나 성경이 우선이다. 곧 모든 게 먼저 되는 게 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선순위가 확실하지 않을 때 나중 것과 덜 중요한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와 ‘나중’의 원리가 분명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곧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왜 오늘도 하루를 더 허락하심인지,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삶이다. 이를 위해

 

첫째, 자신의 정신적 습관을 바로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살피라는 것과 이 일을 계속하라는 것.’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 이는 모두 구원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구원 받은 게 맞는다면) 그에 합당한 삶으로 자라고 성장하여 이루어야 할 구원도 있다. 이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자격이고 거기에서의 삶을 위한 준비다. 마치 어제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가나안을 기정사실로 할 때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나누고, 오늘은 그곳에서의 ‘집중과 열심’의 목표를 바로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의 자세이기도 하다. 단지 여기서 사는 게 전부이고, 저와 나의 관계로 끝이라면 더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한데 이는 모두 ‘더 나은 구원’을 향한 것으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이를 앎으로 인내한다.

 

곧 우리의 정신적 습관을 바로 길들여야 하는 이유다. 하면 최상의 목적을 알게 되는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우리의 미련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안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은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내와의 성경공부에서 상대적으로 질문이 많고 말이 많은 것에 그 문제성을 알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놓지 않음으로 실상의 것을 더디 받는다.

 

실은 남보다 어려운 게 가족이라고, 나 역시 여러 번 인내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누구 일에는 몰라서 주저하게 되고, 가족 일에는 너무 잘 안다는 선입견으로 훼방이 놓인다. 결국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때론 자존심을 때론 사회적 통념을 들먹이며 가로막기 일쑤다. 나는 아내의 질문에 일일이 다 설명을 한다. 그러느라 생각했던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종종 일상의 이야기로 흐르기도 한다. 그럴 때 내 안에 주시는 마음은, 서둘 것 없다! 조급해할 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각 중요한 절기에 하던 일을 멈추게 하심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리 이해한다. 그럴 때 개인적인 은사가 각기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나와 성격이 참 많이 다르다. 활달하고 명랑하고 낙천적이며 자기애에 충실하다. 이는 모두의 은사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누구처럼’ 하려 하는 것, 신앙의 모방은 방해가 되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다르다. 은사에는 더 좋고 더 나쁜, 누가 귀하고 누가 덜 귀한 게 없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4-15).” 이를 성령이 유지하시고 보편화하신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묶으시는 일이다.

 

우리의 한 가지 일, 오늘 시인의 노래가 그것이 아닐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나는 여기에서 ‘나의, 내가’ 하는 시어에 주목한다. 남의 하나님이 아무리 어떠면 뭐하나? 믿음의 조상이 어떻고 바울의 사역이 어떠면 또 뭐하나? ‘나의 하나님’을 향한 ‘내가 행할 일’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에 시인은 모든 어절마다 일부러 강조하는 것 같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

 

‘나의, 나를, 내가’ 하는 모든 주어가 나다. 여호와는 그 ‘나의’ 구원이시고, 방패시고, 바위시며, 요새요, 산성이신 나의 하나님이시다. 남이 아무리 어떠니 하며 간증하고 감회하는 하나님으로는, ‘나의 하나님’을 실감할 수 없다. 곧 영적으로 나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그럼 먼저 피해야 할 게 무언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솔직히 왜 바쁜가? 왜 그렇게 분주하고 바빠서 정신이 없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실은 다 돈 때문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데, 나는 종종 우리나라 속담이 참 어이가 없다. 하긴 ‘정승처럼 벌어서 개처럼 쓴다’고 하면 그게 더 꼴사나운 일이겠으나, 죽어라 하고 개처럼 벌면 개처럼 쓰게 돼 있다. 개가 정승이 될 리 없듯이,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여유가 생기면 그때는 책도 읽고 여유있게 성경공부도 해야지, 하는 누구 말에 나는 종종 이 속담이 떠오른다. 개처럼 벌면 개처럼 쓸 뿐이다. 왜?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

 

누가 또 부고(訃告)를 전했다. 아직 젊은데,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내가 이제 잘하려고 했는데… 하는 말들이 그 뒤를 잊는다. 들음으로 안타까워 덧붙일 말이 없으나, 우린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나눔으로 산다. 이는 천국을 준비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나는 늘 저 친구에게 성경공부를 마저 마치고 가르치는 자로 살기를(저의 교회는 평신도 성경공부로 유명하고, 서로가 배우고 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그럼 어찌 될까? 딱 오늘의 저의 실상과 같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 주변에 너무 안 믿는 스승이 많다. 누구와 골프를 치며 저의 인생사를 듣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는다. 어느 선배의 성공사례에 주목한다. 누가 어디 용하다고 하니 그 사람을 찾아간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뭐라 한들, 내 말이 저는 지겨운가? ‘또 그 소리!’ 하고 바쁘다며 얼른 통화를 끊으려 한다. 만남은 소원해지고 서로의 안부는 가뭄에 콩 나듯 희소하다.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벽 앞에서 나를 거울삼아 본다. 누구의 성공담보다 실패담이 내게는 더 선명한 모습을 비춘다.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는 담임 목사나 어느 존경할 만한 위인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말 나온 김에 어제 이른 아침 누구의 전화를 받았다. 저가 섬기는 교회의 부교역자로 있던 목사님이 사임을 했다. 저가 맡았던 교회 외부의 카페나 하던 성경공부는 그대로 하면서 독자적인 목회(?)를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 교회가 있는 셈이 됐고, 그 교회에 두 교역자-담임 목사가 공존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인데, 저들 사이에 어떤 허용과 이해와 타협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게 물으니… 글쎄. 누구나 우려할 만한 일을 두고 구구절절 말을 한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라 그가 어떠하든지 사람이다. 모세는 모세이고 다윗은 다윗이다. 저들은 완전한 자인가? 당대의 완전한 자라 일컬음을 받은 인물이 있다. 저는 노아이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하지만 저가 과연 그러할 수 있는 것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서다. 고로 나는 의인이다. 나는 완전하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다.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거나 뭐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굳이 신뢰하지 않는다. 훌륭하나 모자라고, 존경할 만하나 저도 사람이라. 스스로 이를 알지 못할 때 사탄보다 사탄 같은 주의 종도 있다. 이에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주만 바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의 가장 두려운 점은 노동을 잃는 불안일 텐데,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오늘 이 시 한 구절로 그 의미가 뚜렷해지지 않을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 이를 여러 번 되뇌며,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이러한 확신, 그 실현을 목격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때에 미처 몰랐던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19).

 

이러한 확신과 체험이 없는 신앙은 빈곤하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 같다. 그럼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1-22).

 

좋으니까 더 좋은 것이고 사랑하니까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싫은데 좋으려니까 부대끼고,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려니까 그 사랑이 고역 같다. 사는 게 지옥이라. 저에게 나의 말은 마치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 ‘바빠, 나중에 통화해!’ 하고 또 다시 미룬다. 그러니 참…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15-27).

 

이에 오늘도 나의 축복은 다른 게 아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8).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