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는 훈계도 꾸지람도 없이, 어른으로 살아가는 일은 오롯이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결국은 전쟁이 터졌고 아무도 선뜻 그 전쟁에 개입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명분은 그러다 세계 3차 전쟁이 날까 우려한다는 것인데…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 24:19).” 속수무책인 자에게 화이다. 쓸쓸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28).” 이러한 예언의 말씀이 우려가 아닌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 곧 우리로 주를 기다리는 재림신앙이 이와 같은 비극적인 현실을 참고 견디게 한다. 앞서 모세가 물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저의 설교는 요약되어,
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② 그의 모든 도를 행하라.
③ 그를 사랑하라.
④ 마음을 다하라.
⑤ 뜻을 다하라.
⑥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⑦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라.
하고 나무라듯 되새기게 하고 있다. 그러할 때의 성경의 약속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하는 것인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란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먼저는 그 말씀을 추구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2).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범사에 주께 감사하라는 것인데, 이는 명령이지 권고가 아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야말로 ‘난리와 난리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이때에’ 우리는 무엇으로 굳건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씀과 아직 끝은 아니라는 불편한 진리 앞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명령 뒤에 따르는 말씀이 귀하다. 내 마음의 소원이 무언가? 누구에게도 일러 두려워할 줄 모르면 만족할 줄도 모른다. 복종할 때 순종도 따른다. 사람의 속성은 본래가 죄를 더 사랑하게 돼 있다. 익숙하게 모두가 그리 사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만족은 명령이고 이에 따른 경고도 크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저는 죽었거나 그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아니하심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성령이 거하실 수 없다.
가령 사람의 몸으로 죄를 입고 십자가에 달려(십자가는 죄의 형틀로) 성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그와 함께 계셨던 그의 속의 성령 하나님은 절규하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고통의 절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함축적으로는 성령이 성자와 떨어지시면서 절규하는 소리다.
오늘도 우리는 밥 먹듯이 죄를 범하나 이는 활동성이 없는 죄성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0).” 곧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성의 값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회개가 없는 삶이다. 저는 구제불능이다. 우리 안의 충만하심이 없을 때,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8).” 우리는 번번이 굴복당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본질을 상실한 것과 같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감히 내가 나서서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만족 아니면 불만족뿐이다. 예외는 없다. 그 속에 하나님으로 만족함이 없을 때 다른 여느 것으로 채워할 공간이 늘어난다. 허기지고 빈 공간의 영혼에는 욱, 하고 치밀어 오르는 생목 같은 서러움뿐이다. 그것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유년시절의 상처일 수 있고, 부모에 대한 애정결핍이 사회적결핍으로 남았을 수 있고, 과도한 서로의 밀착이 실은 의존적인 게 아니라 억압을 위한 것으로 만성적인 위염 같이 속을 후벼댄다. 이를 게임으로 충당하는 것은 당장의 무료한 영혼을 술이나 마약, 성도착, 일집착, 자녀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악의 본질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소리친다. 겁내야 한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하고 여유부리며 넘길 문제가 아니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곧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2, 13).” 나는 누구에게 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에 대해 말하였다. 신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 같다. 아니, 나는 더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구제불능이었다. 차마 입으로 다 담을 수 없게, 남을 헐뜯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예사이고, 이런저런 일을 저지르는 데 있어 나보다 겁 없이 살았던 인간도 없다. 물론 건드리지만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뒤틀리면 마구잡이로 혈기를 부리고 화를 쏟아냈다. 그리곤 그런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또 그러고 또 그러는 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감히 말하지만 그때에도 주의 영은 나와 함께 계셨다! 긍휼히 나를 지키셨다. 죽을 고비도 아차, 하는 순간에 끝장난 뻔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안의 부끄러움이 이를 알게 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도망치듯 낚시를 다녔다. 일찍이 주를 알면서도 교회는 싫고 믿는 사람들이 싫어서 혼자서 그렇게도 차를 몰고 밤새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이 싫은 건 아닌데 어떻게 좋아하는지 몰랐고,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면서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내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숱하게도 하였다.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위로를 바라며 살았다. 어쩌면 내가 어느, 저 목사의 이런저런 지금의 상황을 들을 때면 그게 꼭 나인 것만 같아서 그 ‘짓’이 안 됐고, 그의 ‘탓’이 안쓰러운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풀어내지 못하면 장담할 수 없다. 저는 저러다 죽는다. 죽을 때까지 저런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두실 리 없지만, '자기의 맺힌 이야기'로 스스로 질식할 것 같으니까 저러고라도 버티는 것이다! 이를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알아주면 받아줄 능력도 안 되고. 그야말로 진퇴양란이라. 나는 사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런 나를 굴복시키시고 기어이 주 앞에 끌어다 ‘목사’를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지금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잘 안다. 상대적으로 저는 그런 여과과정이 없이 목사가 되었다. 그러니 저에게 있어 목사는 당위적이고 ‘의무감’에 따른 숙제다. 하기 싫은 숙제처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보다 선명하여졌다. 저를 만나야겠다. 두들겨 패든지 욕을 하든지 껴안고 울든지, 사실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주의 계획이 어떠신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제 사모에게 그리 말하였다. 물리적인 복종의 시간이 없이 주의 길을 가는 경우가 대체로 느슨하다. 뒤늦게 역경이 저로 알게 할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순종하면 참 좋겠지만, 본디 사람은 그리 생겨나질 않았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서로는 싸운다. 롯과 아브라함은 기어이 갈라서야 한다. 사라는 하갈을 내쫓아야 한다.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한다. 섞여 나온 무리는 씻어내야 한다. 그때까지는 별 수 없다. 안고 가는 이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똥인지 된장인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 그렇다고 그럼 은혜를 기다리며 나른한 오후를 보내듯 죄를 내버려둘 수 있겠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나는 사모에게 조금은 모질게 말했다. 별 수 없다. 맞아야 정신 차린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들려주는 교훈은 단 하나다. 순종 아니면 죄다. 당분간 사역을 접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디 기도원에라도 장기간 들어가 하나님과 자신적인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도 좋은데. 스스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누가 이를 강제하겠나?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하나님과의 담판이 필요하다. 단언컨대 누구는 새벽에 일어나서 게임을 하려고 일찍 잔단다. 내가 아는 누구는 술을 더 마시려고 주말이면 산행을 하고 건강을 챙긴다고 하는데. 하나는 목사고 하나는 의사다. 의사인 후자는 스스로 진단하기를 알코올 중독임을 인정한다. 알면서도 일주일에 7일은 술에 취해 지낸다. 그럼 목사인 저는 자신이 게임 중독자임을 인정할까? 은혜의 부정적인 역할은 과대망상이다. 자신은 그래도 되는 존재로 여긴다. 하나님 앞에 화인 맞은 양심이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특별한 은혜의 민족이었나? 그런데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저들이 그러했듯 오늘 내가 아는 저 목사도 거리낌이 없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위정자들이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주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고 자긍하였다.
세례 요한은 이에 분노하였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예수님도 분노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나는 어쩌면 누구 이야기로 나를 보는 것 같다.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닐 텐데. 그러고 나면 자신도 자신의 환멸에 치를 떨 텐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5).” 스스로를 숨길 수는 없다. 그 찔림을 무마하기 위해 역행하듯 화를 내고 더 큰 죄로 나아간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은 그러는 게 당연하다. 안 믿는 자보다 못한 자로 사는 목사들도 부지기수다. 사람이 악한 것에 대해서는 말해 뭘 하겠나?
결국은 돌이켜 주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데… 알아보지 못하면 가망도 없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역설적으로 저가 이를 알지 못하였다면 어쩔 것인가? 마치 아이에게 아무리 귀하고 값진 보석을 줘도 저는 그 옆에 놓인 솜사탕에 손이 간다. 결국은 실력의 문제이고 이 실력은 주가 내 안에 함께 하심으로 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이는 말씀을, 기도를, 예배를 사모할 수가 없다. 그래서도 우리 주님은 일러,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저가 꼭 목사여서만은 아니다. 사기꾼도 많고 장사꾼도 많다. 목사는 모두가 목사가 아니다. 내가 아는 누구는 약장수 같은 이도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말씀을 끼워 팔기도 한다. 누구는 선교가 낭만이고, 여행이다. 2년에 한 번 꼴로 그 교회는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들어보면 외유라고밖에 볼 수 없다. 형식적으로 어느 교회에 생색내듯 돈을 전달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현지 목사를 가이드로 하여 짧게는 3박4일, 길게는 15박16일을 관광지로만 경유하고 돌아온다. 교인들은 이를 위해 돈을 모은다. 별의 별 희한한 소리들도 난무하다. 성도들을 희롱하고 현지처를 두듯 은밀하게 그 짓거리를 하는 목사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저들에게 일러,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예수님의 말씀은 엄격하시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
오늘 본문으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그만큼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21).” 이를 알지 못하면 들어가고자 하는 가나안도 그저 전쟁터에 불과할 따름이다. 주의 종이 되어서도 사는 게 지옥 같은 사역자들도 많다. 늘 찌들어 사는 삶으로 그 안에 만족함이 없다. 그의 기쁨이 안 그런 척 하나, 돈으로 좌지우지 된다. 하지만 분명히 알 것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부디 이와 같은 고백이 강렬한 나의 고백이 되어, 주를 위해 죽기까지 살기를. 힘에 부쳐 나 자신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던 나를 이처럼 주의 종으로 삼으신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 35:1).
내 안의 죄성은 여전히 활동성이 있는 게 아니다. 죽은 것이다. 이미 다 치료가 끝나고 흉터만 남은 것처럼 더는 나의 영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길들여진 영혼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그 '짓'과 그 '탓'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 때부터 아버지의 아버지 것으로, 우리 민족이, 조상들이 그러고 살았던,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기질로 인하여 하나님도 그리 오해하곤 한다. 여전히 나를 흔들고 넘어뜨리려는 것은 죄의 습성이다. 아주 오래된 버릇 같이 또는 익숙한 몸짓처럼 우리 영혼을 어지럽힌다. 구주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구원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가나안 전쟁은 시작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별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잘 알듯 주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2-3).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심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이지, 천국의 값을 물으려고 하시는 게 아니다. 아는 자가 귀한 것을 차지한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 그러니 '극히 값진 진주'를 알아볼 줄 알아야 자신을 투자하지! 이를 모르니까 게임으로 허송세월이다. 술이 좋아 교회는 아예 엄두도 못 낸다. 내가 아는 누구 누구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은혜가 더더욱 귀하다. 할 수 있는 모든 다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 값어치를 알아야 가치를 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47-48).” 이와 같은 수고와 노력이 오히려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내 고향…> 무슨 프로에서 우연히 본 장면이다. 세찬 바닷바람에 그물에 낀 전어를 일일이 손으로 빼내고 있는 나이든 모친에게 리포터가 다가가 물었다. 안 힘드세요? 안 추우세요? 저의 물음은 형식적이었으나 노파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환히 웃음지어 더욱 골 깊은 주름으로 말하였다. 자식 너이나 공부 다 갈치고, 이제 다들 성공시켜 외지에 밥 술 뜨고 살고, 내가 이제 더 뭣이 더 힘들겠는가? 돌아가면 따순 집도 있것다, 뭘 더 바라겠는가? 하면서 여전히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손질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겠나싶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그리하여,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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