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민 30:2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 19:13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의 약속, 서원의 규례에 대하여는 민수기 6장과 레위기 27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오늘 본문은 특히 여자의 서원으로 한정하여 아버지의 허락여부와 남편과의 관계에 따라 다루고 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라반의 집으로 가면서 벧엘에서 꿈을 꾸고 서원한다(창 28장). 이때 하나님 앞의 세 가지 약속을 하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지켜주시면 자신도 다시 이곳으로 오겠다는 것, 이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다는 것, 얻게 하신 제물의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것. 그가 이 약속을 지킬 때 하나님은 저와 동행하셨고, 그 약속을 어기고 세겜을 갔을 때는 저와의 동행을 철회하심으로 그의 딸이 세겜 땅에서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할 수 있는데 여자의 경우로 예를 들어 저가 처녀로 살기를 서원하였으나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결혼 후 남편이 저의 서원에 반대해도 이는 무효가 된다. 어떤 의미로는 예외조항이며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를 세움으로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신다. 이를 상하관계 또는 종속적인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복종하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또한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해야 하는 엄연함이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
서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보다 나은 삶으로의 결심이고 충일한 마음인데, 그만큼 또 우리는 연약하여 이를 변개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하고, 함부로 서원하지 말 것을 예수님은 이르시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약속을 세워 이를 기준으로 사회의 질서로 삼으셨다. 원시언약으로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의 첫 번째 약속이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그 약속이 깨짐으로 서로의 신뢰는 무너지는 것이다. 서원, ‘네데르’는 하나님께 말씀드린 것으로 이행할 의무가 있다. 하여 결혼과 같이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잠 20:25).” 함부로 약속했다 이를 물리는 일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충동적인 서원은 나중에 덫이 되기 일쑤다.
서원은 자원하는 마음과 거룩을 사모하고 구별됨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레 22:21).” 우리는 흘겨 듣듯이 흘리는 말로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준행하신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하되 섣불리 할 건 아니다. 가령 나는 어릴 적에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하였다. 중2 때 세례를 받으면서도 또래 아이들과 같이 성경공부를 하며 이 약속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겨운 일’로 여겨져 그 약속을 스스로 파기했다. 곁길로 도는 세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이를 잊으신 적이 없다. 모든 어려움의 원인은 나의 경솔한 선택 때문이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한없는 은총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였다. 그리고 기어이 ‘끌려와’ 목사가 되고 보니 너무 먼 길을 돌았다는 후회와 또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어제도 아내가 일찍 나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 중에 그 내용에서 서로는 공감하였다. 행여 우리는 실수하고 또 거역하나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시며 기어이 주의 일을 행하신다. 곧 어제도 그런 고백을 했지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어찌 나 같은 죄인을 사하시고, 것도 모자라 이처럼 주의 일을 감당하게 맡기실 수 있을까? 하는 데 송구하고 민망하였다. 그렇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7-28).
가끔은 누가 나 같은 것을 부러워할 때 나는 의아하다. 내가 보기에 저는 사지육신도 멀쩡하고 보다 더 많은 주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사님이 부러워요!’ 하는 소리에 나는 가끔 아찔할 정도이다. 은연중에 저들도 아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약하고 모자란 것이 은혜인 것을, 나의 병약함과 그로 인한 주만 바람이 축복인 것을.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내가 받은 약함을 이제는 은혜로 여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몸이 약하다는 것, 어디가 늘 아파서 힘들다는 것, 마음이 약해서 안정제를 먹어가며 견뎌야 한다는 것. 이는 물론 피곤하고 심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일련의 사태에서도 모두가 확진이 되었어도 견딜만하고 그 가운데 감사가 넘치는데, 나는 며칠 째 평소보다 더 많은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불안에 시달리었다.
어제도 아내와 기껏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안정이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하여 평소보다 무리하게 약을 먹기도 하였다. 당연히 몸은 나른하고 피로감은 가중된다. 우리로 이 약함 가운데 주 앞에 세우시는 까닭은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이를 가지고 또한 복음을 향한 의무를 다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특히 요 며칠 아내와의 성경공부에서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아내 앞이라, 나의 나 됨을 두고 여러 생각이 많다. 나는 늘 죄의식에 시달리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으로 마치 피해망상 환자처럼 굴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조금만 아파도 어린 나는 그게 나 때문이라는 죄책이 있었다. 지금도 아이들이 좀 힘들거나 아내가 궁벽한 살림으로 어려워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그게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렇다는 미안함이 강하게 인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은 그와 같은 작동 버튼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로 툭, 하고 그 버튼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감정은 작동을 하여 요동을 친다. 어릴 때는 늘 그 ‘나 때문이야!’ 하는 자책으로, '나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나만 없어져도!' 하는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자라면서는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열패감으로 나를 몰아세우기 일쑤고, 그것이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하다 갑자기 또 총구를 바깥으로 돌리면, ‘너 때문이야!’ 하는 식으로 원망과 서러움이 저주처럼 쏟아진다. 종종 그 대상은 아내였고, 아내는 그때마다 난데없이 날아드는 포화 속에서 날벼락을 맞는 꼴이었다.
갑자기 찰스 웨슬리의 기도가 생각난다.
나 이제 정죄가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내 것이니
살아있는 머리 되신 주 안에 살면서
거룩한 의의 옷 입고
영원한 보좌 앞 담대히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내 것이 된 면류관 얻으리라
이를 시편의 찬송으로 옮기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1).
어쩌면 우리의 서원은 우리로 우리의 약함을 알게 한다. 주 없이는 이행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우쭐하며 스스로 서원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송구한 일인지. 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드는 수치심은 오히려 악한 마음으로 자신은 물론 남을 향해 총구를 겨누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함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지난 죄에 얽매여서 자책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주의 길을 갈 때 사탄은 지뢰처럼 우리의 죄의식을 깔아둔다. 갑자기 자격지심이 폭발한다. 열등감은 곧 수치심으로 남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한데 말씀은 우리의 모든 허물이 다 그 값을 이미 지불하셨다고 알린다. 이는 나의 의나 공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는 내가 죄를 짓거나 실패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고 못 가고,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약함을 성령은 아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무지한 말’과 ‘노새’와 같은 자기 고집으로 끝내 자신을 돌이키지 못하면, 요나와 같이 물에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저의 기도를 들어보면,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5-6)
어쩌면 우리의 서원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신의 약함을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기도하기를,
예수의 피와 의
내 아름다움, 내 영광의 옷이니
불타는 세상 속에서 이 옷 차려입고
기쁨으로 내 머리 들리이다
친첸도르프(1700~1760)는 19세기 독일의 경건주의자로 그리스도교를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키에르케고르도 저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 누구보다 경건을 사모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책과 죄의식으로 씨름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이지만 그와 같은 괴로움으로 교회와 복음을 향한 의무를 다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하신 뒤에 말씀은 이어서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6-27).” 이것이 우리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데 필연적인 것임을 알게 한다.
즉 믿음의 공동체를 향한 의무로, 우리가 누구의 어떤 아픔이나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19-20).” 곧 이 땅에서의 가족이나 가정이 영원한 나라에서의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그날에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을 누린다. 이를 은연중에 앎으로 믿는 자로서 믿음의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은 당연하다. 저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도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별로 와 닿지 않는다면 저가 죽은 영혼이거나 내가 죽은 영혼이거나… 느낌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창가에 기르는 화초도 물을 주고 살뜰히 돌보면 푸름이 더욱 푸른데, 내버려두면 시들어 곧 죽는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으로 서로를 대함에서는 어떠하겠나? 저가 자꾸 마음에 밟힌다.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속상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서로 그럴 사이도 아니다. 남의 처이고 남의 자식이다. 한두 번 권하다 말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게 어려워서 혼자 앓듯 주의 이름을 되뇌다 저를 뭐라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체, 척, 하는 시늉으로 감당이 되는 마음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다. 더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하여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도 더는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를 정죄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소리이겠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알면 알수록 주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또 귀한지를 안다. 아내와 가끔, 차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감격뿐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바울이 이 간곡한 설교의 바탕은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이 어떠했었나를 되새길 때일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서원, 하나님 앞에 더욱 바로 서기를. 주께 온전히 쓰임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의 마음으로 저들을 사랑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갚을 수 없는 서원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나… 나는 필사적으로 새벽에 일어나 묵상글을 쓰고, 늘 반복되는 나의 허약한 체질의 죄성을 주께 아뢰며, 이제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하는 데 있어 나의 약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한다. 그리하여 나는 강박증이라 해도 상관없다. 미쳤다 해도 도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전인적인 거룩을 단련하신다. 조금 길지만 베드로의 진술을 마디글로 옮겨 적고 묵상한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 1:16-21).
오늘 본문, 서원을 두고 묵상하다 내게 허락하시는 날들을 두고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하고 소중한지를… 이미 하늘과 모든 궁창이 선포하는 찬송을 들음으로 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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