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신 12:8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는 우리가 지켜야 할 특별한 경우가 담겨 있다. 가령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신 12:26).” 하시는 말씀처럼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려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정하신 지파의 땅에서 순수함과 민족의 일체성을 보여야 한다. 이때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1-3).하나님께 헌신하는 제일 요소는 주변의 우상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이다. 이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러니 그것이 늘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다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장소에서의 예배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두려고 교회를 세우신다. 우리와의 만남을 위해, 드려지는 예배가 온전하기를 위해 희생 제사를 받겠다고 선언하신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11).” 곧 교회는 아무나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세우는 자리에서가 아니다.
다음은 그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8).” 여태 그러고 살았어도 더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회개란 여기와 저기가 다른 것이다. 지금과 그때가 다른 것이다. 죄란 그때는 옳았고 이제는 틀리다. 죄란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소견대로 하였다 해도 더는 나의 의지와 소견대로 하는 일들이 아니다.
이에 회개가 이루러지려면 직면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고(자기분석)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기도하며 일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는 먼저 선택의 문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이 엄연함을 받아들임으로 선택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7-18).” 이를 우리가 어찌 알까?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의 성령께서 아신다. 하여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 13:12).” 한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를 이루실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타협은 금물이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할 때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겔 20:32, 33).” 곧 성령이 활동하시면 사탄도 같이 뛴다. 일이 더 효율적이고 타당한 이치에 맞게 우리의 지식을 동원한다. 세상은 그리 이루어지고 다들 그러고 사는 일처럼, 마땅히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순순히 받아들이게 한다. 이때에 예수님은 이르셨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혼선을 준다.
분명한 주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조상들이 행한 일이다. 저들이 숭배하고 거역하여 주를 멀리하였던 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올무가 되는 것을 본다. 저마다 부모처럼 살지 않으려고 하나 어느새 그 삶은 부모의 점철을 밟고 있다. 이에 성경은 엄중히 말씀하기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는 우리가 두려움으로 세상과 더 가까이 하는 까닭이다. 한데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간다. 나이 들면 두고 떠나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어떤 결과 앞에서도 강하고 담대할 필요가 있다. 두려워할 거 없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려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이렇게 우리의 특별함은 세상과 다르다. 안 믿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세상이 우리를 속인다 해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를 마땅히 여김은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 본래 세상은 그러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3-15).” 성경을 앎으로 말씀 가운데 거한다. 그 마음에 중심이 있다는 것,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흔들림 없이 한 길 가는 순례자로서의 삶, 이것이 우리의 길이 아닐까? 때론 넘어지고 또는 쓰러진다 해도 이로써 주를 바라고, 그로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을 더욱 바로 아는… 이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사모함이 우리로 자라게 한다. 이로 주의 인자하심을 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곧 우리는 몽돌 같이 단단하여 아무리 물속에 잠겨있다 해도 그 속은 결코 젖지 않는다. 물이 스며들지 않은 채 수천 년도 이겨낸 힘은 저의 단단함이 세파에 시달리며, 겉은 오히려 밴들거리는 것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마음으로 어려웠던 하루이다.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이고, 다음은 자식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선명한 것 같다.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 자신으로 인해 더욱 주를 찾게 되고, 자식으로 인하여 주 앞에 더욱 더 내려놓게 된다. 내가 나를 어찌하려 하지 않고, 내가 자식을 이기려하지 않는다. 오죽하니 바울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로 인하여 한 법을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아무리 어떻게 해도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자신이고 자식이지 않겠나? 마음 같아서는 이런저런 것들이 걸리지만 하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주 앞에 내려놓게 된다. 묵묵히 받아들임으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나이가 들면서 말씀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나의 아버지는 어찌 나를 묵인하고 용납하고 참고 또 기다리셨을까? 하고 내차 생각하게도 된다. 그렇게 어제는 1차 시험을 치렀다. 피곤한 기색으로 들어서는 아들에게 ‘수고했다.’ 하는 말 한 마디만 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종일 애태우고 마음 쓰던 것에 대하여 나의 부친이 그러했을 것을 자주 돌아보았다. 더불어 하나님 나의 아버지가 그러하셨을 것을 자주 묵상하였다.
그래서 나는 램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돈다. 가만히 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나의 지난날이 중첩되면서 어찌 나를 참고 기다리셨을까? 하는 마음에 목이 멘다. 이스라엘이 수시로 주를 배반하고 멀리할 때도, 누가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을 저버릴 때도, 예전에 믿던 이가 이제 주를 외면할 때도…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은 것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는 모두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맡기지 못하는 것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말씀이 약속하시는데도 이를 온전히 준행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이루려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안타까움으로 편지를 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자신이 처한 상황을 초월하는 안목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경험으로도 학식으로도 얻을 수 없다. 오직 주 앞에 내려놓고 비워내고, 비워내고 내려놓음으로 이를 수 있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오직 주만 바란다는 것, 오늘 모세는 이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신 12:28).”
곧 내가 살 길은 주를 바라는 것, 이는 말씀을 듣고 이를 지킴으로 복을 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32).”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무던함으로 말씀 앞에 앉으면 나도 언제쯤은 의연하고 초연하게 주가 이루시는 일을 알 수 있을까? 하여 다만 <부름의 상>을 향해 나아갔던 바울처럼, 자신을 버려두고 자식을 주께 맡김으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3).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성실하셨다. 나는 개떡 같았어도 하나님은 그럴 때에도 참고 또 기다리셨다. 그리하여 비로소 주를 바라는 날, 먼저 달려와 목을 안고 기뻐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감싸 안고 있는 탕자의 모습과 저의 등에 손을 얹으시고 인자하심으로 모두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참씩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의 모습을 그 표정도 알 수 있는 명암과 조도를, 램브란트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4-6).
시편의 노래가 위로가 되는 아침이다. 나는 가끔 저들이 살아갈 날들을 두고 긴 한숨을 쉰다. 한숨을 쉬다, 그러는 중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할 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7).
언제나 그렇듯 시편의 모든 시어는 내 노래가 된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8).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그리하여 속수무책인 나 자신과 자식 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16).
오늘의 부족함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사랑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어떠하든지 주가 함께 하심을,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0) | 2022.03.02 |
---|---|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0) | 2022.03.01 |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0) | 2022.02.27 |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0) | 2022.02.26 |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0) | 2022.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