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 18:3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2
지체함과 거절을 하나로 놓고 다시 본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였다. 저마다 회막을 세우고 그 땅은 그들 앞에 정복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지 못한 지파가 일곱이나 있었다(수 18:2). 여호수아가 답답한 심정으로 묻는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3).” 이에 셋씩 선정하여 땅을 돌며 그 땅을 그려가지고 오게 한다.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4).” 저들은 지친 것일까? 아니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일까? 왜 저들은 주저하고 지체하고만 있던 것일까? 이를 오늘 시편으로 연관하여 되새기면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2).
어떤 어려움 또는 슬픔 가운데서 주를 찾다 시들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누구는 말하길 열심히 기도해도 자기 기도는 그리 뚜렷하게 응답이 된 것을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런 이의 특징은 애매하다. 그렇다고 주를 멀리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주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는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지속되면,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3).
그 심령은 애매하다. 하나님을 기억하는데도 그 마음은 불안하여 근심한다. 그러니 심령은 상하고 괴로움은 떠나지를 않는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4).
그 원인이 어디 있는 것일까? 첫째, 그들은 보면 늘 그들의 마음이 지난날의 기억에 묶여 있는 것을 본다. 얹힌 것처럼 맺힌 기억이 저들을 붙든 것 같다. 우리나라 정서가 한의 민족이라지만 성경은 누누이 ‘푯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을 독려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그 지나간 세월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5).
둘째, 저는 슬픔에 젖은 영혼이다. 어쩌면 그 부모로 인해 혹은 지난했던 세월로 인해, 저의 말은 삐딱하고 생각은 눅눅하여 마치 ‘밤에 부르는 노래’처럼 청승맞다. 이를 곱씹고 되뇌고 하는 이의 생각은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6).
셋째,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의심은 작은 불씨 같고 회의는 강한 바람과 같아서 저의 건조한 영혼은 삽시간에 황폐해진다. 검불은 숨은 채 기세를 몰아가니 위에서 물을 퍼부어도 다시 살아나기를 여러 번이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7-9).
우리 안에 갈망과 확신을 잃으면 삶의 동력을 상실한다. 영혼은 기를 못 펴고 마음은 후회와 반성만 거듭할 따름이다. 우리 앞에 주의 기쁨을 두셨다. 영원한 즐거움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어디 잃었는지 그 기쁨과 소망을 잃은 데는 이유가 있다. 늘 돼도 않는 이 땅에서의 결실 때문이다.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부각시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어떤 부정적인 생각만 가한다. 그러니 그 영혼은 피곤하고 ‘학습된 무기력’은 늘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으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겠는 것,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질 엄두가 나지 않는 것.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단서를 얻는다. ‘무리와 제자들’이 섞였다. 또는 같이 있다. 이에 바울은 제자들을 따라 세우고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행 19:9).”
늘 보면 섞여 나온 무리가 말썽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우리 안에 이 두 마음이 동시할 때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다. 실은 육신을 입고 살면서 이를 따로 떼놓기가 쉽지 않다. 하여 지혜자는 하나님은 공평하심을 강조하신다.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13).”
물론과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공평하다. 그럼에도 ‘그 빛’은 다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그러나 하나님도 더는 내버려두심으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가끔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을 본다. 허튼 데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호 4:12).” 음란한 마음으로 음행함과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소원을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정작 이룰 수 있는 소망이 없다. 나는 늘 나의 그러한 면모 앞에 좌절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뚝, 하고 터지는 구멍 난 호수의 물줄기 같이 순식간에 미운 말이 튀어난다. 이를 가만히 늘어놓고 보면 지난날, 옛 이야기에 사로잡힌 영혼의 잔재 같다. 진화를 마친 줄 알았는데 건조한 영혼 어디쯤에서 불씨는 되살아나듯 부정적인 생각과 말이 툭, 툭 불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상숭배와 같아서 자신을 사랑함이다.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겉으로만 은금 같다. 실은 보화가 아닌 것을 두고 애지중지하는 마음에는 별 수가 없는 것이다.
원인과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예수를 갈망하고 확신하는 일, 그의 말씀되심을 의뢰하고 바라는 것, 저는 누구신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주를 기억하려고 하는 영혼의 사모함이 필요하다. 저는 우리의 주재요 예배가 되신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내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데 우선 답을 해야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고 싶을 때 하나님을 나의 주로 모시기는 어려운 법이다. 것도 그런 것이 현실과 이론은 다르다. 성경과 우리의 실상은 다르다. 같을 리 없다. 부딪친다. 소망하는 것과 일상은 너무 먼 듯하다. 눈을 감고 기도하다 눈을 뜨면 현실이라, 또 같은 날의 반복이 우리로 지치게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경은 이를 엄연히 구분하셨다. 첫째, 이미 완료된 일을 두고 허튼 데 계속 힘을 쓰는 경우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하고 이미 정하여진 바를 애매한 마음으로 모호한 눈으로 의심할 따름이다.
둘째는 이미 끝난 나라에서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1:15).” 그럼에도 우리가 몸 담고 사는 곳이 이 땅이다 보니 남들처럼, 남들 사는 것 같이 사는 게 행복일 줄로 아는 것인데… 이를 어쩐다? 결국은 끝까지 그 고집과 그 시선으로 뭉개고 미적거리다가는 자기에게 주시고 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사 2:17).”
나는 그래서 두려울 때가 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무수한 나, 섞여 나온 무리 같은 ‘나들’을 어쩌면 좋을까? 본디 갈망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갈망할 줄 모른다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영혼이란 증거가 되기도 한다. 혹은 갈망이 우상화되어 거짓 소망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듣지 못하신다. 어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감사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회계사 1차 합격자 발표가 난지 며칠 지났다. 아내는 궁금하다며 묻겠다는 걸 나는 그냥 두라 이르며 일체 무심한 듯 있었다. 뜬금없이 가족들 톡방에 자신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렸다. 앞서 며칠 전에 스스로 머리를 밀고 뚱한 표정이어서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괜찮다며 위로하였다. 나 역시 그리하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을 붙들고 가는 한 ‘너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응원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한 게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만큼 건실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자라고 성장하심을 나는 안다. 앞서 나의 날들에서도 확신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아무리 그릇된 판단으로 그릇된 길로 갈 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거기에 혼자 두신 적이 없다. 우리로 그 모든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도 가리치신다. 치를 떠는 외로움과 낙심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나의 하나님은 그러하셨고, 나의 부모와 형제들과 내가 아는 성경의 믿음의 선친들도 다르지 않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4-35).” 우리로 동정하고 소유하고 사랑하고 배우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담대하게 온전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때론 너무 먼 길을 돌아서야 알게 될 때도 있고, 환난과 어려움을 통해서야 깨달을 때도 있으나, 나는 바울의 이와 같은 설교를 사랑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어찌 환난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겠나? 하나 그 환난은 우리로 인내로 날게 하고 인내는 연단으로 우리 영혼을 단련하여 수련된 영혼은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닿을 것을 소망하게 한다. 곧 우리로 바라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 땅의 결과가 아니다. 나는 아들애의 글 밑에 덧붙여 ‘앞으로 몇 년을 더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주가 함께 하심으로 응원하고 믿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실제 있는 자가 더 잘 내고 더 많이 섬기고 헌신하고 그 사명을 다 할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는 까닭은… 자기를 부인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부인하지 못하는 무게만큼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인데, 방법은 하나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크리스천처럼 십자가 밑에 자신이 지고이고 걸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까지 부디 너무 먼 길을 혼자 짊어지고 가지 않기를 바랄 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바울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럴 수 있던 것일까?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아, 이 놀라운 고백과 참 수고와 기쁨이 오롯이 내 것이기를 나는 기도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부디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오늘 시편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오늘 우리가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것은 이것이었다. 하여,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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